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69화
369화. 함부르크 올림픽(15)
사실, 기술을 들어가려고 했다.
이렇게 대놓고 밀고 오니까, 빗당겨치기를 넣고 싶어 혀가 바짝 말랐다. 하지만 혀가 마르는 순간, 지영은 불현듯이 깨달았다.
‘만약 이게 미끼면?’
미끼를 던져 놓고 상대를 낚시 하는 운영이 과연 나 혼자만 할 줄 아는 걸까? 아니다. 가까이로는.
‘성진이도, 효중이도, 한결이도 석이도, 전부 할 줄 아는 거야.’
슬쩍 덫을 놓고 그걸 무는 순간 콱! 카운터를 치는 거야 친구들도 당연히 전부 할 줄 알았다. 그러면 자신과 친구들만 할줄 아는 걸까? 그것도 당연히 아니다. 유도에 종사하는 모든 선수가 할 줄 안다.
지영이 파악한 알레코는 확실히 유도 지능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도 지능이 딸린다고, 사람이 진짜 멍청이라는 건 절대 아니었다. 이성보단 본능에 의지한 경기를 펼친다는 거지,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유도를 한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처음에 절반을 딴 덧걸이도 미끼를 슬쩍 두긴 했어.’
평소와 다름없는 자세.
그래서 지영에게 포지션 체인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 자체가 미끼였다. 자신이 힘이 좋으니, 힘이 좋은 쪽이 상당히 유리한 맞틀어잡기로 가고 싶지 않으면 자세를 바꿔라, 이런 미끼였다.
지영은 그 미끼를 물었다.
물었더니 바로 덮치듯이 날아와 뒤로 덧걸이를 친 거고.
그 정도의 사고가 된다는 뜻이다.
혹은 전술 수행 능력이 된다는 뜻이거나.
그럼 이번에는?
지영은 정말 알레코가 자신의 이전 경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몰라 이렇게 밀고 오나? 그걸 생각해봤고, 역시 아니라는 답을 순간적으로 얻었다. 그 짧은 틈에. 그래서 빗당겨치기를 꽂는 ‘척’한 발 빠지며 몸을 틀 모션을 주자, 알레코의 중심이 마치 스모선수처럼 극단적으로 낮아졌다.
정답이었다.
여기서 빗당겨치기를 넣었으면, 무조건 뒤로 붙어서 허리를 감아 백드롭을 때렸을 거다. 알레코의 힘을 생각하면, 지영의 발목 상태를 생각하면 허리를 잡히는 순간 뇌진탕이 올지도 모르는 강렬한 백드롭은 100%, 기정사실이었다. 지영은 곧장 자세를 풀고 빠졌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아쉽다는 눈빛.
역시, 미끼였다.
물었으면 돛새치급의 월척이 되어줄 뻔했다.
‘역시 준결승인가…….’
쉽지 않았다.
좀 전 그 수가 알레코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건지, 아니면 아까 내려온 전술의 한 방향인지 모르지만, 이번에 걸렸으면 패자 결승으로 뚝 떨어질 뻔했다. 솔직히 지도를 두 개 먹였을 때는, 너무 쉽게 원하는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뒤도 사냥하기 수월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 준결승전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도를 잘하는 인간들이 나온 올림픽 무대의 준결승답게, 알레코는 쉽게 지영에게 승리를 건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게 지영의 정신을 자극했다.
일종의 자극제, 부스터가 되어 정신 전체에 퍼져 나갔다. 지영이 유도를 애정이라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어떤,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게 기이하게도 지영에게 좋은 기폭제로 작용했다.
강력한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분비되는지, 기분을 극단적으로 하이로 끌어올렸다. 더불어 지끈거리던 발목의 통증도 서서히 지워버렸다.
노림수가 간파당했다는 걸 알았는지, 한 걸음 물러난 알레코가 씩 웃었다.
지영도 그 웃음에, 비슷한 미소로 화답했다.
좋은 선수였다.
생각해 보니까 알레코는 경기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지영의 발목에 모두걸기를 걸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때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텐데도, 그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지영의 약점을 직접 두들겨서 승리를 따내고 싶지는 않단 느낌이 물씬 나는 플레이였다.
존중받아 마땅한 선수.
알레코는 지영에게 그런 선수로 각인됐다. 그러나 그런 선수라고 적당히 경기하고픈 마음은 당연히 조금도 없었다.
맛테!
심판이 그쳐를 선언했다.
그에 흠칫한 알레코였으나, 지영은 심판이 벌써 반칙을 주진 않을 거로 생각했다. 짧은 잡기 싸움과 수 싸움을 거치면서 도복이 풀어졌고, 그걸 고치기 위한 그쳐일 거다. 그리고 역시 심판은 도복을 고치라고 한 뒤, 다시 경기를 시작시켰다. 제대로 된 심판이 들어왔다.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은, 유도의 룰만 보는 심판. 이런 심판이 배정되었다는 게 지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메! 외침이 들렸을 때 지영은 시선을 잠시 돌려 점수판을 확인했다.
1:25.
짧은 격전으로 벌써 35초가 지났다. 이렇게 시합이 끌려가면 결국 지는 건 자신이기에, 지영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승부를 걸었다.
‘이 선수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밀고 오게 만들어야지.’
어떻게?
맞불을 놓으면 된다.
분명 지영은 힘에서는 밀린다. 하지만 유도는 힘이 전부인 종목이 아니다. 그리고 잡기 싸움에서도 충분히 상대의 힘을 이용해 유리하게 풀어갈 방법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영이 원하는 건, 알레코의 머릿속에 ‘밀리면 반칙패’란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는 거였다.
남은 시간은 고작 1분 조금 넘지만, 지영은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해내야지.’
해내지 못하면 이런 고민 자체가 전부 의미가 없는 거니까. 지영은 선수 대기석에서 자신의 경기를 보고 있는 미야모토 신지와도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그의 눈은 화르르 불타고 있었다. 반드시 이기고 올라오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느껴졌다.
휙!
손을 쭉 뻗어 지영의 가슴 깃을 먼저 잡은 알레코가 뒤로 물러나며 강하게 도복을 털었다. 업어치기 선수가 업기 전에 보이는 털기처럼 격렬했다. 지영은 툭툭, 채서 역스텝을 밟아 원래의 자세로 돌리며 손을 쭉 뻗었다.
포지션의 정상화.
본래 오른쪽으로 섰던 것을 왼쪽으로 돌렸으니, 왼쪽잡이 선수들은 꺼릴 수밖에 없는 맞틀어잡는 상태가 됐다. 솔직히 이렇게 틀어잡는 건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잡은 자세는 선택지가 극단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경기 운영과 카운터가 주무기인 지영에게는 오히려 카운터에 가까운 자세였다.
애초에 자세를 오른쪽으로 바꾼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잡기는, 순간적으로 알레코가 당황했다. 맞틀어잡는 거야 그가 바라던 자세고, 이걸 지영이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얼추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굳이 자세도 바꾸었던 지영이 갑자기 지금 맞틀어잡는다? 알레코는 순간적으로 이 자체가 지영의 ‘실수’가 아닐까 하는 판단을 거의 반사적으로 내렸다.
그래서 본인도 틀어잡고, 쭉쭉 당겼다. 힘은 자신이 위니까. 힘으로 일단 끌어서 허리기술을 걸든, 아니면 수비적 자세로 만들어 반칙을 먹이든, 이렇게 잡으면 자신에게 불리할 게 조금도 없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급속도로 차올랐다.
실제로 알레코는 이렇게 맞틀어잡고, 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
십전십승은 아니지만, 십전팔승은 거뒀던 게 이 자세에서의 격전이다. 그런데 그런 승률 높은 자세로 지영이 먼저 들어와 주니, 알레코는…… 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덥석.
하나, 둘, 셋! 힘이 좋으니 쭉쭉 끌려온 지영에게 제대로, 완벽한 타이밍에 허리후리기를 걸었다. 아니, 걸려고 했다.
지영이 쭉 들어오면서, 받쳐 올리며 발목 받치기를 치지 않았으면 허리후리기를 걸었을 거다. 어떻게든 다리를 걸기만 하면 감아치기로 끝까지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술은 거리를 좁혀서 축지법처럼 치고 들어온 지영이 위로 받쳐 올리며 발목받치기를 때리는 바람에 그대로 무너졌다.
홱!
알레코는 버텼다.
순간적으로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끝장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체와 하체가 서로 따로 노는 그 순간, 그 순간에 기술이 걸렸다. 상체는 틀었는데 하체가 쫓아오지 못했으니 허리에 부하가 걸렸고, 당연히 중심은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 됐다.
그래도 한 번은 용케 버텼다.
그러나 툭, 발목에 댄 발을 중심 삼아 껑충 다가와 다시 한번 툭 쳐올린 기술은 버티지 못했다.
홰액!
쿠웅!
발목받치기치고는 매우 격렬하게 반원을 그리면서 날아간 알레코는 팡! 고요한 경기장에 폭탄이 터진 것처럼 매트에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낙법을 치고 엎드린 알레코는 심판을 올려다봤고, 같이 빙글 돌아 굴러서 떨어진 지영도 심판을 올려다봤다.
고개를 빼고 넘어간 자세를 제대로 확인하고 있던 주심은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손을 일자로 쭉 들어 올렸다.
잇-폰!
우와아!
심판의 외침과 동시에 터지는 거대한 함성에 알레코는 고개를 뚝 떨궜다. 그런 알레코를 잠시 보던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판에 던진 승부수가 제대로 먹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영은 일부로 알레코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자세를 만들어줬다.
서로 맞틀어잡기.
요즘 들어서는 이렇게 대놓고 맞틀어잡는 경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오죽하면 체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잡기를 많이 하지 않는 헤비급에서도 잘 나오지 않았다. 헤비급도 요즘은 잡기를 기본적으로 주력으로 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알레코는 순간적으로, 이게 웬 떡인가 싶었을 거다.
지영은 부디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랐는데, 그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 알레코는 불쑥 들어온 그 찬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힘으로 쭉쭉 끌어서 허리후리기를 걸었다. 힘이 워낙 좋아서 지영도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면 정말 위험했겠지만, 지영은 그 순간의 타이밍을 제대로 잡았다.
기술을 걸기 위해 허리를 비튼 그 순간, 허리기술은 보통 상체를 먼저 틀고, 그다음 하체가 따라간다. 하지만 굳이 순번을 나누면 그렇다는 거지, 그 과정은 거의 순식간에 슉 지나간다. 그런데 지영은 그 순간을 아주 정확히 노렸다.
허리는 돌았는데, 상체는 돌지 못한 그 순간의 틈.
아니, 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순간을 제대로 노리고 카운터를 갈겼다. 그 결과가 한판이었다.
알레코는 도복을 고치며 고개를 들어 자신이 넘어가던 장면을 몇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제대로 날아갔다, 진짜. 아예 반월을 휙 그리며 교본 올림픽에 나가도 될 정도로 아름답게 날아갔다.
그래서 휘익, 짧게 휘파람을 불기까지 했다.
알레코는 악수와 함께, 포옹할 생각인지 팔을 넓게 펼쳤다. 지영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가볍게 포옹을 해주자, 알레코는 지영에게 파이팅. 응원을 해줬다. 그러곤 쿨하게 퇴장하셨다.
경기장 밖으로 인사하고 나오자,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린 몸에서 통증을 올려보내기 시작했다. 발목 부상은 생각도 안 하고 막판에 그런 무식하게 기술을 걸었으니, 괜찮기를 바라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고생했다! 발목은? 지금 별로지?”
“네, 압박 좀 더 해야겠어요.”
“그래, 얼른 가자!”
“잠깐만요, 경기 보고요.”
“괜찮겠어?”
“네.”
호들갑 떠는 김재정 코치를 말리고, 지영은 대기장 쪽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먼저 대기하고 있던 미야모토 신지가 지영을 보더니 시원하게 웃었다. 그건 만족의 미소였다. 결승전 매치가 성사되었음에 만족하는, 그런 미소였다.
지영은 결승에 올라갔고, 본인은 아직 준결승이다.
그런데도 그는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지영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야모토 신지와 준결승에서 붙는 브라질의 가브리엘 팔카오는 확실히 그렇게 만만한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지를 위협할 정도의 실력이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 지영의 생각처럼, 승자 준결승 B는 일방적이었다. 신지와 가브리엘 팔카오의 실력은 최소 두세 단계 이상 났다. 팔카오는 대진을 잘 붙었다. 가장 약체라 평가받던 선수들이 신기하게도 그쪽에 다 몰려 있었고, 팔카오는 그 안에서 살아남아 준결승까지 왔지만, 그의 연승은 신지에게 끝날 확률이 높았다.
와자-리!
시작과 동시에 업어치기 절반.
30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절반을 땄고, 그리고 3분쯤 지났을 때 팔카오는 지도를 두 개나 받았다.
경기는 사실상 기울었다.
그리고 그대로 시간은 종료됐다.
신지는 굳이 팔카오를 한판으로 끝내지 않았다. 지영은 왜 그랬는지 바로 알았다.
‘몸 푼 거지.’
준결승 상대를 몸풀기 상대로 쓴 거다. 3회전에서, 준결승까지 시간이 꽤 비었으니 예열을 다시 하느라 굳이 4분 게임을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될 정도로 실력의 격차가 컸다.
이변 없이, 결국 두 선수가 결승전에 오르면서 빅매치가 성사됐다.
한일전.
한국인은 뒤져도 질 수 없는 경기.
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역적이 되는.
단두대 매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