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42화
342화. 파리 오픈(10)
화아악.
마치 빨간 불꽃이 유도 소년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의지를 굳게 다진 마사루는 특별한 느낌을 마주 선 지영에게 선사했다.
예전에 합동 훈련 때 보았던 마사루와는 기질 자체가 달랐다.
그때는 그냥 순박한 유도 소년이었다.
‘힘이 장사라는 반전미가 있는.’
그런데 지금은?
뭔가, 철인 같은 느낌이 났다. 고요하면서도, 어떤 경지에 오른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사람에게 색이 있다면 마사루는 지영이나 신지와는 확실히 다른 색이었다. 신지나 지영은 색이 비슷하다.
새파란 색.
날카롭고, 예리한 색.
각자의 유도 스타일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그런 느낌이다.
신지는 일본 유도 특유의 거만함이 없었다.
보통 흔히 그걸 도사 유도라고 하는데, 신지는 그런 느낌보단 마치 스나이퍼 같은 느낌이 강했다. 기술 하나하나가 매우 예리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냐면 신지가 나쁜 마음을 먹은, 못된 선수가 아니라는 점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냐고? 신지가 작정했다면 어디 하나 분지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좀 더 독하게 마음먹었으면 선수 생활 은퇴까지 시키고도 남았다.
그 정도로 신지의 기술은 하나하나가 예리했다.
빗당겨치기를 걸더라도, 일자로 쭉! 들어가는 선이 유려하고 부드럽기보단 예리하고 날카롭단 느낌이 훨씬 강하게 나는 선수였다.
지영도 비슷했다.
애초에 지영은 되치기. 즉, 카운터 스타일을 갖췄기 때문에 결은 거의 흡사했다. 카운터라는 것 자체가, 기술의 예리함이 없으면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두 선수의 색은, 아주 새파란 색이다.
그럼 마사루는?
붉은색이다.
왜 있지 않나.
일본 만화에서 주인공의 열혈, 열정, 정열적인 느낌을 상징하는 붉은색 불꽃 말이다.
마사루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주 정열적이지만, 고집스럽고, 정의를 사랑하는 왜 그런 전형적인 주인공 느낌. 그러나 그런 주인공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갔다.
‘일본은 사랑할지도 모르지, 그런 주인공을.’
바보 같지만, 그렇기에 매력적인.
정의를 울부짖으나 그 정의의 약점 때문에 고뇌하고, 그 고뇌를 이겨내고 성장하는 뭐 그런 주인공.
그런 주인공은 일본에서나 먹히는 거지, 세계적인 흐름을 보았을 땐 아니었다.
지영은 그런 주인공 스타일과 정확히 역행하는 편이었다. 좋은 일을 많이 하지만, 그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거였다. 그래서 마사루는 지영과 그만큼 색이 달라져 있었다.
심판 입장이 늦었다.
저렇게까지 달아오른 유도 소년의 에너지는 지금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건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심판 판정에 문제가 있었던지, 앞에서 소란이 일었다.
영어로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한 심판이 자기가 들어가겠다고 우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가 봐도 그는 말도 안 되는 걸 우기고 있었다.
“당신은 일본계 미국인이잖소! 안 됩니다!”
“아니, 일본계가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미국인인데!”
“그래도 안 돼요! 그리고 심판 배정은 이미 끝났는데 왜 이렇게 생떼를 부립니까!”
아하.
또 장난질을 치려고 했던 거구나.
하지만 심판위에서는 심판 변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본래 배정되었다는 프랑스의 여성 심판이 들어왔다.
“후우…….”
심판이 서자, 마사루의 긴 호흡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다듬고, 시합에 제대로 집중한 느낌을 지영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인사하고 입장.
다시 인사하고, 한 걸음 앞으로.
하지메!
긴장했는지 음이 살짝 나간 심판의 하지메 사인에 맞춰, 합! 짧고 굵게 기합을 넣은 마사루가 다부진 자세로 다가왔다. 압박감이 상당하다. 마사루의 신장은 크지 않았다. 73 선수지만, 66 선수의 평균과 비슷할 정도였다.
그러니 신장 자체는 160 중후반이다. 지영과는 거의 10㎝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러니 지영이 기세나 잡기 면에서 유리할 것 같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역시 힘이 진짜…… 장난 아니네.’
죽여준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딱 잡는 순간 진짜 ‘신력’이 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근력이었다. 지영은 세계대회를 다니며 유럽, 중앙아시아, 동유럽 쪽 선수들과 붙으며 타고난 힘이라는 게 뭔지, 힘이 강하다는 게 뭔지 겪어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 잡은 마사루를 넘어서진 못했다.
체격이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족팡매를 찾는 배우처럼 몸집이 거대한 것도 아닌데 이 힘은 진짜…… 믿기지 않는 레벨이었다.
그러나 힘이 그렇게 좋다고, 무조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힘이 좋은 게 장땡이었다면, 유도라는 종목은 사라졌을 것이다. 아시아권은 웬만해서는 유럽권의 피지컬을 넘어설 수 없었다.
가끔 탈아시아급 피지컬이 나와도, 그렇게 나와야 겨우 유럽에서 상위권 피지컬과 겨우 비벼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걸 생각하면 마사루는, 이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런 힘을 가줬음에도, 마사루는 지영에게 승기를 잡지 못했다. 유도는 유능제강이 적용되는 스포츠의 극치였다.
거기다가 강지영이란 선수는 애초에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카운터의 초고수다.
그러니 마사루는 본인의 힘이 앞서고 있다는 걸 알아도 그 힘을 적극 이용하지 못했다.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그걸 받아서 카운터, 힘으로 당기면 그대로 끌려가면서 카운터, 유도 기술은 어느 쪽으로도 힘을 쓰더라도 그에 맞춰 기술을 걸 수 있게끔 모든 기술이 진화한 스포츠였다.
그래서 유럽권의 선수들이 유도를 제패하지 못했다.
도쿄 올림픽에서는 오히려 피지컬도 아래인 일본 선수에게 탈탈, 영혼까지 털렸었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도 있지만, 제압할 수 없는 스포츠가 유도인 거다.
마사루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힘을 잘못 쓰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압도적인 힘으로도 지영을 몰아칠 수 없었다. 특히 상대가 카운터의 천재라는 걸 아는 이상, 자신의 힘은 오히려 독으로 작용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마사루의 기세는 아직 죽지 않았으나, 조금씩 답답함을 느끼는 눈빛이 됐다.
스포츠계에, 특히 투기 종목엔 아주 유명한 명언이 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 아가리에 한 대 처맞기 전까지는.
마이클 타이슨 어록 중 하나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자신을 상대하러 올라오기 전까지 이렇게, 저렇게, 계획을 아주 많이 세우고 오긴 하지만 한 대 팍 맞으면 그 계획은 그대로 허물어졌다는 소리였다. 지영을 상대하는 선수들도 보통 그랬다.
다들 어떻게든 카운터나, 카운터 방비를 준비해왔지만, 그걸 성공한 선수는 없었다.
마사루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영은 마사루의 첫 번째 작전이 뭔지, 잡는 순간 감이 왔다.
‘힘으로 내 이동을 봉쇄하는 것…….’
지영은 많이 움직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같이 잡고 서 있으면 설렁설렁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만큼 쓸데없이 힘을 빼는 걸 피하는 편이었다. 애초에 잡기 싸움을 안 하는 것 자체가 거기에 체력을 빼기 싫어서였다.
마사루는 그런 지영의 스타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지영의 스타일은 전 세계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영에게 특정 스타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밀면 밀려주고, 끌면 끌려주고, 상대의 스타일에 맞춰서 대응하는 게 기가 막힌, 그런 선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맞는 말이었다.
지영은 상대에 맞춘다. 그리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마사루는 힘으로 지영을 봉쇄해 놓으려고 했다. 이 상태에서 지영이 힘을 억지로 주며 저항하면, 체력은 지영만 쑥쑥 빠져나간다. 이걸 모르지 않는 지영은 탁! 소리 나게 도복을 끊어냈다. 그리고 잡기 싸움을 시작했다.
유리한 자세.
혹은.
유리한 잡기.
‘그래야 저 힘에 최대한 버틸 수 있다.’
안에서 밖으로 힘을 주는 것보다, 아래에서 위로 힘을 주는 것보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저항하기 쉽다. 그래서 지영은 도복 가슴 깃은 줘도, 밖으로는 절대 주지 않았다. 특히 어깨 깃 같은 경우는 아예 잡히는 순간 뜯어냈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쭉, 밀어내며 뜯으면 거기엔 저항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 이어진 잡기 싸움.
서로 누가 우위도 점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심판은 그쳐를 선언했다. 바로 지도? 성격에 따라 경고성 그쳐를 하는 심판도 있지만, 이 심판은 곧장 지도를 줬다. 그래도 다행인 건, 서로 같이 받았다는 점이었다.
지영이 조금 수비적으로 하긴 했는데, 혼자만 받았다면 경기 운용 판을 새로 짰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도는 같이 들어왔다. 그러니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마사루는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
다부진 표정, 눈빛, 자세.
그 삼박자를 전신에 두르고 하지메 사인에 맞춰 곧장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잡기 싸움. 지영이 잡기 싸움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잡기 싸움은 힘이 강하게 파고들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잡기는 타고나야 했다. 잡기 자체가 상대의 수를 읽는 것도 읽는 거지만. 잡고 움직이는 것, 뜯어내는 것, 이게 마치 복싱의 위빙과 비슷해서 몸에 완전히 익혀놓을 정도로 연습이 필요하기도 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복싱의 원투와 비슷한 느낌으로 손을 뻗는 건 일종의 버릇이었다. 가슴, 소매, 툭툭 뻗어서 잡기를 시도하고 실패하면 즉시 손을 회수해 상대의 손을 역으로 쳐내고.
현대의 잡기는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이걸 지영은 싫어했지만, 마사루 같은 상대는 달랐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포지션만 고집했다. 다행이라면, 지영의 신장과 리치가 마사루를 압도한다는 점이었다.
뻗고, 쳐내고, 반걸음 물러나는 척하다가 슬쩍 들어가 다시 잡고. 지영이 노리는 깃은 가슴 깃이었다. 이걸 업어치기 선수처럼 안쪽이 아닌, 밖에서 잡기를 원했다. 신장 차이가 나서 안으로 잡는 건 오히려 독이 된다. 잘못하면 밖에서 안으로 찍어 눌러, 한쪽 팔 자체가 봉인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언제든 놓고 물러날 수 있는 바깥쪽으로 잡아야 했다. 지영은 여기에 고집을 부렸다.
절대 주지 않으려고 하자, 마사루도 눈치챘다.
일종의 분수령이다.
한국 선수들의 기술이 그렇게 좋은 데도, 기술을 걸지 못하는 건 그걸 아는 상대가 반칙을 받을 각오를 해가면서까지 철저하게 잡기 싸움을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황은 딱 그것과 비슷했다.
다만, 거꾸로였다.
마사루는 기술 좋은 한국 선수.
지영은 잡기에 고집하는 상대 선수.
맛테!
심판이 다시 그쳐를 선언했다. 이런 경우 지영이 수세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지영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저 마사루가 가슴 깃을 잡으면 밖으로 잡으려고 했고, 마사루는 그걸 주지 않으려고 쳐내거나 물러났다.
서로가 노림수를 읽은 상태라 일진일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심판은 한 차례 눈빛으로 경고를 준 다음, 다시 경기를 시작시켰다.
하지메!
점수는 서로 없었고, 남은 시간은 2분.
한순간 실수하면 그대로 점수를 뺏길 가능성이 컸다. 힘이 너무 좋으니 제대로 잡히면 그냥 뽑아버릴 테니까 말이다. 지영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잡기를 하면서도 거리는 매우 충분하게 뒀다.
지영은 기다렸다.
‘급할 필요는 없으니까…….’
점수는 어차피 같았다.
서로 누가 유리하거나, 불리하지도 않았다.
프랑스 심판은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주고 있었고, 덕을 보진 못해도 해를 입지도 않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비슷하지만, 지영에게 유리한 게 있었다.
아니, 유리하기보단 좀 더 앞서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경험이었다.
‘첫 세계대회.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기. 남은 시간은 별로 없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것까지 합쳐지면…….’
과연, 끝까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영은 평정심 유지가 가능했다. 지영은 신지와 20분 가까이 시합해본 적도 있었다. 그 20분간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했고, 결국 승리를 따냈던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유수의 대회에서 이미 별의별 선수를 다 만나보며, 경험을 쌓았다.
그와는 반대로 마사루는, 처음이었다.
첫 세계대회.
그것만 해도 긴장감이 올라올 거고, 부담도 생길 거다. 특히 자신이 계획한 대로 경기가 흘러가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압박으로 다가올 거다.
‘그렇지, 마사루?’
그걸 모두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천재성이 과연 마사루에게 있었을까?
아니, 없었다.
있었다면 일본은 차세대 천재로 마사루와 신지를 동시에 키웠을 거다. 지금처럼 땜빵으로 내놓는 게 아니라…….
툭.
후욱. 후욱.
3분이 지났고, 심판은 그쳐를 선언했다.
시도! 시도!
역시 지도가 동시에 들어왔다.
마사루는 지도를 받자마자 심판을 향해 꾸벅, 절도와 예의가 서린 인사를 하곤 지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사이 지영은 이미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메!
사인이 떨어지는 순간 지영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쭉 뻗어 나갔다. 그리고 덮치듯이, 잡기 싸움을 시도했다.
지도 2개다.
긴장으로 호흡 조절에 실패한 마사루를, 지영은 벼랑 끝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