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85화
385화. 휴식(6)
나의 무사님의 인기 비결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나 배우다. 인기 자체를 견인한 건 역시나 배우 강지영의 이름값이다.
나의 무사님의 시나리오를 자세히 뜯어보면, 사실 그동안 한국에서 무수히 많이 나왔던 시대극 드라마와 큰 틀은 다르지 않았다. 정말 새롭고 특별한 게 나오기에는 이미 그간 수많은 작가가 머리를 굴려 가며 거의 써버려서, 소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틀 자체는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다르게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했다. 안 그러면 표절이니까.
정은정 작가의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시원시원한 전개가 첫 번째로 손에 꼽았다. 그러면서도 극의 흐름을 유려하게 조작했다. 이런 특별함 속에, 더 특별한 게 있었으니 바로 캐릭터였다.
정은정 작가는 캐릭터 조형에 있어서도 천재였다.
특히 메인 시나리오를 끌고 갈 주연 캐릭터의 조형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재와 연, 후와 선고의 조형을 정말 아름답게 짜왔다.
지영은 재가, 재라서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자신 있는 몸을 쓰는 것을 포함해 설정으로 붙어 있는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액션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지영이 앞으로 경험할 수 없는 액션. 지영도 욕심이 있었다. 어차피 카메라에 담기는 거면, 보다 멋있게 담기기를 바랐다.
재의 액션이 딱 그랬다.
재의 액션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선에 있었다. 전쟁을 보여주는 액션인데, 거기서 혼자 하늘하늘 중국무협처럼 춤을 춘다? 칼 맞고 죽기 딱 좋다. 그러니 지극히 현실적이어야 했다.
여기서 현실적이란?
개싸움이다.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칼을 피해서 피하다 보면 땅바닥을 구르고, 칼을 놓치면 상대를 물어뜯기도 해야 하는, 그런 게 전장이란 가정하에 정은정 작가는 시나리오를 썼다. 단일 전투라면 좀 더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집단전은 그런 개싸움이 기본이었다.
지영은 이것도 마음에 들었다.
재의 액션은 그래서 빛났다. 그러니 액션을 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지영이 고개를 젓자 홍진아 감독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지도 않았다.
“아니, 마음은 아는데. 알레스카 일정까지 다 낫겠어요?”
“낫도록 해야죠.”
“후후, 그런 마음가짐은 고마운데, 그런 마음가짐이라고 회복이 빨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건 그렇다.
아무리 지영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상식을 뒤집는 속도로 나을 수는 없었다. 낫는 속도를 조금 빨리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이걸 걱정하는 건, 역시 일정 때문이었다.
이미 일정은 나왔다.
당장 다음 주가 나의 무사님 종장의 크랭크인이다. 지영의 부상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이미 그렇게 일정이 나왔고, 이미 배우들에게도 전부 전달이 된 상태였다. 실제로 촬영 기기도 이미 배를 타고 로케이션 현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지에서의 일정은 3주 정도다.
드라마 전체에서 나오는 설원 액션 신 전반부를 3주간 다 찍어야 했다. 이유는 배우들의 스케줄 때문이었다. 나의 무사님이 성공하며 다른 조연 배우들도 이름값이 많이 올랐다. 특히 강서훈과 심수정, 이연의 인기는 급부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빴다. 특히 물이 들어왔으니, 노를 젓겠다는 생각이 강한 심수정은 영화 촬영이 한창이었다.
사실 원래 지금쯤이면 끝났어야 했는데, 그쪽도 딜레이가 되어 지금 후반 작업 중이라고 했다. 이는 강서훈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의 배우들도 크고 작은 배역으로 작품활동 중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시간을 낸 게 3주였다.
이 3주간 거기서 최대한 설원 신을 몰아 찍어야 했다.
문제는 그때까지 지영의 컨디션이 정상으로 올라오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최소로 잡은 게 한 달이다. 그런데 한 달 만에 바로 정상 컨디션으로 운신한다? 그건 불가능했다. 괜히 재활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었다.
깁스를 풀고 바로 고강도 액션 신을 소화하면?
덧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고, 또 길게 잡아줘도 이삼일이면 충분하다. 그러니 지영은 최소 5주, 6주는 묶여 있어야 했다. 그럼 전반부 액션은? 4주 안에 종료가 된다. 즉, 지영과 스케줄이 맞지 않는 거다.
이 때문에 정은정 작가는 지영의 액션 신을 줄이는 판단을 내렸다.
이미 스케줄이 결정된 이상,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지영이 아무리 중요한 배우고, 작품의 핵심이라고는 해도, 지영 하나 때문에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 제작진 측의 일정을 모조리 수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최선은 지영이 액션 신을 최소화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게 맞았다. 지영이 배우만 한다면 좀 무리하고, 길게 회복하면 된다. 하지만 지영은 운동선수의 신분이 있고, 그쪽도 이쪽에 못지않게 진심이다. 아니, 솔직히 그쪽이 더 진심이었다.
그러니 부상 관리는 최대한 제대로 해야 했다.
“음…….”
이거, 난제였다.
지영은 재의 캐릭터를 살리고 싶었다. 재는 몸을 쓸 때 그 진가가 드러나는 캐릭터다. 후와 연이 앉은 자리에서 지략 싸움을 벌이는 게 매력이라면, 재와 선고는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아 미치겠네.’
부상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제야 지영은 이 부상이 억울하고 화가 났다. 물론 자신이 자처한 일이었다. 그래서 누굴 탓하지도 못했다.
지영은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대신.
“스케줄 내로 최대한 몸을 만들어 볼게요. 그럼 괜찮죠?”
“……정말 괜찮으면요. 솔직히 말하면 저야 지영 배우가 제대로 연기해 주기를 바라죠. 어느 연출이 배우가 열심히 하겠다는데 싫어하겠어요?”
“…….”
“그런데 지영 배우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잖아요. 괜히 제 고집으로 지영 배우 선수 생활에 문제가 생기면…… 저는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홍진아 감독의 약한 말에 지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정은정 작가와 이연의 눈치를 살폈다. 둘은 홍진아 감독의 말에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맞는 말이야. 지영이 넌 몸값도 몸값인데, 감당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
임은진이 확인 사살까지 해줬다.
“저, 많이 컸네요?”
그래서 지영은 그걸 순순히 시인했다. 가벼운 조크를 섞어서. 그러자 다들 큭큭 웃었다. 크긴 많이 컸다. 나의 무사님 시즌1을 찍을 때의 지영과 지금의 지영은 정말 천지 차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충분히 그럴 것 같았다. 그러니 이건 떼를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낫도록 노력해 볼게요. 만약 그때까지 몸 상태 제대로 올라오면, 그땐 대본대로 갈게요. 그건 괜찮죠?”
“그건 제가 부탁할 일이죠.”
지영은 홍진아 감독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활. 그건 자신 있다. 이미 데이터 자체를 자신이 잘 알고 있어서, 깁스를 풀기 전에 몸을 최대한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깁스를 풀고 나서도, 재활을 단축하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런 부상에 좋은 치료법도.
어차피 도핑 걱정도 없으니 약물의 도움도 충분히 받으면 시간을 확실히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적어도 2주…… 단축 가능해.’
거기에 더해 젊고 건강한 육체에. 남다른 치유력까지 합치면 상당히 단축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이어서 세부적인 사항들을 조율했다.
물론 이 부분은 지영이 아닌, 임은진이 나서서 도맡아 했다. 지영도 중간중간 의견을 나누며, 꽤 오래 일정을 조정했다.
그렇게 조정하고 나자, 벌써 저녁이었다.
길게 대여했기에, 눈치 볼 것 없이 저녁까지 시켜 먹고 나서야 좀 편안한 분위기로 넘어갔다. 올림픽 뒷얘기. 세 여자는 이걸 정말 기다렸던 눈치였다. 하지만 지영은 별로 해줄 게 없었다.
“저는 병원에만 처박혀 있었잖아요. 끝나고 배구 경기 한 번 본 게 전부고. 그래서 뭐 해줄 말도 별로 없어요.”
“아, 그렇겠네……. 그럼 막 헌팅 당하고 그런 적은 없어?”
“네.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하게 막아서요.”
“아 그건 아깝……이 아니지.”
“하하.”
양유진의 존재를 뒤늦게 떠올린 이연이 얼른 브레이크를 밟아 실수 앞에서 멈춰 섰다. 하여간 장난기 하나는, 역시나 아는 사람 중에는 최고였다. 적당히 그녀의 장난을 받아주며 시간을 보내고, 지영은 해가 떨어질 때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영은 저녁을 먹었다. 카페에서도 먹었지만 거기선 워낙 대충 먹었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훅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영은 어머니와 함께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저녁을 또 먹었다.
저녁을 먹고, 씻은 지영은 방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방송은 당연히 올림픽이었다. 올림픽도 이제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결정됐기에 준비 기간이 여유가 별로 없었고, 그래서 무리해서 예산을 사용했기에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그 부담을 어느 정도 해결하기 위해 올림픽 특수를 조금 더 늘려줬다. 그렇게 도쿄 때보다 일정이 7일 정도 더 늘어났고, 이제 마지막 엔딩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마침 여자배구 차례였다.
여자배구는 치열하게 8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두 게임이 남았는데, 딱 1승이 필요한 상태였다.
오늘 경기는 터키전이었다.
강호.
말할 것 없이 강한 나라였다. 그런 터키에게 분전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아쉬웠다. 해설하는 한유진의 허탈한 목소리, 힘 잃은 목소리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다음 경기에서 승리하면 그래도 8강 진출이 가능했다. 배구 경기가 끝나고 지영은 TV를 끄고 누웠다.
하지만 불은 끄지 않았다.
편안한 자세로 지영이 펼친 건 당연히 대본이었다. 정확히는 소설을 먼저 들었다.
“아, 체중.”
하지만 불쑥 생각난 체중 때문에 다시 일어나 체중계에 올라갔다. 깁스의 무게를 빼고 나면 77이 조금 넘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안정권이었다. 하지만 운동 없이 다시 빼기에는 쉽지 않은 체중이기도 했다.
지영은 대본을 펼치기 전에 달력부터 확인했다.
확실히 빡빡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빡빡함은 웃으면서 참을 수 있을 만큼 멘탈이 단련되어 있는 지영이었다.
달력을 보며 감량 일정을 정한 지영은 다시 침대에 누워 대본을 살폈다.
일단은 당연히 소설부터다.
보는 재미가 있었다. 정은정은 대본뿐만이 아니라, 소설도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썼다.
독특한 문체도 문체인데, 중요한 장면을 기깔나게 잘 살렸다. 흥미 유발도 유발이고, 내용 자체도 정말 군더더기가 없었다.
물 흐르듯이 아주 깔끔한 전개였다.
지영은 그런 소설에 흠뻑 빠져, 간만에 새벽 늦게 잠들었고, 늦잠을 잤다. 아침을 늦게 먹은 지영은 다시 씻고 나와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다시 서울로 가는 날이었다. 준비를 끝내고 지영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저예요. 이제 서울 병원 가려고요. 아니요. 은진 누나랑 같이 간다니까요. 네. 음, 아마 사일? 오일? 그쯤 있다가 올 것 같아요. 간 김에 액션 스쿨 가서 공부도 좀 하게요. 네. 진료 보고 전화 드릴게요. 네. 엄마도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네.”
전화를 끊은 지영은 잠시 뒤 임은진이 도착했다는 전화에 짐을 챙겨 지하로 내려갔다.
“누나 안녕하세요.”
“응. 잘 잤지?”
“넵. 누나 아침은요?”
“시간이 몇 신데?”
“하하, 맞네요.”
“벨트 매고.”
“네.”
벨트를 매자, 임은진이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타자, 임은진이 지나가는 어투로 툭 말했다.
“참, 지영아. 올림픽 일정 끝나고 정부에서 선수들 만찬 준비한다는데, 어떡할래?”
“거절해 주세요.”
지영은 숨도 쉬지 않고 거절했다.
좋은 기억도 없고, 나쁜 기억도 없지만 거기 나가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단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일단 가는 순간부터 거절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거다. 그래서 한국에 온 첫날 캠핑 아닌 캠핑에서 강한결은 이런 상황을 당연히 예상했고, 가지 않는 걸로 방향을 잡았다.
이것도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영이기에 가능했다. 지영이 포함된 황금세대이기에 가능했다. 일개 개인이 가지기엔 지극히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졌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이 가능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올라가서 거절할게.”
“네.”
임은진도 딱히 다른 의견을 내진 않았다. 아마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2시간을 넘게 달려 서울에 도착해 지영은 치료를 받았다. 무리가 가지 않는 주사를 포함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임은진이 와 예상치도 못한 말을 건넸다.
“지영아. 지금 거절했는데, 참석 안 하면 훈장 취소하겠다는데?”
“……네?”
“너 이번에 훈장 받기로 되어 있었나 봐. 그런데 안 오면 그거 취소하겠대.”
“……푸흣.”
이건 또 뭔?
어이가 너무 없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