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14화
414화. 마지막, 재(5)
악순은 순간적으로 달려드는 그림자에 흠칫 놀랐지만, 그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보통 이 시기에 이곳 초소에 배치되는 병사는 북쪽 지방 병사가 많다. 그들은 북풍의 설원에 적응한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혹서의 시기에는 남부 지방의 병사들이 온다.
남부 지방의 병사와 북부 지방의 병사는 정예병이다. 강력한 이들임에 부정할 이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결은 달랐다. 북부는 산맥과 숲이 많아 산악전이 기본이고, 남부는 해적과의 전투로 해상전이 많았다.
지금 이곳은 전형적인 북부 병사들의 터전.
악순 본인은 그런 북부군에서도 고르고 고른 이들로 따로 창설한 특수부대의 일원이었다. 산맥 너머 야만인들과 하루를 멀다 하고 칼질을 하던 부대에서 이곳으로 파견을 나온 게, 악순이다.
피와 살이 매일같이 튀는 곳에서 살아남은 자신이다.
그런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 어떤 순간에서도. 그래서 악순은 거의 곧장 정신을 차렸다.
쉭!
푸욱!
그림자의 손에서 뻗어 나간 날카로운 비수가 동료 철재의 허벅지에 박혔다. 워낙 창졸간 벌어진 일이라 악순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또 비수가 날아올 수도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며 그대로 자신을 덮쳐왔다.
쇄애액!
역수로 솟구치는 비수는 턱을 노려왔다. 피하지 않으면 그대로 꼬치처럼 꿰여 버릴 게 분명한 일격. 당연히 그냥 맞아줄 수는 없었다.
까앙!
이미 뽑았던 칼을 들어 솟구치는 비수를 막은 악순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은 일격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힘이 약하다. 그제야 그림자가 생각보다 호리호리하다는 게 눈에 보였다.
‘여자?’
아무래도 여자 같았다.
씩, 악순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조소가 맺혔다. 전장에서 남녀 따지고 싶진 않았다. 남자건 여자건, 적이면 모두 죽이면 된다. 아니면 내가 죽으니까. 그것뿐이다. 북부 야만인의 여자들은 괴력을 갖춰서 북부군의 웬만한 병사보다 강하지만, 이 여자는 그런 건 아니었다. 강하게 쳐내면 오히려 뒤로 밀어낼 수 있을 정도다.
이러면 쉬워진다.
비록 철재가 허벅지에 비수 하나를 꽂고는 있지만, 그래도 저 정도는 충분히 참고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를 상대로 2대1이다. 패배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쉬익!
살짝 튕겨 나간 칼이 손목을 비틀었는지, 궤적이 역으로 쭉 그으며 내려왔다. 노리는 곳은 허벅지. 기동성을 죽이려는 판단일 때 나오는 전형적인 공격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격, 악순은 지긋지긋하게 당해봤다. 북부군에서 작전에 나가면 갑자기 수풀에서 사슬 같은 날이 다리를 노리고 하루에도 십수 번씩 날아든다.
귀신 같은 일격이다.
그걸 하루에도 몇 번씩 피해 가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 정도 공격? 우습다. 노리는 허벅지를 뒤로 빼며 자세가 살짝 앞으로 엎어지는 걸 이용해 뽑은 칼을 그대로 그었다. 침입자는 용케도 그걸 고개를 뒤로 내빼며 피했다.
그리고 슉, 칼날이 날아들었다.
언제 뽑았는지 모를 비수를 재차 던진 것이다. 악순은 그 칼날을 피하기는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몸을 틀어 어깨를 내밀었다. 심장 근처에 박히느니, 어깨를 내주는 게 낫단 판단 때문이었다.
푹!
거리가 가까워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해 삼 분의 일만 박힌 비수. 그러나 꽂히긴 꽂힌 거다. 불로 지지는 통증이 화르륵 피어났다. 몸을 뒤로 빼며 어깨에 박힌 비수를 뽑았다. 꽂아놓고 있을 만큼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동시에 철재도 비수를 뽑았다.
그런데…….
푸슉! 푸슈슉!
“염병…….”
욕지기에 고개를 돌려 피가 쭉쭉 뿜어지는 철재의 허벅지를 힐끔 본 악순은 인상을 찌푸렸다. 피가 저렇게 난다는 건 허벅지 혈관을 비수가 건드렸단 소리고, 그건 곧 가망이 없다는 소리였다. 피가 통하는 관이 터졌으니, 철재의 운명은 이제 천천히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철재! 마지막이니까 그냥 도와!”
“시벌…….”
어차피 죽는다.
벌써 바닥에 흥건히 고이기 시작한 피다. 어차피 죽을 운명. 그러니 도움이라도 조금 되는 게 낫다. 매우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북부군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죽음을 직감한 순간이라면, 한 명의 아군에게 더 도움이 되고 죽어라.
그게 북부군의 기조다.
철재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다. 피가 주르륵!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육이 수축하며 피가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다시금 잘린 혈관을 통해 피가 터지기 시작하자 침입자는 뒤로 물러났다.
죽음을 직감하고 덤벼든다는 것을 직감했기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였다. 그런 선택은 옳았다. 철재는 죽음을 도외시하고 덤벼들었다. 슈아악! 비수가 하나 더 날았다. 그러나 거리가 제법 있었고 사전에 동작이 보여서 철재는 그걸 가볍게 쳐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동작에 제동이 걸렸고, 짧은 틈을 노리고 파고든 침입자가 옆구리에 작은 비수를 하나 더 쑤셔 박았다. 철재는 덥석 상대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고양이처럼 몸을 뒤로 굴려 철재의 품에서 빠져나간 침입자는 다시 비수를 던졌다. 비수는 이번엔 멀쩡한 허벅지에 날아와 꽂혔다. 기동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격. 철재는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방심한 틈에 날아든 비수 한 방이, 북부군에서 10년을 살아남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그게 그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 표정은 이내 풀렸다. 10년을 같이 전장을 뒹군 악순이 자신의 복수를 해줄 것임이 분명하기에, 그래서 풀렸다.
쉬익!
새까만 그림자가 날아가, 침입자를 그대로 걷어찼다. 뻐억! 소리가 나면서 침입자는 짓이기고 들어왔던 문으로 도로 튕겨 나갔다. 독한 년이다. 뻑 소리가 날 정도로 제대로 맞았는데 신음도 흘리지 않을 걸 보니. 진짜 만만한 인간이 아니다.
“……정리하고 올게.”
악순의 말에 철재는 웃었다.
“파묻어뒀던 술이나 가지고 와.”
“그려, 가기 전에 한잔해야지.”
“흐흐…….”
철재의 안색은 벌써 창백해졌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앞뒤 생각 안 하고 움직인 대가를 치르는 거다.
10년을 같이한 전우가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도 함께한 정이 있으니, 마지막은 옆에 있어줄 생각으로 악순은 표정을 굳히고 밖으로 나갔다. 휘이잉! 나가는 순간 몰아친 칼바람. 침입자는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를 바짝 낮추고 언제든 달려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악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래줘서…… 정말 고맙다, 시벌년아!”
푹! 푹!
눈 쌓인 대지.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깊이 내린 눈밭을 밟고 악순은 침입자에게 덤벼들었다. 쇄애액! 거리를 잡자마자 그대로 칼을 내질렀다. 자세가 무너지지 않게 짧게, 정확히 목젖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찌르기다. 더 깊게 들어가면 자세를 빼내기가 너무 안 좋아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 악순의 일격은 침입자는 옆으로 구르며 피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 사선으로 피하는 거야 워낙에 많이 봤다. 북부군이 주둔한 북부 산맥 너머에서 온 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굴을 보니 시꺼먼 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북북 산맥 너머 야만인은 전부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악순은 다시 비릿하게 웃으며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으로 막 자세를 바로잡는 침입자의 배를 다시 걷어찼다.
빠악!
서걱!
“큭!”
배를 발로 차는 순간 손에 쥔 비수가 종아리를 그었다. 그 짧은 찰나, 자세도 제대로 잡지 못했는데 틈을 노려 일격을 같이 먹였다. 쉽게 볼 수 없는 년이란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 악순은 표정을 굳힌 채 다시 덤벼들었다. 거리를 주면 안 된다. 바람이 많이 불지만, 거리가 가깝고 어둡다. 그런데 이 정도면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정확히 비수로 목덜미를 꿰뚫을 실력이 있는 년이다.
그래서 거리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까이서 비수에 맞으면 그래도 아까처럼 힘이 덜 받아 치명상은 피할 수 있으니까.
뻐억!
서걱!
일어난 침입자의 가슴을 다시 어깨로 들이받고, 그 동작에 이어서 칼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뻑! 소리와 팔뚝을 살짝 벤 느낌이 났다. 덩치가 작아서 저 멀리까지 날아간 침입자에게 악순은 목을 뚜둑, 꺾으며 다가갔다.
“비수는 기가 막히게 던지더만, 근접전은 생각보다 그저 그러네?”
근접 박투를 안 해본 느낌이 났다.
진짜 목숨을 내놓고 서로 칼질을 하면, 저런 식으로 움직이진 않는다. 어차피 칼이 상대의 몸에 닿아야 하는 게 기본이라 거리를 벌려도 내가 파고 들어갈 거리 이상은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침입자는 계속 거리를 벌렸다. 정확히 비수를 던질 거리였다. 제대로 힘을 받아 치명상을 줄 수 있을 정도의 거리.
그렇다는 건 칼을 쓰는 건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다.
씨익.
그게 악순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돌아오게 했다.
“얼른 끝내자, 네년 때문에 내 동료가 곧 북녘의 혼이 되기 직전이니까.”
“…….”
비척비척이며 일어난 침입자를 본 악순은 거의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체력이 별로인지, 가슴의 기복이 컸다. 거기에 움직임도 느려졌고. 이는 전형적인 체력 고갈 현상이었다.
저 정도 실력을 갖췄는데, 고작 이 정도로?
그렇다는 건 곧 체력이 고갈될 만한 일을 이미 이곳을 치기 전에 하고 왔다는 뜻이었다.
“씁. 여기가 처음이 아니구만.”
그래서 악순은 다시 이 초소가 처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저 침입자가 돈 다른 초소에는 시체만 즐비하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누가 뒤졌는지 모르지만, 편히 눈감아라. 니들 목 딴 쌍년도 같이 보내줄 테니까.”
파바박!
좀 딱딱한 지면을 박차고 거꾸로 짓이겨 들어간 악순은 검을 내려쳤다. 그러자 상체를 뒤로 빼는 침입자. 하지만 조금 전의 동작은 미끼였다. 미리 움직이게 하려는. 보폭을 크게 밟아 쑥 들어간 악순은 칼을 홱 던졌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서 성인 팔 길이 정도의 반월도가 쑥 날아오자 급히 고개를 틀어 피한 침입자. 그런 침입자에게 좀 더 다가간 악순은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그대로 옆구리에 쑤셔 박았다.
“큽…….”
드디어 나오는 비명.
악순은 히죽 웃으며 검을 뽑은 다음 그대로 가슴을 찍었다.
푹! 푸욱!
두 방의 칼질.
심장을 정확히 노렸지만, 몸을 트는 바람에 심장에서 빗겨 간 어깨 옆만 두 방이나 찍어버렸다. 하지만 악순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세 방이나 놨기 때문에, 이걸로 승부는 이미 난 것과 같았다.
뻐억!
배를 다시 발로 밀어 차자, 침입자의 가벼운 신형이 붕 떠서 뒤로 날아갔다.
“큭, 크르륵…….”
“그래도 둘이나 잡았으니 인정은…… 아니지. 둘 넘게 잡았겠지. 쌍년.”
다시 히죽 웃은 악순은 칼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침입자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체력이 없던 게 아니라 애초에 다른 부상이 있었다. 칼을 박아 넣었던 어깨와 옆구리 말고, 옆구리 반대쪽이 이미 피로 흥건했다. 그건 곧 응급처치만 하고 이 초소를 쳤다는 뜻.
“뒤지고 싶어 환장했던 년이구만.”
저런 부상이면 적어도 일주일은 요양이다.
그것도 적게 잡았을 때다. 제대로 낫길 바라려면 그 이상 걸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입고도 초소를 습격해? 죽고 싶지 않은 이상. 아니, 그냥 죽고 싶었던 거다. 목숨을 내놓고 덤벼드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악순은 질리게 겪어봐서 잘 알았다.
죽이고 죽이다 보면, 이렇게 복수에 미친 인간이 꼭 나온다.
“전장에서 복수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모르고 말여.”
큭큭!
하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또 살아남았다.
그에 만족한 악순은 기식이 흉험한 침입자의 가슴 위로 올라탔다.
“어디 쌍판 좀 볼…… 오, 오오?”
반반하다.
반반해.
“아직 숨은 붙어 있으니 뭐, 흐흐. 철재. 조금 기다리라…….”
스으윽.
악순은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인기척 때문이었다. 움찔하는 순간 칼날이 턱 아래로 스르륵, 뱀처럼 기어들어 왔다. 그런데 그것도 못 느꼈다. 악순의 두 눈동자에 이게 뭔…… 하는 감정이 드는 순간.
서걱.
화끈한 격통이 뇌리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