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90화
390화. 천상계(5)
솨아아아-
어느 순간 깨어난 의식. 귓가로 아련하게 들려오는 빗소리에 지영은 천천히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 한 정신이지만 지영은 일어나 발에 다시 깁스를 채우고, 스트레칭을 했다. 전에 무의식적으로 그냥 했다가 근육이 놀라서 상태가 더 안 좋아질 뻔한 적이 있어서, 일어나면 무조건 깁스부터 도로 찼다.
깁스를 제대로 고정하고, 스트레칭이 시작.
천천히, 천천히.
스트레칭은 급히 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시간과 공을 들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육을 풀어주는 게 포인트다. 자면서 경직되었기 때문에 급하게 풀면, 역으로 근육이 상한다. 그렇게 공을 들여 스트레칭을 하며 지영은 주변을 돌아봤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아주 미약한 등 아래 친구들이 각자 좋아하는 공간에서 자는 게 보였다. 이성진은 벽에 바짝 붙어 자고 있었다. 그것도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임효중은 그런 이성진의 근처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황석은 지영의 옆에 대자로 몸을 벌리고 자고 있었고, 강한결은 이불도 덮고 다소곳이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에서도 참 특징이 잘 보였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잠시 웃은 지영은 일어나서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은, 분주했다.
시간은 새벽 다섯 시.
“어, 지영이 내려온다.”
메이크업을 봐주실 분은 올해 비즈 엔터와 계약한 임수진 씨였다. 예전에 노는 언니들에 처음 나올 때 지영의 메이크업을 봐줬던 프리랜서였었는데, 지금은 비즈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담당은 당연히 황금세대 아이돌이었다.
“누나,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응. 새벽 세 시쯤? 혹시 시끄러워서 깼니?”
“아니요. 빗소리에 깼어요.”
“아 맞다, 비 오지. 어떻게, 지금 바로 할래?”
“어, 바로 해야 해요? 7시 모이는 걸로 아는데.”
“맞아. 7시. 그러니 천천히 해도 되지. 근데 그냥 물어본 거야.”
“그럼 좀 있다가 할게요. 어…… 빗소리 좀 듣고 싶어서.”
“그래? 그래, 그럼.”
임수진이 웃으며 물러나자 지영은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이온 음료와 티 종류 음료가 보였다. 지영은 티를 하나 꺼내서 밖으로 나왔다. 밖에도 비를 피하는 발코니가 있었다. 그런데 좀 추워서 다시 들어가 패딩을 꺼내서 다시 나왔다.
강원도라 그런지, 새벽은 확실히 쌀쌀했다.
지영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었지만,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안이 분주해서 이것저것 하기엔 좀 걸리적거릴 것 같았다.
“하…….”
솨아아아-
전방은 숲이다. 정확히는 숲 중앙으로 길이 나 있고, 뒤는 산이다. 그런 곳에 위치한 펜션이었다. 그래서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지금의 경치는 예술이었다. 솔직히 어제 애들이 늦게 오지만 않았어도 깨워서 같이 보고 싶은 경치였다. 하지만 지영은 다시 깨달았다.
‘참, 나랑은 다르지.’
친구들은 아직 이런 경치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을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영은 이제 슬슬 경치가 좋아질 나이다. 일상에서 그냥 지나쳤던 것에 의미를 슬슬 부여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육체는 아니어도, 정신적으로는 그럴 나이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거기에 남들보다는 좀 더 힘들었던 과거사 때문에 이런 풍경이 좀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때도 의미가 있었지만.
‘그랬는데도 한 번도 다니지 못했었지.’
회귀 전에 어머니가 몇 번 권했던 적은 있었다. 가까운 곳으로라도 나갔다가 오지 않겠냐고. 하지만 지영은 거절했었다. 그땐 정말 다리가 너무 불편했었다. 걷기만 해도 30분이면 통증이 올라올 정도고, 언덕이나 불규칙한 도로면 더 빨리 한계에 부딪혔다.
그래서 지영은 매번 거절했다.
그랬던 욕구가 쌓였었나? 이런 풍경을 보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게 꿈은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들고 그랬다. 하지만 역시 꿈은 아니었다.
‘꿈이라고 치기엔 너무 길지.’
그리고 이렇게 긴 꿈이면, 깨어났을 때 오히려 어떤 이유로든 좀 홀가분할 것 같았다. 화도 나겠지만, 그래도 긴 꿈이었으니까. 아 개꿈이네. 해도 봐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솨아아아-!
빗줄기가 좀 더 강해졌다.
그러면서 안개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와…….”
끼이익.
저도 모르게 감탄하는데 문이 열리면서 지영처럼 패딩으로 몸을 감싼 강한결이 나왔다. 손에는 김이 나는 머그컵 두 잔이 들려 있었다. 강한결도 몸 관리는 끔찍이 해서,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받아 마셨더니, 익숙한 맛이다.
“케모마일 차네.”
“응. 은진 누나가 항상 챙겨 다니잖아. 그것 좀 빌렸어.”
“사드려야겠네. 근데 왜 벌써 깼어. 아직 시간 많은데.”
“그럼 넌 왜 벌써 깼냐?”
“빗소리에?”
“나도 빗소리에.”
그렇다는데 뭐.
지영은 그냥 피식 웃고는 다시 시선을 주차장으로 뒀다. 정면의 경치가 워낙에 좋아서 그걸 활용할 모양인지 주차장도 아예 건물 옆으로 빼놨다. 그래서 탁 트인 시야 때문에 해방감도 들어 좋았다.
마음이, 소리와 풍경에 절로 정화되기 시작했다.
“애들은?”
“석이는 깼고, 효중이랑 성진이는 아직 자고.”
“늦게 도착했으니까. 걔넨 이따 깨우자.”
“그래야지.”
잠시 뒤, 깼다는 황석도 잔을 하나 들고 와 지영의 옆에 앉았다.
셋이 나란히 앉자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힐끔 봤더니 방송 촬영에 전담으로 따라다니는 사진작가분이셨다. 커다란 명찰을 차고 있어서, 금방 알아봤다. 그분은 지영과 친구들이 고개를 돌리자 손짓으로 앞을 보라는 신호를 줬다.
“씻지도 않았는데 바로 카메라를 들이대시네.”
강한결이 슥, 고개를 뒤로 빼면서 한 말에 지영은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러게, 하고 짧게 대답했다.
“결아. 너나 나보단 지영이가 옆에 있잖아. 어떻게라도 한 컷이라도 더 담고 싶은 거 아닐까?”
“음, 맞네. 그거네.”
“음, 그거야.”
이것들이.
“됐거든? 나만 유명하냐?”
“그건 아닌데, 지영이 네가 압도적이지. 그러니 인정할 건 인정하고 가자, 우리 사이니까. 그보다 발은 어때? 오늘 촬영 괜찮겠어?”
강제로 인정시키고, 다시 강제로 화제 전환.
지영은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줬다. 강한결이니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넘어가 줄 생각이 있었다.
“괜찮아. 담당 샘이 회복력은 인류 전체로 따졌을 때 상위 1%라고 하시더라.”
“아 진짜?”
“응. 진짜.”
진짜였다.
어제도 병원에서 치료와 재활을 받고 왔는데, 어젠 근육의 상태를 정밀 검사까지 받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회복이 훨씬 빨랐다. 이걸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보통은 아직 걸을 때 인상을 찡그릴 정도의 불편함이 있어야 하지만, 지영은 그 정도는 아니고 미세한 통증만 남은 상태, 그 정도였다.
약까지 써가며 집중하자, 회복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병원에서는 일주일 후에는 깁스는 풀어도 될 것 같단 얘기를 해줬다. 그 말을 듣고 어제 시험 삼아 그냥 걸어봤는데 확실히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보통 지금처럼 거의 나았을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다.
이때 나은 것 같아서 다시 몸을 막 쓰면,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한다. 전문가가 완치! 판정을 해주기 전까진 웬만해서는 끝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게 좋았다. 그래서 지영은 오늘도 깁스를 차고 촬영할 예정이었다.
최대한 조심, 또 조심하면서.
그래도 이렇게까지 좋아져서 마음은 편했다.
“응, 덕분에 드라마 스케줄도 얼추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와, 그건 다행이네.”
강한결이 진심으로 안도한 표정으로 지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가끔 이렇게 형처럼 굴 때가 있는 강한결은 신기하게도 동갑인데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비가 조금씩 그치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자 숲 안개가 뭉실뭉실 피어났다.
“여기 은정이랑 한 번 와야겠다.”
“오, 좋은 생각이네. 나도…… 음, 나는 힘들겠다. 한결이랑.”
“왜?”
“동계가 내년이잖아.”
“아 맞다.”
원래 하계와 동계는 2년의 텀이 있다.
하지만 도쿄 때부터 꼬이면서, 하계가 올해 열렸는데 동계가 내년 2월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다. 강한결의 연인인 양지원이 참가는 당연히 결정된 사항이었다. 양지원은 정말 오랜만에 나온 피겨 금메달 기대주였다. 이미 메이저 대회인 세계선수권, 유럽 선수권, 사 대륙 선수권,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전부 금메달을 획득했다.
물론 피겨 퀸처럼 압도적인 실력은 아니었지만, 현재 예측할 때 일본의 이시다 마유, 러시아의 예카트리나와 함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입상으로는 양지원이 조금 앞서지만, 모르는 일이다. 대회에선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니까.
양유진은 그런 동생 케어에 최선을 다할 거다.
회사도 열심히 다니면서 동생의 수발을 들 거다. 그래서 당분간은 양지원이나 양유진이나, 바빠서 아마 못 만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서운하진 않았다.
운동선수가 대회에 있어서 집중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지영 또한 선수촌에 있으면서 양유진과는 정말 자주 만나지 못했다. 선수단 외출이 있을 때 잠시 만나는 게 거의 전부였다. 만나서 딱히 데이트도 제대로 못 했다. 지영이 워낙에 유명해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양유진은 다 이해해줬다.
그러니 이번엔 지영이 이해해 줄 차례였다.
차가 식었다.
끼이익.
“지영아. 이제 슬슬 준비할까?”
“어, 벌써 5시네요. 네, 누나.”
“얼른 씻고 와. 석이랑 한결이 너희도. 너희 셋 먼저 하고, 효중이랑 성진이는 뒤에 하자.”
“네.”
지영은 일어나서 2층으로 올라갔다.
대형 펜션이다. 그런 펜션 전체를 통으로 빌렸다. 씻을 수 있는 공간은 그래서 여유가 있었다. 지영은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가볍게 옷을 입고 나와 임수진이 세팅한 거울 앞으로 갔다.
오랜만에 받는 메이크업.
나의 무사님을 찍을 때도 정말 최소한의 메이크업만 했었다.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무사가 얼굴에 분을 찍어 바르는 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정은정 작가의 강력한 어필을 지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정말 스킨로션만 바르고, 메이크업은 최소의 최소로 줄였다.
심지어 이는 여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배우에게 메이크업은, 무기와 같았다. 전장에 나서는 병사의 총과 칼과도 같은 것. 그러나 정 작가는 용납하지 않았다.
기초까진 오케이.
그러나 그 이상 화사한 건 노케이.
이연이 작정하고 정말 기초만 하고 나오자, 다른 배우들도 어쩔 수 없었다. 극 중 어쩔 수 없이 화려하게 해야 하는 캐릭터나 상황이 아니라면 전부 메이크업은 거의 받지 않았었다. 이런 작품을 했기에 지영은 메이크업이 사실 낯설었다.
보통의 배우들이라면 이런저런 공식 석상에 자주 서니, 메이크업이 일상이다.
그러나 지영은 그마저도 없었다.
지영을 부른 시상식은 많았지만, 역시 전부 불참해서 상도 없었고, 꾸밀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이 정말 오랜만에 받는 메이크업이었다.
“이야…….”
“와…….”
뒤늦게 나온 강한결과 황석이 지영이 변하는 모습을 보곤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소리에 지영은 감았던 눈을 떴다.
“아직, 감고 있어.”
“네.”
왜 그러나 해서 눈을 떴던 지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강한결이 놀리고자 한 게 아니라, 진짜 감탄했던 것 같아서였다. 이어서 임수진은 고데기로 지영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쭉 올렸다가 당기고 그러는데, 그러자 거칠었던 머리가 정돈되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누나. 머리하는 중인데도 감고 있어요?”
“응. 끝나고 봐야 느낌이 빡! 오거든? 그러니 좀만 참자. 금방 끝나.”
“네.”
끙…….
절로 앓는 소리가 났지만 어쩌겠나. 10분? 그 정도를 인내하며 시간을 보냈을 때였다.
“다 됐다. 이제 떠도 돼.”
“네. 누나, 고생…….”
지영은 눈을 뜨며 인사하다가, 말문을 턱 막혔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했다. 커다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자신인데, 내가 맞는데…….
‘어…… 이건 좀.’
실룩,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누나, 이거…… 너무 좀.”
“응, 괜찮지 않아?”
“아뇨. 괜찮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너무…… 여자 같지 않아요?”
“응, 그런 느낌이니까. 그런데 정확히는 중성적인 거야. 머리가 길고, 여자처럼 정말 곱게 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 중성적. 지영이 너 외모가 원래 그래.”
“아니, 그래도…….”
“무슨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 지영이 너 체격도 있고 해서, 절대 그쪽으로 안 보이니까.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이거 대표님 컨펌도 난 거다? 그리고 팬카페에서 지영이 네가 해줬으면 하는 헤어스타일 부분 1위! 그러니까 불만 있으면 대표님이랑 팬카페 가서 해!”
“…….”
아…….
부드럽게 흘러내린 단발.
서늘하게 찢겨 올라간 눈매.
평소보다 조금 더 진한 붉은 입술.
내가 아닌 내가, 거울 안에 있었다.
그런 거울 안의 자신을 보면, 지영은 처음으로 장발인 재의 캐릭터를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