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16화
416화. 마지막, 재(7)
스포츠 중계를 듣다 보면 자주 듣는 단어가 있다. 바로, 기세를 탔다. 혹은 기세를 탄다. 비슷한 말이다. 아니, 같은 말이다. 기세를 탄다는 말은, 어느 한 팀이나 선수가 특정 계기를 통해 갑자기 실력 자체에 버프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관중의 응원이나 선취점, 추가 골, 혹은 만회 골 같은 심리적 버프가 작용할 수 있는 상황을 거치고 나면, 갑작스럽게 선수 개인이나 팀 전체의 분위기가 변하면서 경기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변해 버리는 걸, 기세를 탔다고 보통 말한다.
하지만 이는 스포츠 경기에서만 나오는 일이 아니었다.
모든 일이 그랬다.
건축, 수업, 업무, 연구 등등, 인간이 개인이나 단체로 하는 모든 일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집중도가 확 올라가며 기세를 종종 타곤 했다.
그렇다면 예술계는?
드라마 촬영 현장은? 기세를 타는 일은 없을까?
있었다.
외부 요인의 작용까진 아니지만, 작품 자체의 가장 큰 기둥인 주연 배우 강지영이 현장에 도착하고, 그가 연기 자체에 몰입하며 현장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그의 모습은 다른 배우들을 점차 자극하기 시작했다.
주연의 집중.
그런데 그 사람이 강지영이다.
화제성을 잡으며 흥행을 성공시킨 장본인이, 강지영이다. 시즌1의 인기도 사실 지영의 덕이 컸고, 시즌2의 말도 안 되는 시청률과 OTT 플랫폼에서의 대박 흥행의 지분 70%는 작품 당시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강지영이란 배우의 단독 힘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시즌3?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이미 거대한 화제를 몰고 다니기 시작한 게 나의 무사님이다. 그리고 그 촬영 직전에는 더욱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지독히도 이타적이었던 희생정신과 그 희생 덕분에 다친 다리를 이끌고도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말도 안 되는 위업을 이룩하며, 올림픽 뒤에 촬영이 예정되어 있던 나의 무사님에 어마어마한 화제성을 플러스시켰다.
촬영이 시작도 되기 전에 이미 화제란 화제는 죄다 끌고 간 게 나의 무사님 시즌3였다.
그에 배우들도 전부 들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작품이 잘 되면 주연과 비중 있는 조연만 잘 되는 게 아니다. 새로운 얼굴을 언제나 갈구하는 작가나 연출이 작품을 보고, 그 배우를 중심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그런 일이 드무냐?
아니다.
자주 일어난다.
그렇게 기회를 잡아 성공한 배우들이 수두룩했다. 신인, 혹은 원석 발굴은 연출과 작가의 업이라고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은 들떴다. 하지만 지영은 촬영장에 장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극을 이끌어갈 가장 중요한 인물인 지영이 현장에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그 중심을 이연과 홍진아 감독, 정은정 작가가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며 해결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배우들은 이미 제대로 집중도 못 하고 흔들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계속 불안감이 있었다.
희생과 올림픽을 통해 지영의 몸이 회복 불가가 된 건 아닐까?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걱정 불안에는 또 재밌게도, 배우의 기대와 욕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지영이 없으면 나의 무사님은 좌초다.
제대로 암초에 걸려, 항해가 아니라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전부 고사한다고 봐야 했다. 과장이 심하다고? 절대, 절대 아니었다.
나의 무사님이란 작품에서, 강지영은 절대 대체 불가 배우였다.
다른 배우로의 교체? 그건 작품의 팬을 ‘전원’ 적으로 만드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강지영은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지영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이런 이유에 불안하던 마음이, 지영의 등장으로 전부 사라졌다.
지영은 지영이었다.
그는 자신이 단순히 특수한 사건을 계기로 인기를 얻은 게 아님을 증명했다. 첫날과 둘째 날이 다르고, 둘째 날과 셋째 날이 달랐다. 일주일. 일주일 만에 강지영은 현장 분위기에 완연히 녹아들었고, 자신의 존재감을 사방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 존재감 발산에, 다른 배우들은 오히려 힘을 얻었다.
그가 제대로 연기에 집중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이 좌초할 일이 없다는 것을 뜻했고, 그건 곧 그대로 자신의 기회도 건재하단 뜻이기 때문이었다.
안정감.
강지영의 존재감이 다른 배우들에게 안정감을 선사했고, 그 안정감은 곧 자신감으로 변했다. 작품만 제대로 나가면 제대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기세가 살아났다.
닻을 올리고, 돛을 활짝 펴고 대양을 나가는 함선. 아니, 함대처럼 위풍당당한 느낌마저 났다. 다들 자신감이 가득 차서, 연기에도 힘이 넘쳤다. 그러니 NG 횟수도 줄어들었고, 배우들의 컨디션도 점점 살아났다.
눈보라와 폭풍이 몰아쳐도, 배우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거, 촬영하기 좋은 날씨다!”
눈썹이 얼다 못해 고드름이 폈는데도 한 말에, 배우들은 미친놈을 보듯 고개를 저은 게 아니라 모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보라. 한파, 블리자드?
이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 * *
후욱…….
지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벌써 세 번째 연습이다.
원 테이크로 가는 액션 신이다.
홍진아 감독이 드물게 액션에 욕심을 내는 장면이고, 재가 살아남은 뒤 수련하고, 그 성장의 정도를 보여주는 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특별함이 담겨야 했고, 그만큼 위험한 합이 많았다.
그러니 이걸 커버하려면 연습에 또 연습밖에 없었다.
짝짝!
“그만, 그만하자. 지영아.”
“관장님. 후우.”
“이 정도면 충분해. 너도 넌데, 애들도 지쳤어. 잘못하면 네가 다친다.”
“네. 후우…….”
지영은 김진우의 만류에 고개를 끄덕이며 폐에 가득 숨을 넣었다. 사실 한두 번 더 해보고 싶었다. 그 정도의 체력이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다른 액션 배우들의 체력이 아슬아슬한가 보다. 지영보다 체력이 약한 게 이상하다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지영도 긴장한 채 합을 연습하지만, 배우들은 더했다.
왜?
지영이 다치면 어떤 문제가 벌어지는지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조심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합을 망친다고 김진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럼 또 제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또 지영이 다칠 위험이 늘어난다. 그러니 심적으로 느끼는 부담이 상당하다 못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지영이 다치면?
대역 죄인 당첨이다.
어쩌면 은퇴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로.
그러니 지영보다 배우들이 받는 압박이 더했다. 그런 배우들의 모습에 지영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꾸벅, 꾸벅. 합을 맞춘 배우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배우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뭘 또 인사까지 하고 그랴. 됐어. 하하.”
“맞아. 안 그래도 된다. 매일 할 때마다 인사하는 건 좀 그렇잖아. 우리도 우리 일하는 건데. 하하.”
배우들의 말에 지영은 허리를 세우고 씩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드라마는 거대한 기계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극치인 기계 말이다.
배우, 미술, 음향, 미술, 연출, 작가, 이런 각자 역할을 가진 팀이 뭉쳐서 유기적으로 달아가야, 수십, 수백의 톱니가 물려 기계처럼 제대로 작동한다. 여기서 어느 하나가 삐걱거리면서 톱니가 물리지 않으면 기계는 돌지 않는다.
수백, 수천의 톱니에는 제각각의 역할이 있는데, 어느 하나가 고장 나면 제대로 돌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게 좀 극단적인 비교이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배우들의 말도 맞았다.
“스트레칭하고, 얼른 쉬어라. 너 얼굴 보니까 많이 지쳤어.”
“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김진우가 배우들과 떠나자, 지영은 앉아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앉아서 몸을 푸는데, 얼굴에서 땀이 흘러 매트에 뚝뚝 떨어졌다. 연습실은 따뜻했다. 거대한 조립식 건물을 통째로 옮긴 연습실인데, 이것도 역시 포드의 지원이었다.
이런 연습실이 몇 개나 있었다.
액션 배우들이 쓰는 연습실과 따로 연기를 다듬거나 연습하는 작은 독립 연습실이 휴식 공간 뒤로 십수 개나 있었다.
자본주의 세계 미국에서는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더니, 정말 다시 한번 느끼지만 어마어마한 지원이었다.
‘물론, 지원한 만큼 홍보 효과도 충분히 누리겠지.’
포드가 지영에게 고마워서 이걸 무료로 후원하는 거다? 그건 또 아니었다. 작품에 제품 홍보는 불가능하지만, 작품 외적인 홍보는 충분히 가능하다. 트레일러 영상이나, 배우들 SNS. 그리고 따로 포드의 마케팅팀이 움직이며 홍보가 될만한 모든 것들을 지금 수집하고 있었다.
나중에 방송이 시작된 순간부터 포드는 수집한 것들을 잘 포장해 내보낼 것이다.
그럼? 작품이 잘될수록 포드가 받는 반사이익도 늘어난다.
포드의 모델로 지영이 있다면, 나의 무사님의 모델에는 포드가 있는 것과 같았다. 서로 윈윈하는 관계인 거다.
후우.
지영은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칭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식단을 받아 저녁을 해결하고, 지영의 몫으로 배정받은 버스로 올라왔다. 내일 이른 시간 해가 뜰 때 찍을 신이 있었다. 그래서 호텔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이미 짐도 옮겨왔다. 그리고 버스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훈훈하게 난방도 잘되고, 소음도 제대로 잡았다.
포드가 작정하고 리모델링한 버스는 웬만한 성능의 캠핑카는 압살할 레벨이었다.
물론 샤워 시설은 따로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었다. 웬만한 건 안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취사 시설까지 전부 다 제대로 갖춰졌을 정도다.
샤워까지 하고 온 지영은 노곤했지만, 오늘 훈련을 복기했다.
훈련이다.
그런데 복기까지?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 신은 좀 특별했다.
변한 지영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원 테이크로, 한 번에 달리는 신이다. 그러나 그건 지영도 몇 번 경험이 있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긴장하는 이유는 액션의 레벨이었다.
그중에서, 회피 동작이다.
액션은 무조건 합이었다. 즉흥이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합을 맞춘 제대로 배우와 액션을 주고받는데, 여기서 주인공은 당연히 맞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고, 때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의 회피 난도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코앞 몇 ㎝에서 피해야 하는 게 기본이다.
솔직히 몇 ㎝면 거의 닿을 거리다. 조금만 실수해도 주먹이나 모조 칼, 창, 화살이 얼굴을 친다. 날을 벼리지 않고, 특수처리해서 벼린 것처럼 보이는 모조 칼이나 창이다. 하지만 그런 가품에도 맞으면 무사하길 기대하는 건 힘들다. 왜? 휘두를 때를 생각해 어느 정도의 강도를 전부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적인 예로 플라스틱 물병으로 휘둘러 때리면 별로 아프진 않다. 게다가 힘도 제대로 못 받고. 그런 걸 들고 연기를? 요즘 카메라가 좋아서 문제를 아주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단단해야 했다.
적어도 휘두를 때 낭창낭창 휘어서는 안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런 모조 무기에 맞으면? 재수 없게 맞으면 대형사다. 스치듯이 맞아도 다치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모조 무기가 얼굴 코앞까지 날아드는 것을 아슬아슬한 거리로 피해야 한다.
거기에 문제는, 여유까지 둬야 하는 거고.
초반 등장 이후 몇 차례 나오는 액션 신에서 재는 이전과는 다른 여유를 보여줘야 했다. 이유는 내일 찍을 신과도 연관이 있었다. 선동일이 맡는 학소양이 은거 기인이기 때문이었다. 학식도 뛰어나고, 가진 무술도 엄청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대의 제국제일검을 놓고 다퉜던 인물이란 설정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런 학소양에게 훈련받고, 재는 강해진다. 이전에는 그래도 좀 치고받았을 적을 가볍게 상대할 정도로. 그 정도를 보여주는 신이다.
그러니 복기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몇 차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지영은 시간을 확인했고, 저녁 10시나 됐음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해가 뜨기도 전에는 일어나야 하니, 조금 이른 시간임에도 지영은 잠을 청했다.
눈을 감으면 자는 편인 지영은 곧,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새벽 4시에 일어나, 첫 신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