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25화
325화. 포드의 운명(8)
세인트 클레어(Lake St. Clair)호는 미국 미시간주와 캐나다 온타리오주 사이에 있는 호수로 디트로이트의 북동쪽 10㎞쯤 가면 나온다. 호수가 시작되는 부분은 빈말로도 캠핑하기 좋은 조건은 아니지만, 거대한 땅덩이를 가진 미국답게 안으로 쭉쭉 들어가면 갈수록 풍경은 절경이 된다.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잠에 지쳐 틀어놓은 TV에서 나온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낚시하는 장소와 매우 흡사한 곳도 있었다.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한지, 디트로이트를 빠져나가 선행 차량의 안내를 받으며 달리던 지영과 친구들이 가장 먼저 차를 세운 곳은 그런 강가였다.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고, 자갈밭이 펼쳐진 곳. 연어가 펄떡이며 되돌아갈 것 같은 곳.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국은 진짜 뭐든 더럽게 크구나? 하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곳.
그리고 더 가슴이 웅장해지는 사실은, 이 거대한 강줄기와 자갈밭, 앞뒤로 산을 포함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감도 안 잡히는 땅이 개인소유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걸 제작진은 기가 막히게 알아내 땅 주인에게 연락해 촬영 허가를 받아냈다.
지영이 차에서 내려 강을 보며 감탄하는 고작, 10분 만에 말이다.
제시카 감독이 친구들과 말문이 막힌 채 강을 그냥 바라보는 중인 지영에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오늘은 여기서 할까요? 디트로이트랑 멀지도 않고, 저 뒤에 오두막? 저녁에 추우면 저기서 쉬어도 될 것 같은데. 참, 땅 주인에게도 허락 맡았어요.”
“벌써요?”
“후후, 지영 씨 눈을 보니까 여기가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먼저 좀 알아봤죠. 저기 내려오는 입구에 팻말 있는데 거기 주인댁 연락처도 있었고요. 음, 그림도 나쁘지 않네요. 포드는 전형적인 미국인 정서의 차량이죠. 그런데 이곳 지형도 전형적인 미국의 강이고요. 아,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는 혹시 봤나요? 지영 씨 태어나기 전에 나온 영화인데 거기 배경이 딱 이렇거든요.”
“우연히도 싱가포르에서 뉴욕으로 오던 비행기에서 봤습니다. 재밌게 봤어요.”
“아? 그럼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네요?”
그런 것 같다.
영화의 배경인 몬태나주의 빅 블랙풋과 이곳의 지형은 매우 흡사했다. 그러니 생각이 많은 이가 와 낚싯대를 던지면 참 죽여줄 것 같았지만, 생각이 굳이 많지 않은 지영이 낚싯대를 던져도 참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뭐든, 포장하기 나름이니 말이다. 지영은 결정하기 전에 친구들에게 마지막 의사를 물어보기로 했다.
“더 멀리 나가지 말고 여기서 할까 하는데, 어때?”
지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이성적인 친구들이지만, 그 이성적인 부분 사이에 감성적인 요소 또한 충만했다. 실로 미국다운 강과 산이 주는 압도적인 감성에 친구들은 제대로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게 또 신기했다.
‘나야 정신연령이 서른도 넘었으니 그렇다 쳐도, 얘네는 이제 스물하나인데……. 이, 감성을 온전히 느끼네?’
본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감성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진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지영만 해도 그랬다. 젊을 적엔 시선조차 주지도 않던 들꽃을 보고 잠시 멈춰 서게 되는 건, 나이를 먹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다. 정말 어느 순간 그냥 꽃이 눈에 들어오고, 그 뒤부터는 꽃에 시선이 가게 되며, 꽃을 보고 웃을 수 있게 된다.
지영 또한 그랬다.
자기가 그랬다고 남들도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자연에 감탄하고, 굴복하는 감성을 저 나이에 가지기는 힘든 법이다. 이런 지영의 생각은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빛에도 담겨 있었다.
신기한 아이들.
동양의 소년들은 다 저런가? 하는 생각들을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일할 시간이었다. 제각각 흩어져 촬영 준비를 시작하자, 그걸 본 지영은 강한결의 옆으로 가 말했다.
“한결아. 난 캠핑 안 다녀봐서, 뭐부터 해? 다들 정신 차려. 우리 놀러 왔지만, 일하러 온 거기도 하잖아.”
“짐부터 내려야지. 성진아, 이제 정신 좀 차릴까?”
“어? 어어! 와, 한참 넋 놓고 봤네. 진짜 죽인다, 여기…….”
지영은 제시카가 자신의 팀을 지휘해 촬영 준비를 시작하자, 친구들을 감성 속에서 끄집어냈다. 짝! 넋을 놨다던 이성진이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강한결의 인솔하에 차에 실어놨던 짐을 하나씩 전부 내렸다. 그걸 내리고 있는데, 제시카 감독이 다가왔다.
“텐트 치는 건, 카메라 돌기 시작하면 해주세요. 그리고 치는 방향도 정해줄 거예요. 구도를 생각해서 텐트를 쳐야 하거든요. 이 정도는 괜찮죠?”
“네, 물론이죠.”
지영이 아무리 내추럴을 외쳤다지만, 카메라 구도까지 무시하고 하고 싶은 대로 막 할 정도로 막 나가는 고집불통은 절대로 아니었다.
“근데 텐트 치는 건 제 친구가 전문이라서요. 설명은 친구한테 해주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지금 불러주시겠어요?”
제시카 감독의 말에 지영은 강한결을 바로 불렀다.
짐을 내리며 흐른 땀을 장갑 낀 손등으로 스윽 훔치며 걸어오는 강한결의 모습은, 음…… 진짜 그냥 영화 같았다.
“……딸이 지영 씨 말고, 저기 저 친구 팬이거든요?”
“네?”
“그런데 왜 스물 넘은 애가, 연예인엔 관심도 없던 애가 갑자기 동양의 배우이자 운동선수를 얼마 전부터 좋아하게 됐는지 이제 알겠네요.”
“아…….”
그럴 수 있다.
강한결은 지영처럼 글로벌하게 팬덤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저번 세계 선수권 때 리더로서 보였던 행동이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때 제시카 감독의 딸도 팬이 된 것 같았다. 딸이 좋아하는 배우가 앞에 서자, 제시카 비즈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한결은 가볍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지영이 친구 강한결입니다.”
“제시카 비즈예요. 촬영감독이고요.”
“네, 안녕하세요.”
인사 뒤에 강한결은 제시카 감독이 설명해준 방향으로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전문가 한 명만 있으면 4인용 텐트? 8인용 텐트? 금방이었다.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자 강한결의 지시 아래,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텐트 설치를 끝냈다.
베이스캠프?
오늘 하루 간 쉴 캠프의 마련은 물론 이제 시작이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재미가 있었다. 예전에 강한결에게 캠핑은 무슨 재미로 가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
‘조용한 맛? 그것 때문에 간다고 했었지, 아마.’
캠핑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공간으로 간다. 서울의 난지 같은 곳이야 워낙에 접근성이 좋아 시끌벅적하지만, 도심을 벗어난 곳에 잡는 게 대부분의 캠핑이었다. 강한결은 그런 곳을 혼자 다녔다. 아버지랑 갈 때도 있지만, 보통은 혼자 가서, 혼자 쉬고 오는 걸 즐겼던 친구였다.
연인이 생긴 이후에도 말이다.
캠프를 적당히 설치하고, 개인 시간이 주어져 지영은 그냥 생각 없이 강가를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도로와 거리도 떨어졌고, 있는 거라곤 자연이 전부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 가끔 고기가 뛰어 첨벙거리는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풀이,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강둑을 따로 거슬러 올라가던 지영이 친구들 낚시 준비를 해주는 강한결을 힐끔 본 뒤 중얼거렸다.
“조용한 맛이라며?”
카메라 두 대가 조용히 따라붙은 대자연의 한복판이다.
그런데 여기라고 자연이라고 소리가 없을까?
죄 있었다.
사방으로, 팔방으로.
그 소리가 조용한 맛과 과연 어울리는 건지, 순수하게 의문을 품었던 지영은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그냥 좋았다.
저 멀리서 낚시 준비를 하는 친구들도 좋고, 자신의 뒤를 거리를 두고 쫓아오는 카메라와 임은진을 비롯한 매니저 팀도 그렇고, 사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 공간에 자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마음이 안정되는 효과도 있었다.
사물에, 자연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강둑이 끝나고, 숲으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나왔다. 오솔길을 걸어, 도로 위로 세운 나무다리를 건너 지영은 홀린 것처럼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또 달랐다.
지친 나의 심신에 달라붙어 피로를 떼어내 가져가는 기분? 몇 년 사이, 너무나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해 정신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게 괜찮아, 다 잘될 거야, 하고 담담하게 말해주는 기분?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에게, 겨우? 고작?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지영은 굳이 이런 방향으로 가자고 했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매우 만족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일단, 제시카의 팀이 그랬다.
* * *
흠.
숲길을 걷다가 잠시 쉬는 지영을 보던 제시카 비즈 감독의 오묘한 한숨에, 같이 따라온 작가가 슬그머니 붙으며 물었다.
“저, 감독님.”
“응?”
“그냥 이렇게 찍기만 해도 돼요?”
“이렇게 하기로 합의한 거잖아. 왜, 이상해?”
“아니요. 그…… 너무 아까운 게 아닌가 싶어서요.”
작가의 말에 제시카 비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막내 작가다. 아직 이쪽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기도 하고, 중요한 건, 이제 일을 시작한 새내기라 욕심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욕심이, 눈앞에 저 거대한 떡밥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강지영이다.
지금 현시점, 미국에서 가장 유명세를 치르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저기 저 평범한 복장의 청년이었다. 제시카는 자신의 모든 커리어 내에서, 강지영과 함께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걸 확신했다. 어차피 가는 길이 다르기도 했기 때문에 어느 중간에서 마주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본인도 욕심이 났다.
내추럴하게 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고, 당연히 자신이 그 내추럴을 세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우가 원한 방향으로, 자신의 입맛대로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포드의 제안을 받고 수락한 뒤, 최대한 저 친구를 자연스럽게 꾸밀 메이크업 도구를 잔뜩 챙겨왔다. 물론 진짜 얼굴에 하는 메이크업 도구가 아니라, 강지영을 내추럴하게 꾸며줄 아이템 들이었다.
배경. 의상, 공간, 행동, 먹는 것, 쉴 때, 차를 탈 때, 하는 말투까지 전부. 그런 아이템 말이다.
그녀가 아무리 자연스러운 다큐멘터리를 전공으로 한다지만, 이 바닥이 손가락 제스처 하나까지 계산된 동네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그 동네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강지영을 보자, 인위적으로 그를 조작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겼다. 누구보다 그게 싫었는데도 말이다.
자신도 그럴진대, 막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강지영과 함께 작품을 했다는 건, 앞으로 막내의 커리어에도 상당히 큰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그 커리어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강지영과 일을 했을 때 본인의 ‘역할’도 중요했다. 작품 안에서 지영의 대사, 행동, 제스처 등을 조작할 수 있는 건 연출인 감독과 작가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 임무를 수행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당연히 엄청났다.
그 욕심.
감추기 쉽지 않은 그 욕망.
탓할 것도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네?”
“나도 너처럼 기획이고 뭐고 던지고 저 친구를 이렇게 조물딱, 저렇게 조물딱 하고 싶었다고.”
“아…… 감독님도요? 근데 그래야 하지 않아요? 지금 너무 무난한데…….”
“에린.”
“네?”
“네가 만져서 나올 인위적인 결과물이랑 쟤가 알아서 행동해서 나올 자연스러운 결과물 중 어떤 게 더 잘 나올까? 어떤 게 반응이 좋을까?”
“그, 그건…….”
에린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이야 작가 본연의 자부심이 있어 당연히 우리가 더 나은 길로 이끌 거다, 라고 생각할 것이고 실제로 반응이야 그쪽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아마 연출한 게 더 낫긴 하겠지. 그러라고 우리 같은 전문가들이 있는 거니까.”
“그죠? 그럼 지금이라도…….”
“그런데 진짜 큰 차이 안 날걸? 그리고 그건 우리가 만져서 그런 게 아니야. 너나 내가 연출과 편집으로 잘 만져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쟤가 대단해서 잘되는 거야.”
“……네?”
“쟤는, 뭘 해도 돼. 당장 나가서 약한 것처럼 춤을 추고 거리를 배회해도 사람들은 열광할걸? 왜 그런지 알아?”
“……강지영이라서?”
“그래. 강지영이라서. 쟤는 지금은 진짜 그냥 뭘 해도 되거든. 그러니까 저렇게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상태로 찍어서, 편집해서 내보내도 충분해.”
“…….”
에린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시카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부탁이니까, 저 친구한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마.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 우리 일은 그냥 찍은 다음에 나중에 편집할 때부터 진짜 시작되는 거니까.”
“……네.”
지금 저 모습이 별로일 수는 있다.
하지만 대자연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처음에 담아 놓고 보면 심심하기만 한 장면이 가득이다. 그러나 편집이라는 마법을 거치면 심심했던 자연이 때론 웅장하고, 때론 비장하고, 때로는 애달파지기도 한다.
단계를 하나 건너뛰고, 제시카 팀의 일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휴가를 즐긴다고 했던 지영은 정말 휴가를 즐겼다.
어쩔 수 없이 스태프들 눈치를 살폈지만, 그들도 대대적으로 준비해 와 잘 쉬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마음 편히 압도적인 미국의 대자연을 즐겼다.
낚시.
모닥불.
바비큐.
맥주.
진심.
웃음.
소년티를 겨우 벗은 청년들의 마법 같은 짧은 하루가 저물고, 다시 다음 날. 디어본으로 돌아온 지영이 향한 곳은 성 마리나 보육원이었다.
본격 휴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