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03화
403화. 천상계(18)
인성은 그렇다 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시청자로서는.
하지만 재능은 달랐다.
성적 만능주의.
혹은.
일등 성적주의.
금메달은 사랑받고, 은메달과 동메달은 무시당하는 시절이 있었다. 은메달, 동메달도 분명히 잘한 건데, 정말 잘한 건데, 세인은 금메달만 기억했다. 그렇기에 당장 2000년도 초중반만 하더라도 금메달을 따지 못한 이들은 주목도 받지 못했었다.
물론 전체가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금메달이기에, 더 주목되었고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기조가 나라 전체에 깔려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기조는 어느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더 나쁜 쪽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재능, 성적이 전부가 아니라 2등도, 3등도, 그리고 노력한 사람들도 기억해 주는 쪽으로.
도쿄에서 배구팀이 받았던 칭찬, 찬사, 관심과 인기가 그걸 증명했다.
그런데 지금 황금세대는 다시금 재능을 꺼냈다.
재능에 가로를 치면, 어떤 단어로 치환될까?
성적이다.
혹은.
순위가 될 수도 있고.
이게 문제였다.
재능이 없으면 성적을 올리는 게 쉽지 않다. 특히 예체능 계열은 재능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다. 10%의 재능과 90%의 노력보다, 50%의 재능과 50%의 불성실함이 오히려 성적이 더 잘 나오는 곳이다.
그렇기에 재능은 절대적이다.
재능과 노력이 성적이고 곧 서열이 되는 세계가 바로 예체능의 세계였다. 그렇기에 요즘은 이런 세계에 거부감이 많았다. 올바르게 가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연희 스포츠를 처음 만들 때 지영과 강한결은 이 두 가지에 절대적으로 동의했다.
“음, 재능과 인성이라. 재능에 관한 얘기를 해보죠. 어째선가요? 재능을 우선시하는 이유는?”
이건 대본에 있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 미리 사전에 공지를 받기도 했었다. 그래서 강한결은 준비했던 답변을 꺼냈다.
“재단은 자선사업에 가깝게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익 창출 자체를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재단이 존재해야, 후원은 계속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운동은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먹고 입는 것, 장비가 싼 몇 개의 스포츠를 제외하면 상당히 고액이 들어가는 종목도 많습니다. 연희 스포츠는 적어도 훈련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지원을 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금전적으로 꽤 지출이 큽니다.”
“아 그래서…….”
사실 이 답변에는 중요한 얘기가 상당히 빠져 있었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애들이 성적을 내야 돈이 되고, 돈이 되어야 재단이 조금이라도 길게 운영된다는 뜻이지.’
재단을 영원히 유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넣은 돈이 마르는 순간까지, 최대한 많은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연희 스포츠는 그런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선수를 더 늘리고 있진 않은 상태이고, 야금야금 아주 조금씩 수익보다 지출이 큰 상태로 전환됐다. 당장은 문제가 안 되지만, 더 인원을 늘리거나 십수 년쯤 지나면 확실히 문제가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거기에 수익 구조가 클 수가 없어요. 매니지먼트 사업까지는 아직 하지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지금 실업팀이나 프로팀에 들어간 선수들이 도움을 주기도 해서, 현 상태만 유지하면 제법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희소식이군요. 하하!”
다행히 이는 사실이었다.
실업팀으로 간 선수들이 벌써 여섯이나 된다. 거기엔 당연히 양지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양지원은 비시즌 기간에 종종 CF를 찍긴 하는데, 상당한 금액을 연희 스포츠에 후원했다. 완전히 후원에서 독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국가대표가 되며 웬만한 훈련비는 스스로 해결하고 있기도 했다. 금액이 크게 나오는 것만, 연희 스포츠에서 후원해 주고 말이다.
양지원처럼 그렇게 도움을 잊지 않은 선수들이 제법 됐다.
아니, 전부였다. 도움을 받고, 그 도움을 잊지 않았으니 연희 스포츠는 그래도 앞길이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리고 살짝 돌려 얘기하긴 했지만, 사실 이 정도면 다들 알아듣기는 했다.
‘정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재능이 없는 선수를 후원하는 건 밑 깨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야.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해. 물은 흔하지만, 돈은 흔하지 않으니까.’
가치의 차이다.
그렇기에 황금세대는 후원할 때, 재능을 본다는 뜻이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유망주가 수혜를 입을 수 있으니. 그리고 여기 있는 이들은 전부 재능이 출중한 선수들이었고, 이렇게 돌아가는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재능이 없어서 나자빠지는, 좌절과 절망하며 도태되는 친구나 선배, 혹은 후배를 질리게 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분위기는 절로 무거워졌다.
냉정하고, 잔인한 결정.
어린 학생들이지만, 황금세대는 정확히 맥을 짚고 후원을 시작했다. 그게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포츠의 존재의의 중 하나가 애초에 경쟁이다.
이 경쟁을 빼지 않는 이상은. 아니, 절대 빼지 못하는 이상은 어차피 흘러가는 생리는 영원히 이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걸 솔직히 오픈한 이상, 황금세대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그걸 다시 불러올 거냐며 뭐라고 할 게 분명했다. 그 정도는 안 봐도 빤했다. 애초에 일부 B급 언론과 관계가 좋지 않은 황금세대라 이 정도는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숨길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비난받을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스포츠 쪽 후원은 대개가 연희 스포츠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저 적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자, 그럼 두 번째 조건이었던 인성 얘기를 들어볼까요?”
우정혁은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밝은 표정으로 다른 질문으로 들어갔고, 강한결은 이번에도 차분히 대답했다.
“인성은 말 그대로예요. 저희는 뽑을 때 적어도 미팅을 하거나, 운동하는 모습을 본 뒤에 후원을 결정합니다. 인성이 오히려 재능보다 더 중요하죠. 재능이 조금은 부족해 보여도 인성이 훌륭한 친구들을 저흰 전부 지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가차 없이 탈락시켜요.”
“아 그래요? 그런데 그걸 보면 알 수 있나요?”
“미팅할 때는 연기를 할 테니 잘 모를 수도 있는데, 훈련할 때는 못 속이거든요.”
강한결은 지영이 했던 얘기를 똑같이 했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성질이란 건 티가 나게 되어 있다. 특히 운동처럼 정신없는 상황에는 더더욱 본능적으로 훅! 하고 튀어나온다.
아까 노천카페에서 지영도 얘기했듯이, 황금세대는 그걸 질리게 겪었다.
심지어 프로의 세계에 온 지금도, 세계대회에 나가면 한둘은 꼭 양아치처럼 굴었다. 그걸 질리게, 정말 물리게 겪어왔기에 인성이 재능보다 중요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초창기엔 저랑 지영이가 시간 내서 가서 꼭 훈련을 지켜봤어요. 훈련 시작, 쉬는 시간, 중반과 후반, 끝나고 나서 행동을 보면 솔직히 90%는 답이 나와요. 여기 저희보다 선배님들도 많으시니까, 솔직히 그렇잖아요?”
강한결이 묻자 다들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모인 선수 전부가 재능이 출중한 유망주에서, 완숙의 경지에 오른 선수까지 겪었다.
그렇기에 시기와 질투는 뭐 밥 먹듯이 받아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을 거고. 그게 스포츠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절대로 없어질 수 없지.’
아니, 세상이 존속하는 한 시기와 질투는 운명공동체처럼 함께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결코 좋은 쪽으로는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높은 확률로 괴롭힘이 동반될 테니까. 반대로 오히려 열을 올려 훈련하면, 애초에 그건 시기 질투보단 라이벌리를 느끼고 있단 말로 대체하는 게 나았다.
모두의 수긍을 얻은 강한결이 말을 이어갔다.
“선수의 후원은 곧, 연희 스포츠가 선수 자체를 보증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렇기에 문제가 생기면 저희는 책임져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인성은 반드시 봐야 하는 부분이었어요.”
“음음, 그렇겠네요. 맞아요. 한결 씨 말이. 문제가 생기면 결국엔 책임을 져야 하니까. 정말 맞는 말입니다.”
우정혁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 눈?”
누군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고개를 올려보니 진짜 조명 빛 사이로 눈이 내리는 게 보였다.
“와아, 이제 10월인데 벌써 눈이? 역시 강원도!”
“와, 와아…….”
사르륵 내리기 시작하는 눈에 집중이 일순간 깨졌다. 그러나 우정혁이나 장미 PD는 그걸 제지하지 않았다. 나이가 있건 없건, 선녀들이 눈을 보고 즐거워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으니 절대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많은 그림을 원하는 연출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라 할 수 있었다.
MC도 이런 그림이 생기면 당연히 흐름을 타기 좋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내리기 시작한 눈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전부 좋은 건 아니었다.
눈이 내린다는 건, 방송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아는 우정혁과 장미 PD라,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는 서로의 생각을 확인했으니, 타이밍을 잡을 때였다.
다행히 잠시 방방 뛰던 선수들은 금방 냉정을 찾고 다시 민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하하, 더 좋아하셔도 됩니다.”
“어, 음…… 하하. 아니에요.”
가장 방방 뛰던 한유진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민망한 표정과 어조로 대꾸하자 우정혁이 살살 깐족거리며 한유진의 볼이 빨갛게 익게 만들었다.
그리고 큼, 하며 분위기를 잡는 우정혁.
다시 바짝, 긴장들 했다.
“자 눈도 오니까 이후의 시간을 위하여 대본에 있는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지영 씨. 함부르크 올림픽, 올림픽 얘기해야죠. 하하.”
넉살 좋은 우정혁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얘기가 마지막에 나올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정혁이 대본을 보는 사이, 지영도 답변을 정리했다.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은 다른 친구들 얘기할 때와 같았다.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을 명경기,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 승부 끝에 승리하셨어요. 기분이 어땠어요?”
“어, 엄, 좋았어요. 그냥 안도했고, 이제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어? 그게 끝이에요?”
“하하…… 너무 정신없이 이겨서 그런지, 정말 그런 생각이 끝이었어요. 아, 하나 더 있다.”
“네? 뭔데요?”
우정혁은 얼른 얘기해 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단조로운 그림에 색을 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주면 역시 편집할 때 좋을 수밖에 없었다.
“소피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아…… 정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네, 그럼요. 소피가 병실에 자주 왔어요. 그리고 매일 울상을 지었거든요. 자기 때문에 내가 시합을 망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이건 사실이었다.
잠깐이지만 10분, 20분이라도 매일 같이 찾아와 줬다. 그 마음을 알아서 지영은 시간을 내 소피와 대면했었다. 소피는 실제로 지영에게 많이 미안해했다. 어릴 적 아팠기에, 투병 생활이 있기 때문에 소피는 오히려 철이 빨리 들어 훨씬 더 성숙한 아이였다. 그래서 지영에게 많이 미안해했다.
그걸 설득하는 게 곤욕이었다.
그리고 시합이 끝나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다. 금메달을 땄으니 소피가 더 울상 짓지 않겠구나 하고. 짧지만 분명히 하긴 했던 기억이었다.
“역시 정말, 대단해요. 하하. 그래도 결승전이 매우 힘겨웠잖아요? 시합 중에는 혹시 무슨 생각은 안 했습니까?”
우정혁의 질문에 지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즐겁다 정도? 저는 유도를 하는 게 좋거든요. 그리고 신지한테 감사함을 많이 느꼈어요. 시합 도중 간혹.”
“아, 신지면, 결승전 상대 미야모토 신지 선수 말하는 건가요?”
“네. 신지가 그렇게 시합을 풀어주지 않았으면, 솔직히 힘들었던 경기였어요.”
“매너 플레이를 말하는 거죠?”
“네.”
지영은 잠시, 신지의 얘기를 하기로 했다.
“신지는 천재예요. 솔직히 제 몸이 정상이었어도, 실력 차이는 종이 한 장 정도였어요. 제가 승률이 높긴 하지만, 언제 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간소한 차이예요. 그래서 신지가 만약 제 다리를 노렸다면, 아마 저는 2분도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이것도 사실이었다.
신지는 승리보다, 승부를 원했다.
그렇기에 그런 동등한 승부가 나온 것이다. 신지가 그 실력으로 발목을 노려 승리를 원했다면 절대로 그런 경기는 나올 수 없었다.
“아, 그렇군요. 신지 선수도 정말 대단하긴 했습니다.”
“네, 정말 타고난 유도인이자, 무도인이죠.”
“어, 둘이 차이가 있나요?”
“스포츠와 무술의 차이 정도?”
“아아, 그렇군요.”
“그런 친구와 시합할 수 있으며 영광이었습니다.”
정말이다.
지영은 신지의 존재에 감사했다.
그런 선수가 있다는 것은, 유도복을 입고 있는 동안은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니까 말이다.
우정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무도와 스포츠의 차이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었다.
“예능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소감이 어때요?”
공식 질문이 다 끝났나 보다.
소감을 묻는 걸 보니.
눈도 조금씩 세지고, 끝날 때가 되긴 됐나 보다.
“좋았습니다. 신경 많이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담백해요. 하하. 저도 오늘 하루 처음 게스트 MC를 해봤는데, 이거 재미가 제법 쏠쏠하네요. 다음에는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 제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하하.”
우정혁은 그렇게 말하며 다른 선수들에게도 공을 들여 소감을 들었고, 전원 듣고 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로 엔딩이 없어서, 공식 스케줄은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인사로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인사.
지영도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벤치로 와 앉으며 후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첫 예능,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많이 배려받아, 크게 힘들지도 않았다.
‘종종 경험해 봐도 좋을지도?’
잠시간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의 경험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자, 얼른 천막 칠게요! 야식 오고 있습니다!”
“10분이면 도착한다니까 우리 얼른 천막치고 뒤풀이합시다!”
스태프들의 목소리에 지영은 아직 오늘 하루는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그래도 야무지게 뒤풀이까지 참가하며 첫 예능 촬영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