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59화
359화. 함부르크 올림픽(5)
하지메!
영국 주심의 외침에 데니스 비에루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빛냈다. 그러곤 천천히 이성진을 압박해왔다. 그런 상대의 전진을 이성진은 가볍게 제자리서 몇 번 뛰더니, 자세를 낮추며 받았다.
이성진의 기본 자세는 오른쪽이다.
데니스 비에루도 기본은 오른쪽인데, 그는 자세를 바꿨다.
왼쪽으로.
그에 지영은 몸을 세워 자세를 다시 확인했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했다.
‘주 자세로 안 선다고?’
올림픽 결승전에, 지금까지 갈고 닦은 기반을 버렸다고? 지영은 상체를 조금 앞으로 빼서 데니스 비에루의 자세를 자세히 살폈다. 전형적인 왼쪽 틀어잡기 자세다. 상체를 살짝 숙인 게 지영의 자세와도 매우 흡사했다.
이건 도박 수였다.
지영처럼 올라운더는 오른쪽 왼쪽 다 안정감을 갖추지만, 데니스 비에루와 같은 올라운더는 오른쪽 자세 ‘한정’이다. 이성진과 그의 영상을 전부 확인했는데, 허를 찌르는 깜짝 기술을 들어갈 때를 빼면 모든 자세가 오른쪽이었다.
그런데 지금, 올림픽 결승이라는 무대에서 그는 자세를 바꿨다.
한평생 오른쪽만 수련한 선수가 갑자기 주 자세를 왼쪽으로 바꾼다? 이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불가능한 건 아닌데…….
‘기술을 걸 때 스텝을 한 번은 더 밟아야 하지.’
그 자체가 시간을 끄는 거다. 스텝 한 번을 더 밟는 순간이면 제대로 걸릴 것도 상대가 방어하거나 도망가서 무위로 돌아간다. 게다가 역으로 몸을 트는 동안 되치기까지 생각하면, 사실상 왼쪽 자세에서 오른쪽 기술을 거는 건 미친 짓이었다.
솔직히 그건…….
‘나도 안 해.’
카운터를 치기 위한 게 아니라면 양쪽을 모두 주력으로 사용 가능한 지영도 하지 않는 짓이다. 그러니 데니스 비에루의 저 자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기색은 시합 중인 이성진의 얼굴에도 드러났다.
-아, 이성진 선수.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갸웃하는데요? 시합 중에 저럴 정도면 뭔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거겠지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배영우 캐스터의 말에, 해설 조인선 교수가 답했다.
-아마, 자세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자세요?
-네. 데니스 비에루 선수의 정보를 보니까 주력이 오른쪽이라고 나오네요. 제가 미리 살펴본 바로도 거의 모든 경기를 오른 자세로 풀어나갔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일 시합하는 강지영 선수의 자세와 흡사한 왼쪽이거든요?
-아, 그러네요. 살짝 상체를 숙인 게, 강지영 선수와 흡사해 보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평생 오른손으로 밥을 떠먹다가 왼손으로 떠먹으라고 하면, 그게 편할까요?
-어…… 불편하겠죠?
-네, 불편할 겁니다. 유도 기술도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빠르면 열 살 이후, 늦어도 열서넛, 다섯이나 여섯엔 시작했을 테니 사실 기술 자체는 양쪽으로 다들 할 줄 알아요. 하지만 문제는 딱 할 줄만 안다는 거예요. 가만히 서 있는 상대를 대상으로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상대한테 거는 게 아니잖아요?
-음, 굳이 부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거죠?
-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렇게 선 의도가 있을 게 분명한데, 이성진 선수가 그걸 바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아요.
-어, 그럼 교수님은 파악하셨습니까?
-아니요.
-네?
-제가 사람 속을 읽는 초능력자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바로 알아요?
-……네, 심판, 그쳐를 선언합니다.
가만히 두 사람의 중계를 들은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마지막까지 말이다.
지영도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이성진도 마찬가지라서, 상대적으로 방어적으로 경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도! 시도!
반칙은 둘에게 같이 들어갔다.
데니스 비에루는 팔을 슬쩍 들며 왜 자기가 지도인지를 살짝 어필했지만, 그 이상은 나가지 않았다. 그의 어필은 정당했다. 지영은 이번에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좀 더 소극적으로 나간 건 이성진이었다.
상대 자세에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이성진은 분명 반칙을 혼자 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심판은 반칙을 같이 줬다.
그 순간.
‘혹시 이건가?’
생각이 많은 이성진을 생각하게 하여, 소극적으로 풀어나가게 한 다음 반칙을 받게 하는? 원하는 바는 하나다.
“나보다 상대가 반칙을 하나 더 받게 하는 것.”
반칙 하나의 이점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컸다.
특히 시합 운영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가 이 이점을 차지하면, 상대는 시합을 진짜 어렵게 끌어갈 수밖에 없었다.
‘데니스 비에루는…… 그래. 운영도 나쁘지 않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지영은 수긍한 표정이 아니었다. 운영이 나쁘지 않은 정도지, 그렇다고 지영처럼 운영 유도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데니스 비에루의 이전 경기를 살펴보면 체력에 기술 유도가 베이스지, 절대 반칙 하나를 위해 스텝과 잡기까지 고심해서 경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뜸 운영 유도를 하겠다고 나왔다.
시합은 이제 1분 정도 지났다. 이 1분은 탐색전이었다. 지영은 1분쯤 지났을 때 이성진의 표정이 한결 차분해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아마도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저렇게 무리한 자세로 섰는지.
그렇게 자세를 바꿔서 한칼을 어디다가 숨겼는지 또한 파악이 안 됐을 거다. 그걸 파악하기엔 1분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밖에서 지켜보는 입장이면 생각할 겨를이 있지만, 시합 중에 거기까지 추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성진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이런 이성진의 선택은 정답이었다. 결승전이다. 안 그래도 초근접거리에서 붙는 종목이라, 서로 도복을 잡는 순간부터는 머릿속에서 계산적인 전술을 순간적으로 짜내기도 어렵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걸 계속 붙들고 고민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니 머리를 비우고, 스스로 짜 놓은 전략을 따라가는 게 맞았다.
선수의 마음가짐이 그렇게 변하자, 경기는 결승전다워졌다. 좀 더 스피디했고, 박진감이 넘쳤다.
잡기 싸움.
일반인의 눈엔 참 무의미한 손짓처럼 보이지만, 저 잡기 싸움은 유도의 시작이다. 먼저 잡는 것.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것. 전쟁에 비교하면 고지전이다. 하나의 고지를 두고 먼저 올라가서, 아래를 향해 기관총의 총구를 돌리는 게, 잡기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약이 심하긴 하다만, 실제로 먼저 잡은 선수에게 상황이 지독히 유리해진다.
그래서 도쿄 올림픽 당시에 한국 선수들의 기술 유도를 막으려고 그렇게들 잡기 싸움을 걸어온 거다. 그들이 선보인 잡기 전술의 기본 뼈대는 두 개였다.
공격적으로, 끊어라.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분류하면 딱 그랬다. 요는 그게 전부였다. 계속 끊기만 하면 수비적으로 보이니 몸은 앞으로 나아가며, 상대를 힘으로 조금씩 밀어내는 압박감을 주면서 잡기 싸움을 이어가고, 잡히면 끊는다.
그럼 심판은 선수가 앞으로 나가며 싸움을 걸고, 잡히면 끊으니 그 자체를 공격적인 모습으로 본다.
몇몇 선수는, 거기서 아예 끝났다.
기술 한번 제대로 걸어보지 못하고.
그만큼 잡기 싸움 자체에서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더러 나오기도 했다.
그렇기에 잡기 싸움은 유도의, 아니, 유도 경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지영은 입술을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안 그래도 몸에 수분이 없어서 마른 입술이라, 혀로 침을 묻혀도 금방 다시 말라 뻑뻑함만 더 해졌다.
초조해졌다.
데니스 비에루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잡기 싸움하면 이성진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 잡기 전략은 한국 선수를 만나면 첫 번째로 써먹는다. 이성진에게는 얼마나 많이 썼을까? 업어치기에 걸리면 날아가니, 당연히 이 악물고 잡기를 걸어왔다.
하지만 그 모든 싸움에서 승자는 이성진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이성진의 체급에서 피지컬이 괴수급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장이 무려 177 정도나 된다. 젓가락처럼 마른 몸이 아니라서 근력도 상당했다. 그렇기에 잡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피지컬이 동등, 혹은 앞서니 상대를 밀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데니스 비에루는 그런 이성진의 피지컬을 압도했다.
따라서.
이성진은 잡기에서 조금씩 밀렸다. 근접에서 머리를 맞대기도 하면서 빠르게 손속을 교환하던 어느 순간.
맛테!
심판은 다시 그쳐를 선언했다.
그리고 시도, 시도. 지도가 두 개째 들어갔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서로 기술은 한 번도 없었고, 서로 지도를 두 개씩 받았다.
누구에게도 유리한 상황은 아니다.
단순하게 점수만 봤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영은 지금 이 상황이 데니스 비에루에게 유리하다는 걸 알았다.
“성진아 이대로 가면 진다…….”
직감으로 깨달았다.
이거다.
데니스 비에루가 노린 게.
기술 자체를 봉했고, 잡기 싸움으로 몰고 가서 상황을 지도 2개로 끌고 간다. 왜? 여기서부터는 정말 경험과 실력이 최고조로 필요한 순간이 된다. 까닥 실수 한 번이면 게임은 그대로 터진다.
예를 들어.
이성진이 조급함을 느껴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업어치기를 들어가려는데, 데니스 비에루가 그걸 눈치채고 강하게 도복을 끊어내면?
이성진은 아주 높은 확률로 위장 공격으로 지도를 받게 될 거다.
그럼 지도가 3개가 되고, 그대로 경기는 펑. 터진다. 지영은 이쯤에서 데니스 비에루의 전략을 깨달았다.
써먹지도 않을 자세로 서고, 잡기 싸움에 사활을 걸고 나서는 것은 전부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그냥, 단방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거지…….’
잘 짰다.
지영은 데니스 비에루 전략을 정말 잘 짰다는 걸 인정했다. 이성진이 애매함 때문에, 상대의 노림수를 파악하지 못해 기술을 자제하는 동안 벌써 지도 두 개를 받고 이 상황이 됐으니, 여기까진 데니스의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
반대로 이성진은 여기까진 제대로 말렸다.
이성진이 이 상황을 깨닫지 못했으면, 승기는 데니스 비에루에게 있었다. 지영은 이성진이 당연히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면 했다. 황금세대 경기의 포문을 화려하게 금빛으로 열어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래서 경기를 냉정하게 봐야 했다.
‘관중석이랑 경기장 거리가 가까웠으면 가서 알려줬을 텐데…….’
그것도 힘들다.
거리가 상당해서 악을 써도 들리지 않을 거리였다. 게다가 팬들의 환호성 때문에 지영이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속이 탔다.
아주 오랜만에 현기증이 핑 돌 정도였다. 지켜보고 있는 게 조금은 힘들 정도로, 이성진은 현재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영은 이성진을 믿었다.
‘금메달 맡겨놨다며? 그거 오늘 찾을 거라며?’
그렇게 자신한테 설레발도 쳐놨다.
지영이 아는 이성진은 허풍쟁이가 아니었다. 특히 유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어쩌면, 지영보다도 더 말이다. 그러니 결코 이렇게 무기력하게 패배하진 않을 것이다. 지영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경기장 위 스크린으로 보이는 이성진은 눈빛이 아직 살아 있었다.
‘답답한 표정이 아니야.’
반사적으로 눈빛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지영은 친구의 단단한 표정을 보곤, 저도 모르게 웃었다. 시합이 풀리지 않으면 당연히 답답한 표정을 짓게 된다. 그건 지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친구는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아주 미약하지만, 웃고 있다.
시니컬함 한 스푼이 깃든, 악당 같은 미소. 그건 아주 미약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사는 지영에게는 보였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보였을 거다. 이성진은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가 지금까지 인내하며 기다렸듯이,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듯이, 이성진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자신의 경기와는 아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는데도, 그 답답함을 참고 인내하며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성진은 여전히 인내하지만, 데니스는 인내를 풀었다.
지도가 2개다.
이제 조금만 밀어붙여서 상대를 수세로 몰아넣으면 되는 거다. 한 번. 기회를 한 번 더 준다고 쳐도 한 번 더. 많아야 2번이다. 지금까지 비축한 체력으로 두 번만 몰아치면…… 꿈에도 그리던 금메달을 따는 거다.
우승.
올림픽 우승이라는 영예.
그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래서 데니스 비에루는 전신에 힘을 바짝 주고, 강하게 몰아쳤다.
아니, 치려고 했다.
스-악.
뻗은 팔의 소매를 슬쩍 말아쥔 이성진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진.
툭, 겨드랑이 뒤쪽으로 뭐가 툭 치이는 느낌이 나면서 세상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깎여 내려갔다.
쿵!
이어서 천장이 보였다.
서서 외깃 말아업어치기.
가,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