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13화
413화. 마지막, 재(4)
촬영은 순조로웠다.
미치게 춥고, 해보다 눈보라를 맞는 일이 훨씬 많지만 그래도 일정은 나름 순조롭게 흘러갔다. 촬영 전에 진짜 하나에서 열까지, 혹시라도 필요할 수 있을 모든 것을 준비해 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필요한 게 생기면 후원사 포드에서 전용기를 띄워서라도 가져다줬기 때문에 촬영에 딜레이 걸리진 않았다.
한국에서도 이런저런 문제로 딜레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오히려 오지 중의 오지인 미국 알래스카 촬영이 좀 더 원활히 흘러간다는 사실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는 전에 없이 좋았다.
특히 홍진아 감독의 기분이 제일 좋았다.
나의 무사님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드라마의 마지막 항해의 함장인 그녀는 시즌3를 준비하며 최소 몇 년은 늙은 것 같단 소리를 주변에서 들었다. 그만큼 그녀는 작품 준비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지금 그 준비가 빛을 발하니 절로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오전 촬영을 끝내고 잠시 쉬는 시간. 밥심으로 일하는 그녀이기에 당연히 점심은 한식이었다. 이 한식은 그녀가 가장 공들여 준비한 것 중 하나였다.
며칠도 아니고, 일이 주도 아니고, 감독인 그녀는 최소 두 달은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양식보단 한식파인 그녀는 절대로 미국식으로 두 달 가까이 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아예 한식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미리 항공편으로 보냈다. 고기 종류야 현지 조달할 수 있지만, 향신료, 특히 고춧가루와 고추장 같은 한국식 장 종류와 향신료 등은 한국 것이 아니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정말 가끔이 아니면 포드에서 후원한 식당은 거의 가지 않았다.
식당 안에 들어가자 정은정 작가가 저쪽 한구석에서 식사 중인 게 보였다. 식판에 오후 내내 사용할 에너지를 가득 담아 정은정 작가의 앞에 앉는 홍진아.
“왜 혼자 먹어요?”
“내가 혼자 먹고 싶나요?”
“음, 그건 아니죠.”
작가다.
작중 배우의 생사여탈권을 쥔.
영화와는 다르게 한국 드라마 판에서 작가는 절대 갑이었다. 방송사와 제작사도 감히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위상을 지는 게 작가였다. 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드라마 스타들도 감히 작가 앞에서 거드름 피우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깍듯이 대하지만, 반대로 기피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게 실수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주 쉽다. 상대를 안 하면 된다. 괜히 친해지겠다고 앞에서 주절주절 이빨을 터는 것보다, 그냥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최고였다.
물론 주연과 비중 높은 조연은 그게 힘들지만, 적어도 그 아래 배우들은 당연히 적당히 거리를 뒀다. 가끔, 그 틀을 깨고 어떻게든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배우가 있긴 하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아주 극소수다.
“오전 촬영은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아니, 완벽했어요.”
“아, 다행이다.”
정은정 작가는 전형적인 올빼미 스타일이었다.
밤에 글을 쓰고, 보통 해가 뜨는 6시쯤 잠들어 오전 내내 뻗어 있는. 그리고 오후나 야간엔 홍진아 감독과 잠시 같이 움직이고 새벽에 또 글을 쓰는. 어제 강지영이 왔을 때는 이례적으로 깨어있을 때다.
아마도, 새벽에 글을 쓰지 않아서.
홍진아는 시원한 콩나물국을 한술 떠먹고는 국그릇에 밥을 말며 물었다.
“차기작은 어때요?”
“그냥 지지부진해요. 음, 제대로 소스가 안 떠오르는 느낌?”
“그럼 이번에 쓰는 건 폐기겠네요?”
“아마도요.”
천재라지만, 그렇다고 작품을 뭔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이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하나의 작품의 탄생에는 정말 인고의 세월이 걸린다. 구상하고, 고심하고, 조사하고, 뼈대를 세우고, 살을 이어 붙여보고,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고, 재미가 없으면 다시 폐기하고.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이런 작업을 거치는데 이게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었다. 짧게는 몇 달, 길면 최소 1년은 우습게 잡아먹는다.
가끔, 정말 가끔 그 간격을 무시하는 천재가 나타나긴 한다.
그리고 그 천재 중 한 명이 눈앞에 정은정 작가다. 하지만 정은정 작가는 전형적인 예술인이다.
뭔가 느낌이 빡! 필이 딱! 꽂히는 순간부터 포텐이 어마어마하게 터지는.
나의 무사님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녀는 소설부터 쓰는 편이고, 나의 무사님 시즌1 소설의 절반이 정확히 일주일 만에 완성됐다.
‘그게 이연 배우와 지영 배우의 연기 합을 보고 나서였다고 했지.’
정확히는 강지영에게.
강지영 배우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정은정 작가의 예술성을 자극했고, 결국 폭발했다. 시즌2, 시즌3 또한 그렇게 나왔다. 소설로 쓰고, 현장에서 즉시 수정하고. 그게 정은정 작가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지지부진하단다.
이는 꽂힌 게 없다는 뜻. 그러니 그 작품은 곧 폐기될 것이다. 솔직히 보여달라고 하고 싶었다.
‘전에 폐기물이라고 슬쩍 봤던 것도 최소 중박이긴 했는데…….’
그래서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미완의 작품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극히 꺼린다. 방송국에 있는 자신이야 본방에 풀기 전에 국장이나 부장급과 내부 시사회 같은 걸 하니까 익숙하지만, 정은정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니 보고 싶은 마음은 휘휘 저어 한술 크게 떠 입에 넣는 밥에 같이 담아 삼켜버렸다.
“어, 임은진 씨네?”
“음?”
정은정 작가의 말에 고개를 돌렸더니 완전 무장 한 임은진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홍진아 감독은 수저를 내려놓고 얼른 일어났다.
“아니에요, 앉아 계세요.”
임은진의 말에 홍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똑바로 섰다. 나이도 임은진이 위긴 하지만, 임은진은 이 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요즘 완전 수직 상승 중인 비즈 엔터의 팀장급이고, 거기에 더해 강지영 전담팀의 대장이다.
강지영에 관한 모든 것이 그녀를 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죽하면 회사 대표인 장세리보다 임은진의 입김에 더 세다고 할까. 만약 임은진이 나의 무사님 시즌3 때 지영의 몸값을 제대로 받으려고 했으면, 시즌3는 시작도 전에 좌초했을 것이다. 왜? 몸값이 너무 세서 감당이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몸값 협상을 진행한 그녀는 아주 합리적인 금액으로 계약서를 체결했다. 물론 그래도 한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몸값이긴 했다. 욘사마가 예전에 나의 무사님과 비슷한 사극을 찍었을 때 회당 2억 5천인가를 받았다. 그럼 지영은? 그 두 배가 넘었다. 그것도 훌쩍. 그래도 합리적이었다. 지금 강지영 배우의 몸값 추산은 최소 700억대니까. 어쨌든 그런 배우를 전담 관리하는 게 임은진이다.
앉아서 맞이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요. 에고고, 어쩐 일이세요? 지영 배우 혹시 무슨 문제 생긴 건 아니죠?”
“그, 문제라면 문제가 있긴 해요.”
“힉!”
문제라는 소리에 홍진아는 화들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영에게 문제? 대체 불가의 배우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건, 잘 굴러가던 바퀴에 쇠꼬챙이가 꽂힌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아! 건강 관련한 문제는 아니에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아아, 휴우…….”
털썩.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는 홍진아게 미안한 표정을 지은 임은진이 얼른 본론을 꺼냈다.
“그, 지영이 촬영 스케줄을 이틀 정도만 더 줄 수 있을까요?”
“이틀이요? 그건 문제가 안 되죠. 순서 조금만 틀면 되니까.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래요? 지영 배우가 괜히 시간을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불타올랐거든요.”
“네?”
“어제 심수정 배우랑 이연 배우 연기 보고 불타오르기 시작했어요. 두 사람의 연기와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제대로 자극받았어요.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겠는지 시간을 좀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아아…… 그런 거라면 일주일도 줄 수도 있어요. 우리 스케줄 넉넉하니까. 그렇게 드릴까요?”
홍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반가운 표정으로 오히려 시간을 더 주냐고 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얘기한 이유는 간단했다. 극 중 가장 비중이 높은 배우가 불타오른단다. 다른 배우의 연기를 보고서. 이는 작품에 아주 긍정적인, 반가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임은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틀이면 충분하대요. 그 이상은 스케줄에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 그럼 이틀로 할게요. 혹시 시간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그 정도 편의는 당연히 봐줄 수 있으니까.”
“배려 감사합니다. 감독님.”
꾸벅, 임은진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홍진아는 손을 휘휘 저었다.
“감사는요. 배우가 작품에 집중하겠다는데. 당연히 들어 드려야죠.”
“그래도요. 대신, 우리 지영이가 절대 감독님이랑 작가님 실망감 안겨주진 않을 거예요.”
“후후, 저희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영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두 번 나오기 힘든 인물인. 홍진아는 강지영의 노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액션 신을 찍을 때, 그는 종일 연습에 또 연습했다. 이유는 작품을 위한 것도 있지만, 배우의 안전을 끔찍이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작품에도 그렇게 노력하고, 선수로 직업 전환을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천재여도, 노력 없이는 세계 정상에 서는 건 불가능하다. 천재는 세상에 딱 한 명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운동은 아니지만, 드라마와 연기라는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천재가 났다가 사라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재능에 노력.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그야말로 괴물이 나온다.
강지영은 전형적인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가 시간을 달라고 했다. 홍진아는 이틀이란 시간만큼, 어제와 다른 강지영이 되어서 와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은 맞았다.
이틀 뒤, 강지영은 익숙한 사람이 되어 왔다.
무사, 재였다.
* * *
고오오…….
삭풍, 칼바람. 북녘에서 몰려온 바람에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낡아 빠진 초소 안.
“어흐! 추워 돌아버리겠네, 시벌…….”
“쉿. 소리 흘러간다.”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가도 뒤로 가지 앞으로 가겄어?”
“저 삭풍 뚫고 뒤로 나간 오랑캐들 있으면?”
“…….”
3인 1조.
보통 돌아가며 초소에 주둔하는 기본 병력이다. 이 이상 늘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은 최전선이다. 하루에 십수 번 교전이 벌어지기도 하며, 며칠 조용하기도 한 곳이다. 절대 종잡을 수 없는 곳. 그게 최전방 초소다. 이런 곳에 병력을 적게 짜는 건, 많이 주둔하면 할수록 죽는 병사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소한으로 운용하는 곳이었다.
전선이 고착된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됐다. 아마도 반란군의 수괴 중 하나를 잡았던 해가 시작이 아닌가 싶었다.
“씁, 소변 보고 올 테니까 앞에 잘 지켜보고 있어.”
“그랴.”
한 병사가 자리를 이탈했다.
아니, 병사라고 하기에는 좀 그랬다. 제국에서 공들여 키운 전략부대원이었으니까.
고오오……!
“아으! 얼른 문 닫어!”
초소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칼바람이 미친 듯이 들어왔다. 그에 버럭 소리를 지른 순간, 쿵! 하면서 문이 닫혔다. 옷을 아무리 두껍게 입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추위다. 이를 악문 악순은 몸을 부르르 떨고는 얼른 웅크렸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났다.
추위에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찰나.
악순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왕평 이 새끼, 너무 늦지 않어?”
“큰 거 싸나 보지.”
“그래도, 흠, 보통 이렇게 오래 걸리나? 한번 푸드득 밀어내고 바로 들어오는 게 맞잖어.”
“그건…… 음.”
깨달았다.
이곳은 전장.
교전이 안 벌어지기도 하지만, 지겹도록 벌어지기도 하는 곳.
나갔던 동료가 안 들어온다?
일각이 넘도록?
그 사실이 뜻하는 것은 하나다.
스르릉.
긴장을 조이며 검을 뽑는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며 새까만 인형이 바닥에 깔려 설원의 귀신처럼 짓이겨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