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06화
306화. 세계 선수권(2)
오랜만에 붙는다.
시합장에서 종종 보고, 연락도 가끔 하고 했지만 실제로 붙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고2 때인가 고3 때인가, 청소년 세계 선수권에서 맞붙었었고, 몇 년이 지나 이제야 다시 매치가 성사됐다. 그 때문인지, 러닝 중 마주친 신지의 눈빛이 아주 독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신지의 그런 정신이 이해가 갔다.
미야모토 신지.
불세출의 천재.
이 둘은 동의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천재를 일본 유도협회는 꼭꼭 숨겼다. 지영과 매치가 성사되지 않게 이리저리 돌리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불세출의 천재인 신지가, 두 번이나 강지영이란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본 협회는 신지와 지영의 맞대결 성사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천재의 자존심에 지대한 타격을 입혔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부모가 협회의 일원이라고 해도, 고지식한 협회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천재는 계속해서 치마폭에 휩싸여 이리저리 굴러다니느라 화가 있는 대로 났다. 그러다 올림픽이 열리는 25년인 지금, 드디어 매치가 성사됐다. 이제는 피할 수 없었다. 일단 둘이 붙어보고, 실력을 서로 확인해야 할 때였다. 그래야 올림픽을 대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맞대결이 성사되자 신지는 그동안 받았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훈련했다. 그 고된 훈련이 신지란 인간을 바꾸어 놓았고, 이를 지영은 마주치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이를 악물고, 혹은 기를 쓰고 자신을 잡으러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저 정도의 천재다. 저런 천재의 자존심은, 자존심은 정말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높았다.
그 상처를 회복할 기회가 왔으니, 저렇게 살벌해진 것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런 신지의 모습에 결과적으로 지영도, 날이 바짝 섰다.
계체를 끝내고, 하루 뒤 시합장에 도착한 지영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무겁다는 걸 느꼈다. 묵직한 느낌. 뭔가 사고가 터지기 직전처럼, 보통은 좀 소란스럽고 선수들끼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가운 인사도 하고 그러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몸을 푸는데도 적막이 가득했다.
끝과 끝에서 서로 몸을 풀고, 대기실로 이동했다.
세계 선수권.
두말할 것도 없이 메이저 대회다.
종목마다 있는 이 선수권 대회는 우승한다고 해서 뭐 그리 특별한 건 없지만, 그래도 선수들에게 상당한 명성이 부여된다. 올림픽 몇 연패, 세계 선수권 몇 연패 등등, 이런 건 상당한 명예였다.
유도로만 예를 들었을 때,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의 바로 뒤의 큰 대회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건가?’
반드시 우승하고 싶은 대회이기 때문에?
지영은 몸을 풀다 말고 주변을 둘러봤다. 선수들 면면이 화려했다. 진짜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 전부가 출전했다. 세계 선수권이 아시아권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도 손에 꼽는 메이저 대회이기 때문이었다.
그 선수들이 전부 지영이 몸을 푸는 걸 보고 있었다.
눈빛에 담긴 감정은 다분히 호전적인 것도 있었고, 신기한 동물 보듯 하는 눈빛도 있었다.
“여, 지영아. 너 겁나 환영해 주는데?”
오늘 같이 시합을 뛰는 이성진의 말에 지영은 피식 웃었다. 환영은 환영인데, 그게 좋은 의미의 환영은 아니라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물론 이성진도 알고 있었다. 이런 선수들의 반응이 낯선 건 아니었다.
국내대회에만 나가도 지영은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죽어라 운동만 하는 선수들이 태반이다.
아니, 전부라고 봐도 좋았다. 정말 운동에 뜻을 두었다면 그 무엇보다 운동이 우선시됐다. 그런데 그렇게 그 무엇보다 운동을 우선해도 정상에 서지 못하는 사람이 90%가 넘었다. 노력? 노력은 그 선수를 빛나게 해주지만, 그 빛남이 정상의 실력 때문에 빛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땀 흘리는 노력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하지만, 딱 그 노력만 아름다운 거다.
결과와는 별개로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계는커녕 나라의 정상에 서지도 못하고 뜻을 접는 선수가 다시 90%는 넘는다.
비정한 세계다.
재능과 노력이 90%는 판가름하는.
그런 세계에서 지영은 두 가지를 전부 하면서, 최정상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세계에서.
이는 질투와 시기를 단숨에 끌어당길 만한 요소였다. 배우, 연예인으로 본다면 신기한 존재겠지만, 운동선수로 본다면 진짜 더럽게 재수 없는 인간이란 뜻이었다.
그런 적의가, 오늘은 유난히도 컸다.
당장 같이 몸을 풀고 있는 이성진만 하더라도 방송인인데, 이성진을 향한 시선은 덤덤했다. 그런데 자신은 눈에 불을 켜고 보거나, 막 노려보거나 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몸이나 풀자.”
하지만 지영은 무시했다.
저런 눈빛? 질리게 받아봤다. 그 눈빛을 보내는 게 꺼멓고, 하얗게 변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몸을 풀고 짧은 휴식.
숨이 터져서 그런지 몸은 개운했다.
“컨디션 어때?”
내일 경기인 강한결의 물음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아. 더없이.”
“든든한 대답이네. 그럼, 스타트 잘 끊어주라.”
“오케이.”
친구들은 짧게 응원해 주고 올라갔다.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눈빛만으로도 위로와 격려, 응원이 전부 가능한 사이가 됐다. 딱히 크게 강지영 파이팅! 하고 외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응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됐다는 소리였다.
후우, 후우.
눈을 감고 심호흡으로 시합 전 정신을 다듬기를 잠시, 경기진행요원이 들어와 시합 준비를 알렸다. 똥통 시드에 빠져서 오늘 개체 시합인 지영이었다.
눈을 뜬 지영은 도복을 갖춰 입고, 진행요원의 뒤를 따라갔다.
딸각.
비슷하게 열린 문에서 미야모토 신지도 나왔다. 힐끔, 잠시 마주친 눈빛은 한없이 차갑고, 사나웠다. 정말 기합, 각오가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흔히 말하는 필승의 의지를 넘어선 적의마저 느껴졌다.
물론 신지의 성격상 반칙 같은 걸 할 위인은 아니니, 경기 자체는 걱정할 것 없었다. 중요한 건 저 의지에 밀려서는 안 된다는 것.
지영은 각오를 다시 세웠다.
연승이 깨지는 것도 두렵지 않고, 자신의 패배에 안타까워할 팬들의 마음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경기에서 패배할 수는 있다.
말했듯이 패배는 운동선수에겐 너무나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지영은, 싫었다.
‘반드시 이긴다.’
신지가 잘하는 건 알고 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전 세계 유도인 중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미야모토 신지의 위명, 실력은 아마추어 선수들도 안다. 그리고 그래서 지영은 지기 싫었다. 패배는 언제나 씁쓰름하다. 떨떠름하기도 한 정도를 넘어선 씁쓰름함 때문에 지영은 이 적응되지 않는 패배와 서로 마주하기 싫었다.
누구도 쓰고, 떫은 걸 좋아하진 않는다.
입장.
10시 정각에 맞춰 시작될 경기.
초시계가 09 : 57이 되자 진행요원이 시합에 들어가는 선수를 인도해 안으로 입장했다. 서로 마주 보자 심판이 입장했다.
“후우, 후우…… 후우…….”
폐부에 가득 공기를 넣었다가 빼기를 잠시, 경기가 시작됐다.
* * *
악!
기합을 넣은 신지가 오른쪽 자세를 잡고 다가왔다. 신지도 지영처럼 양쪽을 전부 자유자재로 서지만, 똑같이 맞잡는 건 싫어하는 편이었다. 짝잡이. 오른쪽과 왼쪽, 혹은 왼쪽과 오른쪽이 되도록 자세를 잡는 게 신지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영은 왼쪽, 신지는 오른쪽 자세로 섰다.
서로의 스타일을 너무 잘 알아서, 둘은 쓸데없는 잡기 싸움은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신지는 지영의 가슴 깃을 잡았고, 지영은 위쪽으로 어깨 깃을 잡았다. 선수들은 잡는 순간 보통 어느 정도 감이 온다.
아, 세다.
음, 약하다.
대략적인 정보가 잡는 순간 파바박 교환이 된다. 신지의 경우는 당연히 전자였다. 그리고 지영은 잡는 순간 느껴지는 묵직함에 역시, 이 재능이 넘치는 천재가 이번 대회를 정말 이를 갈고 준비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힘이 묵직했다.
피지컬은 지영이 위였다. 그래서 근력 또한 지영이 위였다. 힘의 우위가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힘의 우위가 주는 이점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이점이 사라졌다. 고등학생 때의 신지는 거의 피지컬 완성 단계였고, 지영은 완성된 상태였다.
그래서 이점을 잡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신지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피지컬을 완성시켰다.
그래서 힘의 이점이 사라졌다.
‘대단하다, 진짜.’
참 사기적인 친구였다.
툭, 모두걸기를 툭 치는 신지. 지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를 빼거나 하는 순간 연결로 기술이 들어올 게 분명했다. 이는 신지의 특기였다. 그리고 모든 업어치기 선수들의 특기기도 했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어? 하는 순간 날아간다.
알면서도 넘어가는 업어치기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그러니 틈을 주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잡고 서서 30초. 심판이 그쳐를 선언했다. 반칙이 들어올 수도 있고, 안 들어올 수도 있다. 이는 심판의 재량으로 경고성 그쳐를 하기도 하고, 그냥 다이렉트로 지도를 주기도 한다.
하지메!
심판은 후자였다.
자리에 서자 한 번씩 슥슥 쳐다보는 걸로 무언의 경고를 날렸다. 또 이렇게 서 있으면 지도를 주겠다는, 딱 그런 경고성 그쳐였다.
재개된 경기.
이번에도 잡기는 없었다.
서로 가슴과 어깨 깃을 잡고 설렁설렁, 탐색전을 벌였다.
두 선수는 서로를 정말 잘 알지만, 시합 스타일의 분석을 이미 집요할 정도로 파헤쳐 봐 끝내놨지만, 영상과 실제는 달랐다. 특히 지영은 잡아보니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잡았을 때와 지금의 신지는 정말 천지 차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건 신지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잡아보니까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준비했던 것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걸 느껴서 시합 중인데도, 두 선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팽팽 돌아가는 머리.
‘지도 두 개부터 움직일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영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너무 벼랑 끝 전술이야.’
한 방 싸움에서 질 거란 생각은 없었다. 그게 두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영은 그게 신지가 바라는 방향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합 감각으로 따지면, 어쩔 수 없이 신지가 위다. 지영은 훈련만 한 게 아니라 연예인의 삶을 병행하며 살아왔고, 그 공백 동안 신지는 착실하게 훈련했다.
이 차이.
이건 매우 큰 차이였다.
2연승을 했던 것만 봐도 지영이 실력 면에서는 조금 위였다. 하지만 그 조금의 실력은 지영이 배우로 활동하면서 전부 지워졌다. 지영은 그걸 지금 확실히 느꼈다. 지영은 틈을 흔들기로 했다.
신지는 노림수가 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그의 노림수에 가까워질 터. 그러니 스타일에 조금 변화를 줬다.
‘내가 좋아하는 상황을 만든다.’
반칙 하나를 받게 하든가, 아니면 점수를 따든가.
둘 중 하나. 필승 패턴을 밟기로 했다.
툭.
팔다리가 길다는 것의 가장 큰 이점은, 잡기에서 유리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영은 도복을 뜯어내고, 잡기 싸움을 시작했다. 지영은 잡기 싸움에 힘을 빼는 건 싫어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지영의 스타일이 변하자, 신지도 그에 맞춰 즉각 스타일을 수정했다. 그 반응속도가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빨랐다.
팍! 파박!
손끝이 매섭게 상대의 도복을 노렸다.
잡고, 쳐내고, 잡고, 쳐내고. 둘 다 절대 편하게 도복을 잡지 못하게 잡기를 이어갔다. 그러던 순간, 지영이 뻗은 손을 감아서 잡아챈 신지가 빗당겨치기를 매섭게 꽂았다. 부웅!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탄력과 다리가 들어온 각도가 예술적이라 몸이 그대로 떠올랐다.
하지만 지영은 이미 신지가 몸을 돌릴 때부터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붕 떴던 몸은, 뒤집히지 않고 다시 내려섰다. 아니, 정확히는 손으로 매트를 짚고 타고 넘어갔다.
그다음 그대로 쫓아 들어가며, 틀어서 허벅다리를 차올렸다.
파앙!
몸을 회전시킬 때 이미 자세를 바로잡고 있던 신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되치기를 할까 말까 고민한 것 같지만, 일단 방어에만 전념했다. 부웅, 떠올랐던 몸이 떴던 그대로 뚝 내려섰다.
무리한 자세에서 틀어 찼던 지영은 바로 몸을 뺐다.
솔직히 되치기를 각오하면서 찼다. 신지라면 거기에 카운터를 칠 실력이 충분했고, 그건 지영도 알았다. 그러면서도 차올린 건, 신지의 기술만 유효 포인트로 심판에게 인식될 시, 이후부터가 불리해질 수 있어서였다.
일반적인 시합이라면 그래도 그냥 넘어갔을 거다. 한 번 유효기술을 받아줘도 다음에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대는 미야모토 신지였다.
자신이 유효 포인트로 시합을 우세하게 만들 수 있듯이, 신지도 똑같이 유효 포인트 하나로 자신이 유리하게 경기를 풀어갈 수 있는 실력자다. 지영은 그 조건 자체를 내줄 생각이 없었고, 그건 신지도 마찬가지였다.
경기 시작 1분 여쯤에 교환한 한 차례의 공방.
그 공방이 기꺼웠는지, 신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베어 물었다.
천재인데, 저렇게 웃을 정도로 경기를 즐기기까지 한다.
역시 괴물은 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