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15화
315화. 세계 선수권(11)
쿠웅!
묵직한 폭탄이었다.
계약금을 전부 기부한다고?
그게 어디 한두 푼인가?
1년 750만 달러면, 한화로 90억에 가까운 돈이었다. 여기서 세금 제하고, 회사와 비율대로 나눠도 수십억이다.
지영은 솔직히.
‘아깝지. 여태껏 지켜온 신념이.’
빌어먹을 개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델을 서야 하는 건 인정했다. 솔직히 포드에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이번 일을 주도한 나탈리 포드가 아니었으면 진짜 꼼짝없이 당했다.
이번 건은, 진짜 거미줄과도 같았다.
뭘 해도 안 좋은 상황으로 흐르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맞고 그냥 넘어갔다? 그럼 폭력에 길드는 방향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그때 참고 넘어가면 다음에 또 누군가가 맞았을 거다. 그럼 지영이 선택한 것처럼 나섰으면? 지금 이 상황이다. 시합 중 난입한 건 확실한 징계 사유고, 애초에 일본유도협회가 돈을 풀었으면 난입이 정당했다고 해도, 징계는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넘어갔어도 다음으로 계속 이어질 게 빤했다. 그러니 몸부림쳐도 피할 수 없는 거미줄 같은 판이었다.
강한결이 진짜 지극히 잘 짜인 판이라는 평을 내렸을 정도다.
그걸 타개할 방법이 솔직히 좀 막막하긴 했다. 지영이 마이크를 들고 그런 얘기를 했을 때, 이 문제가 공론화되어 욕을 퍼대기로 먹겠지만 이미 욕먹는데 익숙한 일유협은 그걸 그냥 감수하고, 어떤 수를 써도 징계는 내렸을 거다.
그럼 승자는 일유협이다.
거긴 뭐, 책임지고 몇 사람 옷 벗으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황금세대는 징계를 먹으면 끝장이다. 당장 이번 올림픽은 무조건 안녕이었다.
그러니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나탈리 포드의 기획이 없었다면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해준 나탈리 포드에게도, 포드사에도 솔직히 감사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신념을 꺾는 건 아까웠다.
지켜온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그냥 이건 이대로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즈 엔터와 포드가 계약서의 법적 검토를 진행하는 동안 지영은 이 신념을 지킬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찾아냈다.
계약은 한다.
그게 저 증거를 공개해 주는 대가니까.
다만, 모델료는 받지 않는다.
소속사 돈까지 건드리는 건 당연히 문제가 있었다. 소속사는 기업이다. 금전적 이윤을 위해 움직인다. 아무리 리치 장세리가 만든 기업이라고 해도, 마이너스로 운영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번 건은 크다.
연간 90억짜리다.
세금 떼고, 비율대로 떼도 회사에는 제법 묵직하게 돌아온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게 하라고? 그건 심각한 월권행위였다. 다만, 자신의 몫은 자신의 마음대로였다. 이 문제로 어머니와는 이미 통화했고, 어머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엄마도 일하고, 아들도 잘 벌잖아. 그러니 아들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머니의 그 말이 큰 힘이 된 지영이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다만 주변에는 얘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발언으로 어? 하고 놀라는 표정이 리얼하게 담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좀 미안하지만, 효과는 죽여줬다.
“어, 저, 그…… 750만 달러의 연간 계약금을 전부 말입니까?”
한 기자의 질문에 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회사의 비율은 회사 거니까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제 몫은 이곳 미국에 전부 기부할 겁니다.”
“……그, 개인의 몫 전부를요? 금액이 상당할 텐데요?”
“네, 그래도요.”
“진짜요?”
리얼리?
“네, 진짜요.”
응, 리얼리.
진짜다. 눈에 보이는 수작이라고? 뭐 법적으로 문제가 됐을 때 정상참작을 위한? 그러면 어떤가. 수십억을 기부하는 건데.
“아, 3년 계약금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전부 이곳에, 두고 갈 거예요.”
“…….”
어제, 종일 딴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거였어?
강한결이 쪽지에 써서 보여준 글을 본 지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씩 웃은 강한결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친구는 이런 큰돈을 포기하는 지영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믿어주고, 지지해줬다.
그에 힘이 더 난 지영이었다.
눈만 깜빡이던 나탈리도, 그제야 지영을 향해 물었다.
“미스터 강. 그, 진짜로 전액 기부할 생각이에요?”
“네.”
“혹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런 건가요?”
나탈리의 질문에 지영은 또 고개를 저었다.
양심의 가책? 지영은 자신이 선량한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올바른 길로 가려고 노력은 하되, 어쩔 수 없으면 진흙탕에도 발을 주저 없이 담글 위인이 자신임을, 아주 잘 알았다.
“나탈리가 저에 관한 조사할 때, 제가 지키던 게 말로 설명해서 이해할 수 있는 신념이었습니까?”
“아니요. 아니었죠. 그래서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간 거고.”
“네, 그렇게까지 하면서 지키던 겁니다. 친구들과 다 같이, 잘 지키고 있던 신념입니다. 이 신념이…… 고작 그딴 인간들의 손에 망가지는 걸,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결국 나는 포드의 광고를 찍지만, 포드의 배려로 충분한 보상을 받지만, 그게 제 주머니로 들어오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적어도 반쪽이지만, 너덜너덜해졌다고 해도 우리가 지키던 신념은 머리 위에 들고 있을 겁니다.”
“…….”
“비록 상처가 많이 난 신념이라고 해도, 내가 품고 지켜낼 겁니다.”
지영의 말은 길었다.
나탈리의 말에 대답한 것도, 한국어가 아니었다. 나탈리가 영어로 물어봤고, 그래서 영어로 차분하게 한 대답이었다. 고로, 앞에 기자들이 죄다 들었고, 동시에 전파를 타고 지켜보던 이들에게 그대로 흘러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집이다.
아집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고집과 아집을 지키기 위한 방도로 인해 누군가는 반드시 도움을 받는다. 기부라는 게 그렇다. 제대로 쓰이기만 하면, 기분 내기 일회성 기부라고 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도움을 받는 게 기부다. 제대로 집행만 되면 말이다.
단돈 오만 원 기부라고 해도, 누군가에겐 라면 한 박스와 쌀로 한동안 연명이 가능해지는 게, 기부라는 거였다.
그런데 지영은 무려, 수십억이다.
거기에 3년의 계약금 전체를 언급했으니, 100억이 넘는 돈일 수도 있었다. 그걸 이곳 미국에다가 기부하겠다는 지영의 말은, 어마어마한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당장 지영과 빅딜을 성사시킨 나탈리 포드만 해도 지영의 말이 믿기지 않았는지, 눈을 끔뻑이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당황한 느낌이 가득했다.
물론 지영은 이것도 노렸다.
솔직히 말하면, 지영이 이렇게 질러버리면 포드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진다.
광고모델과 광고주는 결국 서로 윈윈하는 사이였다.
광고모델은 광고주에게 돈을 받고 자신의 이미지를 빌려주는 거고, 광고주는 돈을 주고 모델의 이미지를 사 자사의 제품이나, 자사의 이미지를 바꾸는 거다.
그러니 결국 서로 윈윈인데, 광고모델이 그 대가로 받은 돈을 사회에 환원해 버리겠다고 선언하면, 돈을 주고 이미지를 산 기업의 입장도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델은 그 대가를 사회에 환원했는데, 기업은 뭐 하냐! 너희들도 해라!
거짓말 같겠지만 저런 얘기가 반드시 나오게 될 것이다. 나탈리는 지영의 얘기를 듣는 즉시, 뒤로 터져 나올 파급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방 신색을 회복했다. 이 정도에 흔들린다면, 로열패밀리로서 포드를 이끌어갈 자격 자체가 없다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신색을 회복했다.
다만, 아직 머릿속에 위기의식이 맹렬히 발동 중이라, 종이 뎅! 뎅! 거리고 있는 중이긴 했다. 지영은 걱정하지 않았다.
‘딱 봐도 똑똑한 사람이니까, 뭐.’
나탈리 포드.
이런 말은 그렇지만, 대외적 행보를 내보일 때 포드가 전면에 세우는 얼굴마담 같은 존재다. 자기는 그런 자리가 싫다고 SNS에 공공연히 떠들지만, 시키면 또 한다. 그것도 열심히. 투덜거리면서도 일은 잘하는, 그런 사람이다.
애초에 남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지영에게 접선하려고 했던 것과 그 결과 진짜 자신에게 닿은 것부터가 이미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한지를 알려주는 증거였다.
“저도 미스터 강의 행보와 동조를 고민해야겠군요. 후후.”
포드가 아닌 자신을 언급한 걸 보면 이걸로 나중에 나올 뒷말을 차단했다. 앞에서는 한다고 했지만, 포드의 입장이 변하면 그땐 포드가 아니라 저, 개인이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고 말을 바꾸면 되니까. 역시 사업하는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리고 그 정도는 눈치 빠삭한 기자들도 다 알아들은 것 같았다.
한 기자가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미국에서도 그럼 한국의 연희 재단처럼 직접 운영할 계획인가요?”
“아니요. 지역 아동센터 같은 곳에 분할 해서 맡길 겁니다. 나머지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겠죠.”
“제대로 자금이 집행될까요?”
기자의 질문에, 지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걸 제가 고민해야 합니까?”
“네?”
“미국이란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단체에 맡길 건데, 제대로 집행이 되는지 안 되는지에 관한 고민을 제가 해야 하냐고요.”
“아…….”
만약 잘못되면, 집행도 제대로 안 하는 단체를 인증해 준 미국 네놈들 탓이다, 라고 돌려 까는 거나 같은 말이었다. 이제 지영이 기관이나 단체에 돈을 보내는 순간부터 철저한 감시의 눈이 뒤따를 거다. 그들이야 죽겠지만 남의 돈으로 복지를 하는 이들은, 그런 시선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게 맞다 생각하는 지영이었다.
이후 질문이 몇 개 더 날아들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여지없이 날아왔다.
“그럼 이제 황금세대의 행보는 어떻게 됩니까? 알아본 바로는 오늘 늦은 저녁이나 내일 이른 아침에 황금세대에 관한 징계위원회가 열린다고 하는데.”
이 질문은 강한결이 받았다.
“그건 법적인 절차를 밟을 겁니다. 징계위원회는 글쎄요. 이걸 보고도 열 수 있다면, 열어보라고 해야죠.”
오늘 기자회견은 아마 전 세계 모든 유도인이 볼 것이다. 그런데 징계위원회에서 황금세대의 징계를 논한다? 그리고 거기에 동조한다? 이것 자체가 일유협과 붙어먹었다고 만천하에 자랑하는 짓과 같았다.
“만약 무시하고 징계위에 회부 된다면요? 그리고 부당한 징계가 들어오면요?”
그래도 그렇게 물어보는 기자가 있었고, 지영이 한 방을 준비해 온 것만큼, 강한결도 그냥 가만히 있다가 나온 건 아니었는지, 회심의 일격을 꺼내 들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있습니까. 은퇴해야죠.”
“네?”
“말도 안 되는 징계를 받아들이라고 하면, 차라리 은퇴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게 뿌리까지 썩어빠진 종목에 굳이, 몸과 마음을 맡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
다들 어버버하는 사이.
강한결은 평소에는 거의 짓지 않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다만 그냥 그렇게 쫓기듯이 은퇴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네요. 그러니 은퇴하는 순간부터 저는 여기 제 친구, 강지영의 인기와 위명을 등에 업고 새로운 종목을 만들 겁니다. 유도와 아주 흡사하지만, 유도는 아닌 종목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유도가 가진 파이를 뜯어 먹을 겁니다. 올림픽? 상관없습니다. 더 챌린지의 성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굳이 유도가 아니어도 되거든요.”
“아…….”
한다면 하는 친구다.
유도와 비슷한 종목? 많다.
가깝게는 브라질리언 주짓수에서 삼보까지.
유도 베이스의 새로운 종목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주짓수 같은 경우는 전 세계에 보급이 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러니 유도와 비슷한 종목을, 세계적인 셀럽인 강지영을 메인모델로 내세워 창단하면 어떻게 될까? 유도만큼의 인기는 못 얻겠지만, 반대로 이제 자라나는 애들은 충분히 흡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 유도계의 축소로 이어질 것이다.
“삼보와 주짓수의 룰 자체를 조금 추가해도 되겠군요. 중요한 건 유도의 인기를 가져오는 거니까요. 그러다가 아예 새로운 종목이 탄생할 수도 있고. 당하는 건 억울하니, 나는 그렇게라도 유도와 척을 질 겁니다.”
대놓고 척을 질 거라는 강한결.
역시, 내 친구지만 스케일이 남다르다.
생각해 보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더 챌린지로 순수종목 유도의 파이를 상당히 뜯어 먹었다. ‘쇼’의 측면에서 더 챌린지는 유도를 완벽하게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건 예선이 끝나고, 얼마 뒤에 본선이 열리는 미국판 더 챌린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초의 나라에서도 충분히 먹히는 엔터테인먼트 쇼다.
강한결은 이걸 극대화해서, 유도 따위는 고리타분한 아저씨 스포츠로 만들어 매장시켜 버리겠다는 강력한 협박이었다.
지영은 이 협박에, 들리는 것 같았다.
으아아! 칙쇼! 빠가야로!
태평양 건너편 열도에서 들려오는 분노에 찬 욕설이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자업자득이다.
“그러게,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어?
“아.”
머릿속의 생각이 입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당황한 지영의 얼굴이, 전 세계로 전파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