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13화
313화. 세계 선수권(9)
비서실장 나탈리.
이제 30대 후반? 40대 초반? 그 정도였다. 임은진과 비슷한 나이였다. 그런데 외국영화에 나오는 비서처럼,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다. 170은 될 것 같은 신장에 딱 맞춰 입은 정장. 그러면서 드러나는 볼륨감은 확실히 무기로 작용할 것 같았다.
대화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그런 무기 말이다.
순진한 친구들이라 솔직히 좀 걱정했는데, 황석과 임효중은 아예 대화에서 빠져버렸다. 둘은 알아서 하라며 병실로 가버렸고, 나탈리의 앞엔 이미 임자가 있는 지영과 강한결이 앉았다.
“이성진 선수의 사고는 참 안타깝습니다. 수술받았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요?”
“네, 잘 끝났습니다. 이틀 후에는 퇴원해도 된다고 하네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국어가 정말 능숙하시네요?”
신기한 건, 나탈리의 한국어가 매우 수준급이란 사실이었다.
“호호, 제가 K-POP의 팬이거든요. 그리고 한국 지사에서 근무한 적도 있답니다. 3년 정도요.”
“아, 그렇군요. 어쩐지. 호호.”
완벽한 한국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방송에 나오는 웬만한 외국인들보다는 훨씬 더 유창했다. 게다가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늘어지지 않고 또박또박한 발음이라 어색해도 의미는 제대로 전달됐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시간을 오래 뺄 수는 없으니. 포드의 비서실에서, 무슨 일로 이곳을 찾으셨을까요?”
임은진이 자세를 바로 하고, 그 말에 나탈리도 자세를 바로 했다.
나탈리는 포드에서 나왔다.
포드의 현 사장 비서실 실장이 나탈리였다. 당장 명함으로만 본다면 말이다. 나탈리는 힐끔, 지영을 본 다음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금일 있었던 강지영 선수의 발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지영이요? 혹시 아까 경기장 앞에서 했던 인터뷰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일본유도협회와 심판과의 뒷거래 증거를 찾아주면 모델을 서겠다는 그 발언이요.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벌써요?”
임은진도 좀 황당하고 놀라웠는지, 말을 살짝 더듬었다.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써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이 말에는 지영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건 잘 놀라지 않는 강한결도 마찬가지였다.
씩.
세 사람의 반응에 세상 화사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 나탈리.
“이런 말이 있죠? 준비된 자만이 행운을 손에 넣는다는.”
진짜 뭐가 있나 보다.
상체를 빼고 있던 강한결이 이번엔 좀 더 앞으로 나오며 그 말을 받았다.
“준비했다는 건…… 미리 조사했었다는 건가요?”
“네.”
와…….
지영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나탈리는 표정을 고치고, 차분하게 다시 브리핑을 이어갔다.
“작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으로 여기, 미스터 강의 명성은 전 세계를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그에 비례해 미스터 강을 캐스팅하고 싶은 움직임이 많았는데, 꼭 지키고 싶은 신념으로 인해 그 모든 걸 거절했어요. 그 결과 몸값은 올라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흠,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로 미스터 강의 이름은 절정을 찍었죠.”
“…….”
“당시 저희 사에서 조사한 바로는 미스터 강의 1년 계약 비용으로 700에서 800만 달러 정도로 측정했었습니다. 이는 디올에서 한해 500만 달러의 광고료를 받았던 샤를리즈 테론을 압도하는 액수였죠. 하지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본사는 판단했습니다.”
“…….”
“다른 것도 아니고, 그 미스터 강의 퍼스트였으니까요.”
그래, 이건 사실 지영도 아는 얘기다.
자신의 제대로 된 위치를 아는 게 좋기에 회사에서 브리핑해 준 내용에도 저 말은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할까?
“한해 800만 달러의 광고 비용은 확실히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스터 강을 잡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지급할 수 있는 액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사와 같은 마음인 기업은 최소 50곳은 넘을 겁니다. 자동차, 패션 브랜드는 그런 마케팅에 돈을 아끼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건 금액이 아닙니다.”
“…….”
“중요한 건 미스터 강의 선택입니다.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본사는 여기에 천착했습니다.”
천착이란 단어를 쓰는 놀라움보다, 저 단어가 제대로 쓰인 게 맞나? 하는 의문보다 금액이 아니라 지영의 선택에 집중했다는 게, 일단은 더 궁금했다.
“신념. 이 신념을 넘어서거나, 아니면 신념을 배제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떤 걸까. 과연 무엇이 있을까. 본사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고, 답을 얻었습니다.”
“아…….”
머리 회전이 빠른 세 사람은 단순에 거기에서 답을 찾았다.
기업에서 보는 강지영은 매우 잡고 싶은 카드다. 일단 모델로만 세우면 무조건 대박이 터진다는 확신이 있는, B급 병맛 코드로 광고를 찍어도 성공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게 바로 강지영이란 모델이었다.
그만큼 잡고 싶은데, 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념으로 인해 거절하는 강지영이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는 이들이 나온 거다. 포드는 그중에서 강지영의 ‘적’에 집중했다.
미스터 강에게 은혜 입히기.
미스터 강이 포드에 은혜를 갚게 만들기.
포드가 캐스팅하는 게 아니라, 강지영이 포드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모델을 하겠다고 찾게 만드는 스토리.
이런 건 없을까? 하고 고민한 결과 답이 나왔다.
강지영의 적은 명료했다.
한국의 소수 언론과 일본 유도 협회.
이 두 집단이 운동선수 강지영과 연예인 강지영의 최대 적이었다. 조금 살펴본 결과 딱 봐도 두 집단에서 강지영을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이 들었을 테고, 그래서 미리 조사에 들어갔다.
안 걸리면 어쩔 수 없지만, 걸리면 대박인 거다.
그런데…… 포드의 입장에서는 그 선택이, 정말 신의 한 수가 됐다. 이런 사고가 터지고, 마이크 앞에 서지 않는 강지영이 직접 양측의 부정한 증거를 찾아주면 모델로 서겠다는 빅딜을 때려버린 거다.
미국까지 온 강지영을 당연히 주시하던 포드는 이 선언에 환호했다.
특히 이번 일을 진두지휘한 나탈리는 지영의 발언을 확인한 즉시 곧장 비행기를 타고 이곳으로 날아왔다.
너무 급하게 움직인 건 아니냐고?
아니다.
“포드는 이미 아까 그 심판과 일본유도협회의 거래 증거를 가지고 있군요.”
강한결이 답을 내놓자, 나탈리는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답했다.
“네. 정확하게 보았어요.”
이미 가지고 있거든.
일본유도협회가 돈으로 지구 몇 바퀴를 돌려 증거를 없애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저희는 돈으로 지워진 길을 돈으로 쫓아갔어요.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당시 보고를 받던 저는 그 끝에 황금의 제국 엘도라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었는데, 그 상상이 현실이 된 것 같아 지금 가슴이 매우 벅차답니다. 아, 물론 미스터 강이 마음을 바꾸지 않아야 하겠지만요. 후후.”
나탈리의 말에 지영은 피식 웃었다.
이건 빼박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포드가 비겁한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기업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강지영을 잡기 위해 노력한 거고, 이 노력의 결과로 나온 대가가, 지금 지영과의 자신감 넘치는 미팅이었다.
“증거는 가지고 있고, 당장 보여드릴 수 있지만, 일단은 저도 그룹에 묶인 사람이라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 보여드릴 수 없는 점,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맛보기로 몇 가지 말씀드린다면, 재팬의 유도협회가 매수한 심판은 오늘 그 사람 하나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돈은 현물로 전달되었고, 이미 사용되었기에 증거를 찾기는 힘들어요. 저희가 가진…… 영상이 아니라면요.”
나탈리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뭔 첩보물로 변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미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건 거절하기 힘든, 아니, 거절하기 불가능해.’
나탈리는 그랬다.
미스터 강이 신념을 배제하는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고.
그 하나의 경우의 수에서 출발한 감시였고, 그런 선택은 최고의 결과를 낳았다. 물론 포드의 입장에서.
그런데 지금 이걸 고개를 저으면 친구들도 문제가 된다.
‘아마 중징계는 피할 수 없을 거야.’
최소의 최소로 잡아도 반년 시합 정지 아닐까? 그리고 반년이면 올림픽은 끝나버린 뒤다. 그렇게 되면 황금세대가 없는 올림픽을 일본이 털어먹을 거고. 그걸 잠깐 상상하자 피꺼솟이란 말이 어떤 느낌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걸 타파하려면, 일본유도협회를 망가트려야 했다.
그리고 심판도 같이 날려야 했다. 황금세대의 오늘 깽판을 매우 정당한 일로 바꾸어야 하고, 황금세대는 무조건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이미 심판과 일본유도협회는 욕을 있는 대로 먹고 있지만, 둘이 거래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발뺌하면 그만이기도 했다. 그럼 심판도 징계, 난입한 황금세대도 징계다.
이렇게 되면?
일본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거다.
그게 그들이 원하는 그림이라고, 지영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걸 깨려면.
“포드의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지영이 툭 던진 질문에, 나탈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회심의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포드는 1년 700만 달러, 3년 계약을 원합니다.”
“1년 700만이요?”
“네. 저희는 남의 약점을 이용하는 양아치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걸 빌미로 공짜 무보수 계약을 맺었다가 그게 밝혀지면 포드의 매출은 수직으로 하락할 겁니다. 로비스트가 합법이긴 해도 그게 약점을 잡고 협박해서 공짜로 일을 부려 먹어도 이해받는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포드는 미스터 강과 정당한 계약을 원합니다. 즉, 포드가 사고 싶은 건 미스터 강의 신념입니다.”
기백이 대단했다.
사실 약점이라면 약점이긴 했다. 질러놓긴 했지만, 포드가 가진 증거가 없으면 빼박, 징계는 피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포드는 그 증거를 이용하긴 했으나, 정당한 거래의 대가로 내놓았다.
그런데 심지어 계약 조건조차 정당했다.
“700만 달러는 좀 약하긴 한데…….”
어?
옆에서 중얼거린 임은진의 말에 놀라서 지영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씩 웃었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대답은 지금 바로 안 드려도 괜찮겠죠? 대신 매우 긍정적인 마음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럼요. 음, 그래도 저는 강지영 씨의 구두 대답이라도 듣기를 원합니다만, 어려울까요?”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는 나탈리. 지영이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지영은 그 눈빛을 외면하지 않았다.
“상의 후에 연락드릴게요. 아, 다음에 오실 때는 계약서를 챙겨오세요.”
“후후, 이미 여기에 있답니다.”
“하하, 준비성이 철저하시네요?”
“물론이죠. 무려, 미스터 강의 신념을 사는 일인데.”
그렇게 답하는 나탈리를 보며 지영은 비서실 실장이라고 적힌 명함은 위장 명함일 게 분명하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비서실에서 뭐 이런 일을 하겠어.’
영화 같은 거 보면 위장 명함 같은 거 뿌리는데, 아마 이것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해 두고 싶습니다. 귀사에서 가지고 있는 증거는 정말 확실한 겁니까? 조사를 해보셨으면 아실 테지만, 일본의 특기가 발뺌입니다. 웬만한 증거는 모함이라고 난리 치면서 버틸 게 분명합니다.”
그때 강한결이 나서서 재차 확인했고, 나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계 단계부터 자금의 흐름까지, 전부 들어 있답니다.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수고로움이 하루 이틀 안에 끝날 리가 없겠죠? 그 전부를 담았어요. 머리부터 뿌리까지. 음성 녹음과 사진, 영상 전부 있으니 안심해도 좋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미국은 로비스트가 합법인 나라랍니다. 이런 나라에서 창업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저력은 결코 깨끗하고 맑고 밝기만 해서 가능한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렇긴 하다.
미국은 로비가 합법인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100년 가까이 살아남으려면, 진정한 의미의 수라장을 거쳤을 게 분명했다. 그런 그룹에서 자신하는 정보. 의심은 가지만 그래도 믿는 게 맞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시다면 계약서에 명시해도 좋습니다. 본사가 가진 증거로 미스터 강을 포함한 황금시대 전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시, 위약금을 모델료의 열 배로 토해낸다는.”
나탈리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지영은 진짜 확실하긴 확실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700만 달러면 거의 90억에 가까운데, 3년이면 270억이다. 그런데 열 배면? 어후, 그 금액은 지영도 아찔해지는 액수였다.
그런데도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걸 보면, 진짜 확실하긴 확실하단 뜻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물론 강한결도 더 이상의 의심은 거뒀다.
“그럼, 마음의 결정이 끝나면 명함의 번호로 연락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 매우 유감이고, 그에 관한 사죄로 이성진 선수의 수술 비용은 저희 포드 측에서 내겠습니다. 이건 나라를 대신한 사죄의 의미라고 봐주세요.”
“음, 아닙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처리할게요. 마음 써주신 걸로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포드 부인.”
“어머.”
아?
일어난 나탈리는 입을 살짝 가리며 놀랐다가, 강한결의 안목에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러곤 한국식 인사로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미팅 룸을 나섰다.
나탈리가 떠난 뒤 임효중과 황석을 부른 강한결은 노트북을 꺼내 화상으로 장세리 대표와도 연결한 뒤에 대화를 나눴다. 임은진의 빠른 설명을 장세리는 단박에 알아들었고, 지영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래? 결정은 당연히 지영이 네가 해야지.
장세리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지영에게 몰렸고, 지영은 굳이 시간 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죠. 계약.”
상대를 반신불수로 만들 기회가 왔는데, 그걸 걷어차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 대답으로 결정은 끝. 몇 시간 뒤 양측의 실무자가 화상으로 만나 계약서를 나눠 든 뒤 법적 검토에 들어갔고,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지영은 계약서에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그 뒤에 넘겨받은 정보를 확인한 뒤에. 포드의 도움으로 현지에서 대규모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건이 벌어지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상대의 숨통을 물어뜯을 카운터 장착을 끝낸 지영과 강한결, 그리고 나탈리 포드와 함께 기자들 앞에 섰다.
그렇게 급하게 기자회견을 연 이유는 일본협회의 입김이 불어 그날 징계위원회가 다음 날 열린다는 얘기를 포드의 도움으로 접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빠르게 황금세대에게 징계를 먹이고 싶었다. 그러니 그걸 안 이상, 이쪽도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상대가 좀 더 축배를 들기를 기다리지 못했고, 그날 모든 법적 책임을 각오한 뒤에, 포드에서 받은 정보를 만천하에 공개하기로 했다.
-일단 이 사람에 주목해 주세요, 이 사람이 이번 사건의 중심인 로비스트 마크 켄고입니다.
나탈리 포드의 말에.
쨍그랑.
축배를 들던 이들의 손에서, 잔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