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11화
411화. 마지막, 재(2)
다음 날 아침을 먹은 지영은 나갈 채비를 단단히 했다. 오늘은 현장에 나가서 하루 간 분위기를 익힐 생각이었다.
정식 촬영은 내일이나 모레부터이고, 오전 중으로 상황 봐서 언제 첫 신에 들어갈지 정해진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일 안 찍더라도, 지영은 현장을 방문하고 싶었다. 어제 주조연들은 어제 전부 들어오지 않았다. 현장 상황에 따라 신이 끝나면 호텔로 돌아오기도 하는데, 주조연들은 대부분 그쪽에 상주 중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떤 신이든 주연이나 비중 많은 조연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쪽 숙소에서 거의 상주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계속 거기 있으면 체력적으로 부담되니 돌아가면서 이틀씩 쉬러 호텔로 돌아오는 로케이션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어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인사도 할 겸 오늘은 가야겠단 생각이 든 지영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대본을 챙긴 지영은 로비로 내려갔다. 임은진과 임수진. 오늘 가는 사람은 이렇게 둘에 지영의 경호를 위해 붙은 가드들이었다. 현장까지는 이곳에서 한 시간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하얀 설원에 이질적으로 홀로 검은색인 도로를 달려 현장에 도착한 지영은 첫 번째로, 수많은 버스에 놀랐다.
사진이 자주 올라와서 보긴 했는데, 수십 대의 버스가 원을 그리며 줄지어 서 있었는데, 저 버스의 용도는 숙소이면서, 휴게실이자 오락 시설이었다. 대략 50대 가까이 되는 버스는 모든 좌석을 뜯어내고, 그 안에 각자 용도에 맞춰 새롭게 꾸렸다.
스태프와 배우들의 심적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한 오락 시설로는 당구장, 노래방 등이 있었다. 좌석을 뜯어낸 다음 당구대를 설치한 것이다. 그래서 버스는 확실히 넓었다. 2층 버스처럼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버스여서 가능했다.
그런 편의시설과 숙소 겸, 그리고 가볍게 수다를 떨기 좋게끔 세팅한 버스들이다.
그리고 저 버스의 후원은, 포드사였다.
포드는 나의 무사님 시즌3의 공식 후원사였다.
포드는 회사 특성상 애초에 나의 무사님 협찬이 들어갈 제품이 없었다. 총포가 나오기 전의 시대극이다. 그러니 한국으로 따지면 고려 초중기다. 최초의 총기라 불리는 핸드캐논이 15세기쯤이니 그 이전이 배경이었다.
그런 시대극에 포드는 넣을 제품이 없었다.
왜? 자동차 전문 회사이기 때문이었다. 버스, 트랙터, SUV, 세단 등등, 전무 차량이다. 그래서 처음 포드가 후원을 맡겠다고 했을 때, 다들 좀 의아했다. 후원은 협찬을 동반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포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1 후원사가 됐다. 그리고 저런 엄청난 후원을 해줬다. 작품 외적인, 그러니까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과정은 관여하지 않아도 그 외적인 것은 전부 도맡아 하겠다면서, 저런 엄청난 준비를 해줬다. 그리고 아직 현장 사진이 풀리진 않았지만, 나의 무사님이 방영된 뒤에 이런 후원을 준비했다는 것만 공식적으로 밝혀도, 포드 사는 확실한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절대 공짜가 없는 세계고, 이는 당연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준비해 준 나탈리 포드에게 지영은 매우 감사했다.
“와…… 진짜 제대로네.”
당구장, 노래방, 심지어 스파도 있었다. 자본주의 세계의 최고봉인 미국에서도,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아가기 시작한 포드는 정말로 대대적인 후원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한창 바쁜 상황인지 버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현장으로 가볼래?”
“네.”
촬영 현장은 앵커리지 북부의 광활한 평야와 산이었다.
정확히는 산과 평야의 경계 지대에 돈을 들여 세트장을 잔뜩 지었다. 혹한의 삭풍이 몰아치는 이곳에 이런 세트장 설치가 가능한 이유는, 현대극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현대시설이 필요 없었다. 대신 목조시설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여긴 최전방 초소전을 찍는 곳이다.
그러니 허름한 초소를 곳곳에 20개 정도만 설치하면 충분했다. 이렇게 촬영장을 세팅한 것도 고생이지만, 여기서 촬영하는 중인 배우들도 고생이었다. 스태프의 안내를 받으며 촬영장에 가까워질수록 지영은 미안한 마음이 조금씩 커졌다.
“와, 이런 곳에서 촬영을…….”
“너무 늦은 게 미안하네요.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어도…….”
“다들 이해해 줄 거야. 걱정하지 마.”
임은진의 말에 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주연이다.
극을 이끌어 가는 주연.
게다가 나의 무사님에서 주인공 ‘재’의 비중은 모든 배우 중에 가장 컸다. 보통 드라마는 주연과 조연의 비중을 생각하면 6대4에서 7대3이다. 당연히 높은 수치가 주연배우의 비중이었다. 나의 무사님은 배우가 많이 나와서 6대4 정도다. 그리고 주연 중에 비율을 다시 따지면? 4321이다.
높은 순서대로 지영, 이연, 심수정, 강서훈 순이다.
악역인 강서훈의 비중이 제일 낮지만, 비주얼적인 면을 강하게 강조해줬고, 재와 함께 움직이는 연과 선고의 순이었다.
그렇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영은 배우들이 여기서 한 달 가까이 고생 중인데, 이제야 왔다. 이게 지영이 의도한 건 아니었다. 원래 지영은 바로 합류하기로 이미 얘기가 끝나 있었다.
그런데 올림픽에서 당한 부상으로 인해 치료 문제로 한 달 가까이 늦게 합류했다.
이런 분명한 사정이 있다지만, 그래도 지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현장에 가까워지자, 분주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걸어온 공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작품을 만드는 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분명히 있었다.
열정.
혹은.
광기라 부르는 무언가. 예술에 인생을 건 이들이 내뿜는 에너지가 확실히 느껴졌다.
“어, 지영아!”
그 에너지의 중심에 있던 이연이 지영을 알아보고 단숨에 달려왔다. 방한복을 잔뜩 껴입은 이연. 촬영할 때는 세상 얇은 옷으로 갈아입지만, 대기할 때는 완전 중무장이었다. 이연의 목소리에 대기 중이던 배우들이 반응했다.
“어? 지영이가 왔어?”
“이여, 금메달리스트!”
“소녀를 구한 영웅! 하하!”
배우들이 전부 반가운 표정으로 지영에게 다가왔다. 이연 먼저 가볍게 안아준 지영은 다른 배우들과도 가볍게 포옹했다. 이런 포옹은 낯간지러워서 어머니나 양유진 아니면 잘 안 하는 편이지만,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데 안 해줄 수가 없었다.
“이야, 오랜만에 본다. 근데 왜 맨날 보는 것처럼 익숙하지? 하하!”
“그야 움직이기만 하면 화제가 되니까 그렇죠! 지영이 몸은 어때? 어디 아픈 덴 없고?”
네,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저 멀리서 인파를 헤치며 나의 무사님이란 거대한 함대의 제독, 홍진아와 정은정이 다가왔다. 정은정은 현장까지 같이 왔다. 정은정 작가는 대본을 쓰면서 당연히 배우를 내정해 놓고 쓴다. 그래서 배우의 연기를 보며 자신이 생각한 바가 맞는지 아닌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홍진아도 대본을 완벽히 숙지했기에 깊이가 남다르지만, 창작자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은정은 직접 이곳까지 넘어와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느낌을 짚어줬다. 이는 촬영에 당연히 아주 긍정적인 효과였다.
평범한 경우라면 배우는 부담스럽겠지만, 작품이 워낙에 대박 작품이라 그런 생각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왔어요?”
“네, 안녕하세요. 감독님. 작가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후후, 죄송은요? 다 사정이 있었는데요. 그리고 건강하게 왔으니 됐어요.”
“이해 감사합니다.”
“이해는 무슨. 당연한 것을요. 자, 우리 강지영 배우가 드디어 왔네요! 무사히! 박수!”
와아!
갑작스러운 홍진아 감독의 말에 다들 우와! 하면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에 민망해진 지영은 꾸벅꾸벅 인사했다. 한차례 환영 박수가 오고 나자 현장은 거짓말처럼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수정 누나가 안 보이네요?”
강서훈과도 인사를 나눴는데, 심수정이 보이지 않았다.
“수정이는 지금 신 준비 중.”
“아…….”
“수정이 보면 너 완전 놀랄걸?”
“네? 왜요?”
“보면 알아.”
“……네.”
왜 놀란다고 했을까?
톡방에서도 항상 가장 말도 많고, 밝기만 했는데.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지영은 오래 걸리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저거 가발 아니죠?”
“아니, 찐 머리.”
“…….”
말문이 턱 막혔다.
심수정은 머리를 잘랐다.
단발이나 이렇게 자른 게 아니라, 무슨 쥐 파먹은 것처럼 잘랐다. 더벅머리? 그냥 대충 막 자른 머리였다. 그걸 보면서 지영은 아, 소설의 한 문장을 떠올렸다.
-연인을 잃은 선고의 분노는 그 어떤 때보다 강렬했다. 그녀는 스스로 긴 머리를 잘랐고, 그 머리를 불살라 제를 올렸다. 부족의 신에게, 연인의 원수를 다짐하는 재였다. 이를 완수하지 못할 경우 스스로 구천지옥에 떨어지리라 다짐하는 재이기도 했다.
이런 문장이 있었다.
연인 재의 죽음.
절벽에서 떨어졌으니 죽었으리라 생각한 선고는 머리를 잘라 불사르며 부족의 신에게 그렇게 맹세한 뒤, 스스로 최전방으로 향한다.
나의 무사님 시즌3 소설 1부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머리를 자른다는 소설 속 내용은 봤는데…… 그것 때문에 저렇게 자른 거예요?”
“응. 대단하지?”
“……네.”
대단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저게 가발이 아니라면, 저런 머리를 한 것 자체가 진짜 웬만한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작품을 위해 삭발하는 여배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저렇게 진짜 쥐 파먹은 것처럼, 스타일링 자체를 포기한 머리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배우에게 미(美)는 경쟁력이자 무기였다.
그중에 헤어스타일은 당연히 강력한 무기였다.
남자에게도 패션의 완성은 머리란 말이 있을 정도인데, 여자는 오죽하겠나. 그런데 저렇게 자른 거다. 비대칭 정도가 아니라 어느 쪽은 거의 삭발처럼 짧고, 어느 쪽은 또 숏컷 정도 길고. 저건 진짜 가위로 막 되는 대로 자른 거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진짜 그렇게 그녀는 머리를 잘랐다.
“우리가 모두 보는 앞에서, 가발도 아니고 진짜로 칼로 저렇게 자르더라. 되는대로 막 쥐어서. 우리 그거 보고 전부 기함했잖아. 소리라도 질렀으면 신 다 날아갈 뻔했어.”
“와…….”
예고하지 않고, 그냥 즉석에서 저렇게 잘랐다는 말이었다.
그에 정은정 작가가 신이 끝나자 냅다 달려가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까지 했단다. 정은정 작가도 천재의 영역에 살지만, 여성이고, 여성으로서 헤어스타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배우가 자신이 쓴 소설 속 지문을 보고, 저렇게 잘랐다.
지금 이연의 뒤를 바짝 쫓아가는 라이징스타가 말이다. 저 머리를 수습하기 전까지는 다른 작품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그걸 각오하고, 심수정은 머리카락을 저렇게 날렸다.
각오가 진짜 남다르다는 뜻.
머리를 저렇게 해놔서 그런지, 감정을 잡는 모습도 범상치 않았다. 심수정의 연기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연기력보단, 실제 양궁선수 출신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정은정 작가는 특정 신에서 정말 신들린 사격 솜씨가 필요했고, 그래서 진짜 활을 잘 다루는 배우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심수정이 눈에 들어왔고, 연기력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되어 캐스팅했다.
엘리트 체육을 한 만큼 양궁 실력은 당연히 나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양궁 실력이야 뭐 전 세계에서도 알아준다. 그녀는 10발을 쏘면 8점 밖으로 벗어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발만 8점이다. 나머지는 9, 10점을 쏜다. 그런데 그런 실력으로는 국대 승선은 아예 불가능했다. 그래서 배우로 전향했다.
그런데 심수정은 단순히 양궁 실력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몸 쓰는 재능이 아주 제법이었다. 백덤블링 뒤 사격 같은 신도 가볍게 소화할 정도였다. 감정 신보다는 액션 신이 주였던 심수정은, 나의 무사님 시즌3에서는 완전히 변했다. 그리고 그 변한 모습을 막 마주할 순간이 왔다.
레디, 액션.
심수정이 감정을 전부 잡고 눈을 떴다. 지영은 그 눈빛을 보고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독기가 진짜…….’
줄줄 흘렀다.
눈앞에 원수가 있으면 있던 천참만륙을 내고도 남았을 정도로 보였다. 그렇게 독기가 줄줄 흐르는 눈빛이 되자, 액션 사인이 떨어졌다.
먹이를 노리는 매가 되어, 아니. 죽음을 선사하는 설원의 사신이 되어 눈밭에 엎드린 심수정. 그런 그녀에게 상당히 떨어진 곳에 인간 형상의 표적이 있었다. 지영은 보자마자 내용을 이해했다.
설원의 사신이 된 심수정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작전을 나갔다.
새하얀 눈밭에 숨어, 작전을 나오는 적을 노리는 신이다. 실제 표적은 편집으로 따로 이어붙일 거고, 지금은 서 있는 표적에 화살을 꽂는 신이다. 촉이 뭉툭하면 제대로 사격이 힘들고, 그렇다고 진짜 날카롭게 하면 절대 인간에게 쏴선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제대로 쏠 수 있나?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짧게 잘라 정돈할 수도 없는 심수정의 머리카락이 강풍기가 아니라 실제 자연의 바람으로 인해 저렇게 미친 듯이 흩날리는 중이다. 그런데 지금 사격을 가한다? 사실 사격도 편집으로 붙일 수 있었다. 쏘는 순간 끊고, 적중하는 장면으로 곧장 이어붙이면 된다. 그러니 배우는 쏘는 시늉만 해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감독도, 작가도 그건 싫은 것 같았다.
어떻게 편집점을 잡을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제대로 과녁에 화살이 박히는 원테이크 장면이 필요한 것 같았다.
사삭, 사삭.
표적을 잡은 것처럼 엎드려 있던 심수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선으로 기어간 심수정이 천천히 몸을 세우더니, 무릎을 꿇고 활에 살을 먹였다.
퉁.
쇄애애액!
거침없이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 화살이 바람에 휘어, 터엉! 정확히 목표에 박혔다.
‘미친…….’
못해도 수십 미터였는데, 저걸 맞혔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자신이 회복에 전념하는 동안.
심수정은 진짜 선고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영의 이런 놀람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