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88화
288화. 유도 챌린지(1)
지영은 상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가, 자신에게 겁을 먹었다는 것을. 속된 말로 쫄았다고 하는 상태라는 것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선도 시선이고, 일단 기세 자체가 위축되어 있었다.
스포츠에 기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관심이 없는 일반인도 알 정도다.
바짝 얼어붙은 마리옹의 모습은 승부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영은 하지메 사인에 상대가 물러나자 솔직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합을 쉽게 이기는 건 좋다. 시합을 즐기고 말고를 떠나서 승리 자체만 생각한다면, 지금 이 상황은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지영은 어차피 이렇게 굳은 상황이라면, 그냥 일찌감치 끝내주기로 했다. 밖에서 프랑스 코치가 퇴장을 각오하고 악을 썼지만, 지영은 잡는 순간 업어치기 모션에 안다리로 절반을 따낸 뒤, 그대로 누르기로 다시 한판을 따냈다.
팬들의 응원이 무색할 정도로 시시한 결승전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상대는 정신을 차린 것 같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상태였다. 지영은 꾸벅, 인사를 한 뒤 경기장을 나왔다.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재정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지영은 경기장 한쪽의 대기석으로 갔다. 지영이 나가자 곧장 금일 마지막 체급인 81 패자전 선수들이 입장했다. 지영은 딱 봐도 자신에게 시비를 걸 것 같은 선수를 슬쩍 피해 친구에게 갔다.
“우승 축하해.”
“너도 미리 축하해. 잘하고, 다치지 말고.”
“오케이.”
짧은 대화로 친구를 응원한 지영은 시상식 때문에 벌써 흰 도복으로 갈아입은 이성진에게 향했다. 짝.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한 뒤 나란히 선 지영은 남은 경기를 마음 편하게 관람했다. 81 패자전은 오래갔다. 두 경기 합해 20분이 넘게 지나갔고, 그 뒤에야 금일 마지막 경기인 임효중이 들어갔다.
임효중의 상대는 일본이었다.
토모키요 히카루.
역시나 일본 국대의 주전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래도 마스터즈 결승까지는 올라왔다. 일본은 거의 전 체급에 걸쳐 강하다. 하지만 그래도 강한 라인을 뽑으라면 역시 경량급이었다. 60부터 73까지는 확실히 강한데, 81부터 +100까지는 확실히 약했다.
도쿄 올림픽의 -100은 솔직히 심판 백이 상당히 작용한 경기였다. 그런 더러운 시합 스타일은 다른 대회 같았으면, 반칙패를 처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기였다. 그걸 생각하면 -100 금메달은 그냥 홈그라운드의 이점과 종주국의 이점으로 가져갔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역시 압도적인 건 경량급들이다.
약한 건 중량, 헤비급이고,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약한 체급이 임효중이 뛰는 81체급이었다. 이상하게 이 체급에서 일본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결승에 올라온 히카루는 요즘 물이 제법 오른 것 같았다.
“경기력이 좋은데?”
“그러게.”
시합이 시작되고, 짧은 공방을 주고받는 걸 본 이성진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히카루는 확실히 실력이 제법 올라왔다. 일본 특유의 거만함이 깃든 느낌이야 당연히 났지만, 그래도 집중한 상태에서 임효중의 공세를 잘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간간이 되치기까지 노리다 보니 임효중도 쉽게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영은 그런 모습에도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효중이었다. 지영이 봤을 때, 어쩌면 황금세대 중에서도 가장 천재적 재능을 갖춘 건 임효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임효중의 경기는 언제나 편안했다.
숨죽이고 봐야 하는, 그런 느낌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한창 실력이 올라온 토모키요 히카루를 상대하는 중인데도 마음이 정말 편안했다. 질 거라는 생각은 정말 조금도 하고 있지 않다 보니, 마치 결말을 아는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역시나, 쿠웅!
경기 시작 2분이 지났을 무렵 임효중의 특기인 허벅다리를 전력으로 방어하기 위해 한껏 자세를 낮춘 히카루에게 임효중이 기습 안다리를 제대로 걸었다. 어, 하는 순간 뒤로 그대로 밀리며 주저앉았다.
임효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크게 기합을 넣으며 그대로 뒤로 히카루를 찍어 눌렀고, 등이 제대로 닿아버렸다. 심판은 그걸 보고는 연결 기술로 판단해 그대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이스! 멋지다! 임효중!”
짝짝짝!
단짝인 이성진이 방방 뛰며 축하했다. 지영도 친구의 우승에 크게 박수를 보냈다. 단순히 의식해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좋아서 보내는 박수였다. 첫날 경기는 그렇게 이변이라면 이변이고, 이변이 없었다면 없는 채로 경기가 끝났다.
황금시대 전원 우승.
모두가 감을 찾으러 나왔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들은 당당히 금을 목에 걸어 자신들의 천재성을 입증했다. 그리고 그건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90과 -100에서의 금메달. 그리고 +100까지 금메달을 챙기며, 한국팀은 대회를 초토화했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귀국했다.
돌아온 그들에게,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 * *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 쇼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선수들은 없었다. 이 쇼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게 메이저리그나 NFL, NBA, 유럽의 축구 리그일 것이다. 이 밖에도 골프나 테니스, 혹은 F1이나 프로 레슬링 등의 경기도 스포츠의 한 축에 들어갈 것이다. 사실 자금이 들어가는 규모 자체를 따지면 F1도 진짜 장난 아니긴 하지만 일반인에겐 축구나 야구가 더 익숙한 쇼 비즈니스 스포츠였다.
이런 스포츠는 관객이 있으니까 아주 큰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규모가 작아도, 스포츠는 돌아간다. 취미의 영역에서부터 시작해 올림픽 지정 종목이면 비인기 종목이라도 선수를 육성한다. 생활 스포츠조차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기에 목숨을 거는 선수들도 많았다.
이런 거대한 쇼의 바운더리 안에서 유도의 위치는 가장 아래에서, 다시 조금 위였다.
이걸 피라미드 구조로 수치화하면, 앞서 말한 농구와 축구, 야구, 미식축구, F1과 골프, 테니스 등등이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관객이 많아 충분히 엄청난 상금이 걸리기도 하는 대회가 열리고, 리그가 열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선수의 이적이나 대회 우승상금이 일반인의 기준에선 입이 떡 멀어지는, 정말 말 그대로 억! 소리 나는 구조가 이미 완성된 곳이었다.
그에 비해 유도는 상금 자체가 없었다.
국가에서 큰 대회에 나가서 입상했을 때 주는 상금제도는 있어도, 대회 자체에서 상금을 주는 예는 없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입상 경우 포상제도가 있긴 하나, 그건 대회 자체의 상금은 아니었다.
마스터즈, 아시아 선수권 등등, 메이저라 불리는 대회 전체가 그랬다.
그럼 유도 선수들은 뭘 먹고 사나?
실업팀 입단이나, 입촌이 선수 생활 유지의 전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계선에서 은퇴한 선수 생활 유지의 길이 확실히 갈린다. 그리고 그 끝이 딱 대학교 4학년이다.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일단 기본적으로 남자 선수들에게 걸리는 건, 군대 문제였다. 실력이 있는 선수들은 보통 무궁화체육단이나 상무로 빠지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은 병역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군대, 무려 2년에 가까운 시간을 쉬고도 선수로 남는 방법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서 남자 선수들은 보통 상무나 무궁화체육단에 못 들어가면, 바로 은퇴 후 군대 문제를 해결한다. 연예인처럼 30살 전후까지 무소속 선수로 버티다가 군대에 간다? 그런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여자 선수는 군대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교에서 훈련하며 유도를 계속하는 선수도 있지만 그건 솔직히 자기 돈을 까먹으면서 붙잡고 늘어지는 거라, 생산성 자체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여자 선수들도 실업팀의 콜을 받지 못하면 코치로 빠지거나, 아니면 은퇴였다.
이렇듯, 유도 선수로 계속 활동하려면 실업팀에 들어가는 게 필수였다.
하지만 그렇게 실업팀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금액을 받는 건 아니었다. 그쪽도 당연히 성과제였고, 잘하면 잘할수록 연봉이 오르긴 하지만 프로리그에서 뛰는 선수들과 비교하면 정말로 새 발의 피였다.
비인기 종목의 비애라면 비애였다.
아니, 그냥 비인기 종목의 비애가 맞았다.
그런데.
이상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 진짜요?”
한국으로 돌아와 며칠 안 지났을 무렵, 지영은 잠깐 서울 회사에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응, 사성에서 정식 공문 왔다던데?”
“사성이요? 제가 아는 그 사성? 갤럭시의?”
“응. 그 사성 맞아. 지금 검토 중이라고 들었어. 가져다줄까?”
“네, 좀 보고 싶어요.”
“잠깐만.”
나갔던 임은진이 10분 만에 가져다준 공문을 읽던 지영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리며 탄성을 흘렸다. 공문의 개요는 간단했다.
-한국 재계 1위 그룹인 사성에서 유도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단순한 이벤트 대회가 아니라, 상금을 거는 대회가 될 것이다.
-상금은 체급별 우승 일천만 원, 2위 삼백만 원, 3위 일백만 원으로 한다.
-체급별 참가에 연령 제한을 두지 않는다. 중학생부터 은퇴한 선수까지, 전부 참가를 허락한다.
-단, 유도협회 선수 등록이 되어 있거나, 되어 있었던 선수로 제한한다.
대충 이 정도였다.
사성 배, 전국유도대회.
사성은 지금 유도가 굉장히 핫하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 대회를 열어서 마케팅 측면으로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거기에 만약 이 대회에 강지영을 포함한 황금세대가 참여한다면?
흥행 면에서 이건 손해 볼 게 조금도 없는 대회였다.
현재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가 바로 강지영이었다. 프랑스에서 레나 파벨로를 만나 보였던 강지영의 모습 때문에, 차갑고 삭막한, 극의 이름처럼 ‘잿빛’의 느낌 속에 숨긴 따스함 때문에 여전히 난리였다.
그런 연예인이, 한 스포츠 종목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사성은 이런 지영의 참가를 부탁했다.
지영이 참가한다는 소식 자체면, 흥행은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 대회는 마케팅 측면이 강했다.
“우승상금 플러스 사성 가전이 많이 들어갔네요?”
“아무래도 지영이 네가 나가면 홍보 효과가 죽일 거잖아? 거기에 가전을 얹어서 홍보하는 거지. 뭐, 이 정도야 당연한 거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많이 하는 거야.”
임은진의 대답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근데 상금이 조금 적은 거 아닌가?’
일천만 원의 상금이 생각보다 적은 느낌이긴 하지만, 일단은 이런 대회가 생겨났다는 게 솔직히 더 의미가 있었다. 세상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면 유도의 인기는 언제고 진다. 예전에 한 번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바짝 올라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진짜 태권도나 합기도보다 유도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제대로 올라왔다.
그런 인기를 한 범죄자가 찬물을 팍 끼얹어, 날려버렸다.
그런 일이 또 언제고 일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언젠가 유도의 인기는 분명 쇠락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전에라도 이렇게 올라왔을 때, 그걸 이용하는 건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지잉, 지잉!
전화가 왔다. 액정을 보니 강한결이었다.
“어, 한결아.”
-기사 봤어?
“기사? 무슨 기사?”
-사성에서 기획 중이라는 유도 대회. 지금 기사 올라온 거 성진이가 링크 보내줬어.
“아, 그거 난 회사에 와서 알았어. 사성에서 우리 회사로 대회 참가 요청? 그런 거 보냈더라고.”
-아 그래? 어때? 네 생각은?
“나 지금 생각 중이지. 근데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어디야? 서울이면 회사로 좀 와. 더 고민해야 할 게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지금 가고 있어. 30분 정도 걸려.
“응.”
조금은 들뜬 강한결의 목소리.
그리고 지영의 목소리도 비슷하게 살짝 들떠 있었다. 유도의 흥행. 지영이 싫은 운동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유도의 흥행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기꺼웠다. 애정이든, 애증이든, 유도가 지금보다 더 활성화되는 건 지극히 찬성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속속 기사를 확인했는지, 톡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성진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해도 은퇴할 생각이 없는 임효중도, 그리고 황석도 전부 잘됐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30분 뒤 강한결이 도착했다.
데이트 중이었는지, 연인 양지원이 같이 왔다.
“오빠 오랜만.”
“응, 지원이 오랜만에 보네.”
가볍게 인사하고, 마주 앉은 강한결에게 지영은 협조 공문을 내보였다. 꼼꼼하게 그 서류를 읽은 강한결은 흠, 조금 애매한 얼굴이 됐다. 그리고 지영은 강한결이 왜 그런 표정이 됐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지영은 먼저 물어봤다.
“우리가 참가하는 건 별로지?”
“응. 그게 좀 안 내키네.”
강한결이 그렇게 답하며 쓴웃음을 짓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성은 지영과 황금세대가 출전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이벤트 대회라고 해도 화제성이 확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대회가 재미없어진다.
세계에서도 무패행진 중인 황금세대다.
이런 황금세대가 대회에 나가면? 져주지 않는 이상 우승은 무조건 황금세대의 몫이었다. 지영도 강한결도, 가장 순둥순둥한 황석도 언제나 유도에는 진심이라 져주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회 참가 자체는 내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