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15화
415화. 마지막, 재(6)
으음, 꿈에서 깼다.
꿈에서 깬 선고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윽!”
그리고 옆구리와 어깨에서 올라오는 격통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아픔보다, 꿈에서 깬 게 더욱 아쉬웠다. 왜? 사랑해 마지않던 연인이 꿈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져, 이제는 자신의 곁에서 떠나버린 재와 그녀는 꿈속에서 행복했다.
사냥에 일가견이 있는 자신이 동물을 잡아 오고, 그걸 해체해 불에 구워 먹는, 아주 별것 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꿈. 강가에서 같이 나란히 앉아 물장구를 치는 꿈. 해가 떨어지면 집 안에 화로에 불을 피우고, 서로 꼭 붙어서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는 꿈. 달콤한 말로 사랑을 속삭이던 꿈.
그런 꿈이었다.
그런 꿈이기에 깨기 싫었다. 깬 게 너무 아쉬웠다. 심지어 이게 처음이었다. 그렇게 그리워했음에도 재는 한 번도 꿈에 찾아오지 않았다. 꿈속에서라도 그를 만나기를 그렇게 기도했지만, 한 번도 재는 꿈에 나오지 않았다.
재가 떠나고 2년 만에, 처음으로 그가 꿈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 꿈이 깨져 버렸다.
자신이 눈을 뜸으로써.
“왜, 왜에…….”
왈칵 눈물이 났다.
차라리 그대로 죽었으면, 어딘지 모를 이 훈훈한 곳에서 눈을 뜨지 않았으면, 그랬다면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몸서리치게 화가 났다. 하지만 이미 깬 꿈이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다시, 다시 찾아올 거라고 믿어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밖에 없었다.
선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타닥, 타닥.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작은 불길을 내며 타고 있는 모닥불이었다. 훈훈한 열기의 정체를 확인한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새까만 벽면이 보였다. 나무가 아니라, 석벽이었다. 동그란 형상을 유지하는 걸 보니 이곳은 동굴 같았다.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생활감은 거의 없었다. 나무로 만든 그릇 몇 개와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는 대접 하나. 작은 칼 두 개와 긴 창 하나. 그리고 자신의 활과 화살, 비수가 보였다. 그녀는 몸을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 자신의 화살과 무기를 챙겼다.
도움을 준 사람은 이렇게 자신을 살려서 이곳에 데리고 온 걸 보면, 죽일 의도는 없는 사람일 거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
선의 뒤에 음습한 의도를 숨길 수도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무기를 챙겨 품에 안았다. 차가운 비수와 활, 화살의 느낌이 그녀의 마음을 단번에 안정시켜줬다. 특히 활과 화살은 그녀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것이라, 잃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그래도 시위에 화살을 걸어 놓는 건 잊지 않았다.
자신의 활이면, 코앞에서 놔도 목을 가볍게 뚫고 들어간다. 그러니 최악의 경우 자신을 지킬 유일한 수단이었다.
주변을 좀 더 둘러본 선고는 다시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짚을 엮어 만든 이부자리는 습기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아래로 뜨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돌을 모닥불에 달궈 자리 아래 깔아놓은 것 같았다.
섬세한, 세심한 배려였다.
동굴 밖은 혹한의 대지다. 그러니 동굴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동굴에 그냥 자신을 눕혔으면 한기가 상처로 침투해 지금쯤 그녀를 재의 곁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구해준 사람은 정말 신경을 많이 써줬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그녀는 천천히 상처 부위를 더듬었다.
양 옆구리가 베이고 뚫렸다. 그리고 심장을 노리던 칼날을 겨우 어깨로 받아서, 어깨에 두 방을 찔렸다.
절대 적지 않은 상처.
처음 옆구리를 베여 출혈이 있었을 때, 선고는 그때 복귀했어야 했음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복귀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갑자기 적이 나타나서 용변을 보며 방심하는 걸 우연히 목격하게 됐고,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그놈 목을 베었을 때 그게 마지막이었어야 했어.’
그러나 그녀는 욕심을 부렸다.
3인 1조로 움직이는 걸 알아서, 근처에 있을 위장초소에 분명 적이 둘이나 더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제국군.
연인 재를 죽인 원수들.
선고는 그 제국군이란 먹이를 결국 잡기로 정했다. 하지만 그 초소에서 나온 놈은 생각보다 강했다. 근접 박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맞붙는 순간 알았다. 이놈은 그간 상대했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눈빛에 잔뜩 섞인 살기가 그랬고, 자신의 기습에 순식간에 평정을 찾고 반응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생존본능이 마구 비명을 질렀다.
물러나! 물러나라고! 뒤지고 싶어? 뒤지기 싫으면 도망쳐!
그렇게 악을 쓰는 생존본능의 요구에 따라, 그녀는 거리를 벌렸다. 벌리지 못하면, 피가 잔뜩 묻어 녹슨 놈의 칼이 자기의 몸을 뚫을 것이란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리를 벌리지 못했다. 놈은 눈에서도 아주 잘 움직였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던 놈이었다.
거리를 벌리는 와중에 결국 몇 번이나 채이고, 몇 번이나 뚫리고 베였다.
피가 쭉 뿜어지며 갑자기 현기증이 나며 의식이 흐려졌다.
눈앞이 뿌옇게 변하는 순간 선고는 드디어 재를 만나러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는 저항을 포기했다.
안식과 연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그리고 놈이 올라타는 순간,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죽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살아 있었다.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은 채 적을 죽이고 도망쳐 이곳에 혼자 오진 않았을 테니, 분명 누군가가 도운 게 분명했다. 좋아해야 하는 걸까?
‘좋은 거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원수를 지옥으로 데리고 갈 수 있을 테니까…….’
좋은 일이다.
아직, 아직 연인의 복수를 끝낸 건 아니니까. 그래서 악의를 가진 조력자가 아니라면, 선고는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하기로 했다. 그래서 누워서 가만히 도움을 준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한참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던 선고는 어느 순간 뜨스한 열기에 몸과 마음이 풀어져,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쯤 잠들었을까. 다시 눈을 번쩍 뜬 선고는 급히 몸을 세웠다.
“윽!”
완전히 정신을 놓은 것처럼 잤다. 적일지, 아니면 아군일지 모르는 조력자를 두고. 그에 급한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가 온몸에서 몰려오는 격통에 인상을 와락 쓴 선고는 그래도 반사적으로 화살 깃을 잡았다.
휙휙!
그리고 전방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아직 안 온 건가?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일어났어?”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선고는 아픈 몸으로도 앞으로 굴러 거리를 벌리고 틀어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선고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살을 놓으려던 손을 가까스로 제어했다.
“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니, 제발, 꿈에 한 번 나왔으면 했던 이의 얼굴이었다. 좀 수척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얼굴이었다.
“재……?”
“오랜만이야.”
“…….”
그의 목소리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 그만의 목소리. 정이 담긴, 그 목소리. 자신을 여자로 봐주던, 사랑해주던 이의 목소리.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격통에 이게 꿈이 아님을 이미 깨달은 선고는 활을 놓고 엉금엉금 기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먼저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는…… 재.
“무리하지 마. 상처 덧나.”
“흑! 흐윽! 으으……!”
흐아앙!
입술을 비집고 나온 울음은 어느새 동굴을 울리기 시작했고, 이어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서 통곡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정신을 잃는 그 순간에도 그녀는 재의 손을 꼬옥, 잡고 놓지 않았다.
* * *
컷!
홍진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는 심수정. 눈을 뜬 심수정은 지영을 보며 씩 웃었다. 인사만 하고 곧장 합을 맞췄다. 아직 대화를 나누기도 전. 그러나 그런 반가움보다 지영은 심수정의 연기가 진짜 물이 올랐음에 놀라고 또 놀랐다.
액션도 액션인데, 감정몰입이 진짜 기가 막혔다. 재. 그러니까 지영을 보는 순간부터 눈빛이 떨리기 시작하며 의아, 놀람, 확인, 그리움 등으로 변해가는 그 과정을 지영은 고스란히 지켜봤다. 지켜봤고,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각오는, 그녀의 머리 스타일에서 이미 봤다.
하지만 각오가 남다르다고, 실력이 급상승하는 건 아니었다. 실력이란 건, 하루아침에 늘지 않는다. 인고의 세월을 수련, 훈련, 단련해야 오르는 게 실력이었다. 심수정의 연기는 시즌2 때와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줬다.
특히 의상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오열할 때는, 정말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을 다시 만난 여자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 풍부했던 감정.
그 감정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재를 연인으로 생각했다.
‘생각하면 당연한 거지.’
몰입했다.
그러면 심수정은 선고가 된 거고, 선고의 연인은 재다. 그런 재가 다시 살아서 눈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생각하면 선고의 마음이 당연히 이해가 갔다. 지영이 연기 중에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심수정의 연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이번 연기가 꼭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지영이 연기 중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심수정의 연기가 지영의 몰입을 깼다는 뜻이다. 이는 곧, 연기에서 졌다는 뜻이었다.
“나 잘했지?”
심수정의 확인 사살에 지영은 그런 감정을 모조리 숨기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였어요.”
“아싸! 칭찬받았다!”
“하하.”
칭찬받을 만했다.
그녀의 이번 연기는.
일어나서 신을 확인했는데, 중간에 몰입이 깨졌지만 그게 확 티가 나는 부분은 다행히 없었다. 홍진아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사인을 냈고, 지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두 번째 신이다.
두 번째 신이, 이 감정 소모 극악한 장면을 무사히 끝내서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임수진이 가져다준 옷을 얼른 챙겨 입고, 지영은 감정을 정리했다.
솔직히 이번 신은 조금 부족했다고 느꼈다. 감정이 중간에 깨지기도 했고, 아예 다른 레벨로 성장한 심수정의 연기에 밀리기도 했다. 그래서 스스로는 이번 신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불쑥.
‘한 번 더 찍는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영은 그러지 않기로 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 연기의 주연은 심수정이었다. 재와 재회하고, 그 감정을 터뜨리는 절절한 신이다. 지영은 사실 이 신에서 크게 많이 한 게 없었다. 대사 몇 줄과 품에 안겨 오열하는 심수정의 안고, 그녀가 감정을 잡을 수 있게 돕는 그런 역할이었다.
그러니 힘은 자신이 아니라, 심수정이 쏟았다.
그리고 그 심수정은 지금 지쳐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런 심수정에게 신을 한 번 더 하자고 한다고?
그건 괴롭힘이다.
그러니 그러지 않는 게 좋았다.
‘대신 다음 신 정신 바짝 차리자.’
이틀의 준비 시간.
지영은 혹독하게 준비했다.
이틀간 몸의 수분을 컨디션이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뽑아냈다. 그 결과 이틀 전과 오늘의 지영은 일단 외모부터 차이가 났다.
고작 이틀.
지영은 이 이틀로는 아직 부족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지영의 착각이었다.
지영이 그렇게 다음 신을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는 동안 홍진아 감독은 지영의 영상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있었다.
달랐다.
연출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건 연출을 맡은 이의 기본 중의 기본 스킬이어야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홍진아 감독은 그 기본 스킬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무사님이란 거함을 무리 없이 끌고 온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배우를 보는 눈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시즌1에서 2로, 2에서 3으로 이어지며 많은 배우들이 물갈이됐다. 전쟁 시대극이라 극 중에서 죽으며 하차하는 배우들이 계속해서 나온 것이다. 그럼 그렇게 생긴 빈자리는?
당연히 새로운 배우가 메웠다.
그럼 그 배우는 누가 캐스팅할까? 한국에도 이제 충분히 자리 잡은 캐스팅 디렉터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배역에 배우를 추천할 뿐이다. 꽂, 아, 주, 는 게 아니라. 그렇게 추천받은 배우의 연기를 보고, 최종결정하는 건 두 사람이었다.
바로 정은정 작가와 홍진아 감독.
정은정은 작품을 가장 잘 아니 작품과 배우의 느낌을 보고, 홍진아 감독은 연기 자체를 본다. 그렇게 두 사람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하면 계약으로 이어진다.
그럼 그동안 홍진아 감독이 본 배우의 수는?
많았다.
일일이 세는 게 힘들 정도로. 그러다 보니 기존의 안목에 레벨 업 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했다. 그런 그녀의 안목으로 보기에 지영이 오늘 보여준 두 번의 신 연기는 매우 괜찮았다. 이제 첫날이라서 적응이 필요할 법도 한데, 지영은 NG 없이 두 번의 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런데도 지금.
‘부족하단 느낌을 받고 있지.’
분명 잘했는데 말이다.
그럼 그런 배우가 완전히 현장에 적응하고, 연기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어떤 모습이 나올까?
홍진아 감독은 임은진이 와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정말 그 말 대로, 강지영은 달라져서 왔다.
도착한 다음 날 봤을 땐 조금 풀려 있던 느낌이, 지금은 바짝 조여져 있었다.
무사 재.
날카롭고, 시니컬한 느낌을 한없이 표출해야 하는 캐릭터와 서서히 제대로 동기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게 홍진아 감독을 매우 흡족하게 했다. 하지만 따로 얘기하진 않았다. 왜? 굳이 잘하고 있는 배우에게 따로 조언이나, 기대감을 갑자기 표출하는 짓은 매우 멍청한 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홍진아 감독은 지켜보기만 했다.
흡족하게.
그런 홍진아 감독을 일깨운 건 장석민 조연출이 다가와 촬영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을 때였다.
나의 무사님은 지영이 도착함과 동시에 닻을 올리고, 돛을 편 뒤 연안에서 대양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