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10화
410화. 마지막, 재(1)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한 지영은 게이트를 나가자마자 우와-! 하고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짐을 끌다가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강- 지영!
강- 지영!
강- 지영!
많은 팬이 모였다.
얼추 봐도 천 명 정도는 모인 것 같았다. 지영의 팬덤 규모를 생각하면 먼지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 오지의 공항까지 이 정도의 인원이 모였다는 게 지영은 놀라웠다. 놀라는 지영의 얼굴을 겨냥하고 촤라라락! 카메라 불빛이 마구 터졌다.
그리고 카메라가 터지기 시작하자 공항 가드가 지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미스터 지영?”
“네? 네.”
“반갑습니다. 앵커리지 에어포트 가드 빌리입니다.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강지영입니다.”
체구가 장대한 백인이었다.
선글라스를 껴서 위압감이 장난 아니기도 했다. 직책과 체구 때문인지 친구 중에 가장 큰 황석도 애로 보일 정도로 대단했다. 지영이 손을 뻗어 악수를 받자, 빌리가 가볍게 맞잡은 손을 흔든 뒤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 정도 규모로 인원이 모이면 게이트를 나서기 전에 먼저 말해줘야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저분들이 얌전히 통제에 따를 테니까 자신들이 온 걸 비밀로 해달라고 하더군요.”
“아 그랬어요?”
“하하, 깜짝 환영이라도 준비한 모양입니다.”
“아아.”
“저쪽에 잠시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괜찮으면 그쪽으로 잠시 이동했다가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그럴게요.”
지영은 그 말을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잠시 대화를 나누며 팬들을 살펴본 결과 복장이 천차만별이었다. 이곳 알래스카에서 온 이들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미국 전역에서 모인 것 같았다. 그런 팬들에게 인사도 없이 그냥 현장으로 떠나는 건, 연예인으로서 직무 유기였다.
빌리의 안내를 받아 공항 한쪽으로 이동했다. 팬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통제에 잘 따르겠다고 한 말이 진짜인지 얌전히 잘 따라왔다. 그렇게 이동해 지영은 팬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인터뷰를 했다.
가벼운 토크였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건지, 드라마에 관한 내용, 차기작에 관한 내용, 미국에서 영화를 찍을 생각은 없는지 등등을 말하다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현지 방송사에서 촬영을 나오긴 했는데, 지영은 그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데 지역 언론사가 있다고 자리를 파투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1시간쯤 팬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지영은 인사를 하고 공항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성숙한 팬 문화를 보여준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지영은 준비된 차량에 올라 한숨을 내쉬었다.
“와, 역시 지영이. 어딜 가도 팬을 몰고 다니는구나?”
차가 출발하자 임수진이 들뜬 얼굴로 한 말에 지영은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이번엔 저도 놀랐어요. 근데 보통 저렇게 인원 모이면 SNS에 올라올 법도 한데, 아무런 낌새도 없었어요?”
“응, 체크했는데 없었대. 아마 팬들이 따로 이벤트 해주려고 입단속 한 거 같은데?”
“와, 하하.”
감동이면서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팬의 심리를 모르는 지영으로서는 이건 더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지영이 탄 버스가 달리고 달려 알래스카 외곽으로 향했다.
차량이 외곽으로 나오자, 여기가 정말 알래스카구나 하는 느낌이 났다. 공항 밖도 당연히 이미 눈이 가득 내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외곽으로 나오자, 그냥 설원이었다. 온 세상이 하얗다. 보통 알래스카의 9월이나 10월은 이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기상이변으로 올 초에 유례없이 많은 눈이 내렸다. 그러고도 기온이 상승하지 않아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대자연에 싸여 있었다.
본래는 이 시기라도 눈이 잔뜩 내린 곳으로 가려면 북서쪽으로 더 가야 하지만 다행히 이런 기상 조건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촬영장을 조성할 수 있었다.
앵커리지 공항을 나와 북으로 쭉쭉 3시간쯤 달리고 나서야 차가 멈췄다.
차가 멈춘 곳은 주변에 한 호텔 앞이었다.
나의 무사님 팀이 통째로 예약한 호텔로, 스태프와 연기자까지 합쳐 수백 명이 묶고 있는 호텔이었다.
버스가 멈춰 서자, 다들 분주하게 짐을 챙겼다. 일단 가장 먼저 옷부터 여몄다. 이미 이쪽으로 오는 동안 날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혹한의 추위가 버스 밖에 도사리고 있을 테니 단단히 무장하는 걸 잊지 않았다.
지영도 옷을 단단히 여몄다.
그렇게 지영의 팀 전체가 준비를 끝내니 기사가 버스 문을 열었다.
휘이이잉!
고오오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칼바람이 내는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와…… 나가기 싫은데?”
“그러게요. 으으…….”
방한복으로 무장을 했는데도 기가 팍 꺾이는 소리다. 그러자 버스 기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무브! 무브! 어서 내리라고 재촉했다. 하아, 지영은 일단 먼저 내렸다. 내리는 순간 몰아치는 바람에 잠시 휘청인 지영은 저도 모르게 이야…… 하고 탄성을 흘렸다.
장난 아니었다.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영이 내리자 그 뒤로 임은진과 임수진이 나란히 내렸다. 이름 첫 글자만 다른 두 사람이 따라 내리자 지영의 팀이 우르르 내렸다.
치이익!
팀이 내리자 버스 짐칸이 열렸다.
지영은 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가득 챙겨 온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영이 나서자 다른 스태프들이 같이 움직였다.
한 사람당 서너 번씩 왕복하고 나자 호텔 로비에 짐을 전부 쌓아 놓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양. 한 달은 체류해야 하기에 이 정도는 근데 당연했다.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연락을 받았는지 대기하고 있던 제작팀 조연출 장석민이 내려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배정받은 방으로 이동했다. 짐은 창고로 쓰기로 한 방에 호텔 직원이 전부 날라준다고 해서 올라갈 땐 개인 짐만 챙겼다.
지영은 이연이나 심수정, 강서훈처럼 스위트룸을 배정받았다. 물론 지영 혼자 쓰는 건 아니었다. 방만 네 개에, 방마다 화장실이 전부 있어서 임은진과 임수진과 같이 방을 쓰기로 되어 있었다.
“와…… 내가 호텔 스위트룸에 입성해 보다니, 아무래도 비즈로 옮기길 정말 잘한 것 같다니까?”
가장 전망 좋은 곳.
물론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쳐 어둡기만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욕망이 실현되는 곳인 만큼 스위트룸은 상당히 넓고 깔끔했다. 고급 오피스텔과 흡사할 정도로 깔끔한 인테리어가 너무 화려하지 않아 지영의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지영은 일단 방부터 골랐다.
그리 크지 않은, 충주 집의 방과 비교하면 서너 배는 큰 방을 먼저 정했다.
“제가 이쪽 방 쓸게요.”
“그럴래? 수진 씨는요?”
“저는 저쪽 입구 쓸게요.”
“어? 더 큰 방 써도 돼요. 저는 지영이랑 가까운 곳이 좋아서.”
“앗, 그래도 돼요?”
“네, 그럼요.”
그렇게 방이 정해졌고, 안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갑갑했다. 호텔은 훈훈해서 방한복이 답답하고 너무 더웠다. 어차피 오늘은 현장에 가지 않으니, 일단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어도 됐다. 옷을 갈아입은 지영은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장시간 비행, 버스에 오래 앉아 있어서 몸이 매우 뻑뻑했다.
스트레칭은 이렇게 굳은 몸을 풀어주는 데는 즉효이기 때문에 공들이는 게 좋았다.
20분에 걸쳐 스트레칭을 하고 나오자, 거실에서 임은진과 임수진이 의상과 메이크업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 스트레칭 끝났어?”
“네. 일정 확인하세요?”
“응. 여기 앉아봐. 너도 알고는 있어야 하니까.”
“네.”
지영이 앞에 앉자 임은진은 스케줄표와 의상, 메이크업이 순서대로 적혀 있는 걸 지영에게 건넸다. 사실 지금까지는 지영은 의상과 메이크업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스케줄은 머릿속에 담고 있었지만, 두 가지는 해주는 대로 얌전히 따른 편이었다. 하지만 임은진은 지영이 이런 작은 것도 머릿속에 넣어 놓기를 바랐다.
관심을 가져야 뭐가 자신과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고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네킹도 나쁜 건 아니다.
그건 곧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을 관리해 주는 이들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거니까. 하지만 작품을 생각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캐릭터의 이미지와 실제 변신을 머릿속에 담아둘 필요가 있었다.
“일단 첫 신은 이거야. 안에 방한 내복을 입어도 추울 것 같은데, 괜찮겠어?”
“음…….”
동물 가죽으로 만든 의상이다.
새하얀 털이 인상적인. 거기에 비슷하게 가죽으로 만든 하얀 마스크 비슷한 걸 쓴다. 재의 등장 신이다.
초반에 가장 임팩트를 줘야 하는 신이다.
그렇기에 의상에 아주 공을 들여야 했다. 그러니 백문의 불여일견이라, 이건 그냥 직접 입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피팅은 언제 해요?”
“이따가 저녁에. 신 촬영이 늦어도 내일모레니까 오늘 확인해 봐야지. 말 나온 김에 지금 해볼래?”
“아니요. 저녁에 해요. 다들 좀 쉬긴 쉬어야 하잖아요.”
“하긴, 그게 낫겠다.”
체력이 이렇게 좋은 지영도 힘든 장거리 이동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아마 지금 짐을 풀기도 전에 늘어져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저녁 먹고, 체력 좀 올라오면 확인하는 게 나았다.
신과 의상을 꼼꼼히 확인하다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6시였다.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자 한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고, 일정이 없어 먼저 숙소로 온 스태프와 배우들이 식사하고 있었다.
“여, 지영이 왔나?”
“선생님, 안녕하세요.”
시즌 3에 짧게 합류한 대배우 선동일이었다. 연기를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라 칭하는 사람. 그래서 그는 자신을 연기자가 아니라 기술자라 불러 달라고 하는 배우였다.
예술가가 아니라 기술자.
그런데 사실 그의 기술은 이미 아트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어떤 캐릭터를 던져줘도, 가진바 기술로 철저하게 해부, 해체해서 자신에게 재조립하는 데 정평이 난 배우였다. 대단하단 말로도 부족한 기술자.
“오냐오냐, 와 앉아라.”
“네. 음식 좀 담아 올게요. 누나, 저 선동일 선생님이랑 저녁 먹을게요.”
“그래.”
지영은 접시를 들었는데, 트레이너가 다가와 먼저 접시를 내밀었다.
“오늘 저녁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정량.
샐러드와 닭가슴살, 견과와 과일.
푸짐하게 한식이 차려졌는데, 트레이너는 그 한식은 조금도 담아주지 않았다. 천하의 지영이라도 순간적으로 욱할 수밖에 없는 식단이었다. 하지만 그걸 티를 낼 만큼 정신력이 약하진 않았다.
식단을 받아 선동일의 앞에 앉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봐야. 우린 주인공 못해서 다행 아니냐?”
“아이고, 행님. 우리 놀리는교? 행님은 주인공 자주 맡는다 아입니까. 우린 매 조연인데.”
“니들도 시간 지나면 다 자리 찾게 되어 있어. 그보다 지영아. 준비는 열심히 했나?”
선동일의 질문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했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선동일의 등장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재의 등장 이후, 시간대가 과거로 움직이며 재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로 이동한다. 재가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필요해서였다. 재는 절벽에서 떨어졌고 시즌 2가 끝났다. 하지만 당연히 누구도 재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죽지 않았고.
그럼 재는 어떻게 살았을까?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고, 그 아래는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가슴에 깊은 검상을 입은 재가 급류를 헤치고 나왔을까? 그런 설정일 수도 있었다. 생존본능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게 재니까. 하지만 극 중 재의 생존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움을 준 이가 있었다.
천운으로 급류에 휩쓸리고도 바위에 부딪히지 않고 흘러 내려와 강줄기 어딘가에 걸렸을 때, 그때 재를 건지는 이가 있었다.
그게 바로 선동일 배우가 맡은 학소양의 딸, 학미다.
두 배우 전부 이번 시즌3에 새롭게 합류한 배우들이었다. 학소양은 말했듯이 선동일 배우가 맡았고, 학미는 올해 막 데뷔한 걸그룹 핫핑크의 막내 예정이 맡았다. 예정과는 아직 대면 전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어! 딸랑구! 어여 와!”
“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돌렸더니 고개를 숙이기 바쁜 한 여성이 보였다. 그런데 신장이 정말 작았다. 잘 봐줘야 150 초중반? 딱 그 정도였다. 식당 안 선배들에게 인사를 한 예정이 졸졸 자리로 달려왔다.
“밥 먹으러 왔어?”
“넵! 선생님!”
“그려, 잘 왔어. 여기 인사해. 신 맞출 친구. 지영이. 알지?”
“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그리고 잘 부탁해요.”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파이팅이 넘치고, 아주 깍듯했다.
예정이 밥을 푸러 간 사이, 선동일이 물었다.
“몇 살 같아 보이냐?”
“어…… 외모만 보면 중학생인데, 아니겠죠?”
“맞아. 중학생.”
“네?”
“중학생 맞다고. 이제 중2.”
“…….”
중2…….
애기다, 애기.
하지만 그래도 지영은 걱정하지 않았다.
홍진아나 정은정이 설마 연기력이 부족한 애를 뽑았을 리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정답이었다.
저녁을 먹고 의상 피팅을 한 뒤, 늦은 저녁에 세 사람은 호텔 미팅룸에 모여 처음으로 합을 맞췄는데 그때 지영은 예정을 보며 깜짝 놀랐다.
연기 천재.
예정은 선동일이 인정한 연기 천재였다.
잠시 들었던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로.
그래서 지영은 마음을 놓고 합을 맞춰봤고, 알래스카의 첫날이 그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