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83화
283화. 마스터즈(2)
미쉘이 머리를 잘 썼다.
그냥 다짜고짜 인터뷰하자고 했으면 안 했을 텐데, 그녀는 딱 팬 미팅을 전략으로 들고나왔다. 지영을 비롯한 황금세대가 언론은 상대하지 않아도, 팬들에겐 정말 잘한다는 걸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팬 미팅이라고 해봐야, 간단한 질의응답이었다.
팬들은 황금세대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정보는 정말 너무 풀려 있지 않았다. 그냥 그의 주변이나, 예전 고등학교 동창들의 입과 손에서 나온 정보를 빼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오죽하면 작품의 제작발표회에도 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진짜 똥고집인데, 그럴 만한 이유가 또 있어서 다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지, 분명 덕질 조건은 충분히 갖췄는데, 뭘 알아야 덕질을 해도 하지! 하면서 원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의 분노는 언론을 향하고, 언론은 욕먹은 분노를 황금세대에 돌리고, 이런 악순환이었다.
그러던 차에 미쉘은 이번 마스터즈 대회에 지영을 포함한 황금세대가 나온다는 얘기를 듣고, 아예 판을 이렇게 짰다.
인터뷰 말고, 팬 미팅.
이전에 선발전에서 지영은 해외에서 온 팬들과 시간을 가졌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나온 발상이었고, 그 발상은 훌륭히 먹혀들었다.
30분 짧은 팬 미팅이었다.
그 30분간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건 당연히 지영이었다. 팬들은 의외로 지영의 다음 행보에 관심이 많았다.
프랑스 특유의 영화를 찍을 생각은 없는지, 아니면 이전처럼 드라마를 찍을 건지, 거대 플랫폼들 자체 작품에 참가하진 않을 건지 등등, 이런 질문들이 많았다.
“아니요. 당분간은 운동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지영이 작품 말고, 운동에 집중하겠다고 하자 다들 서운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래서 지영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올림픽이 끝나면 내년엔 아시안 게임이 있어요. 이 두 대회 사이에 텀이 조금 있는데 이때 작품을 할지, 아니면 아시안 게임 끝나고 하게 될지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 작품이란 게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뚝딱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저 말고 다른 배우들 스케줄부터, 신경 써야 할 게 많습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양해 부탁드릴게요.”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별수 있나. 양해해야지.
팬들은 아쉽고 서운해했지만, 그 이상 가진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질문이 돌아갔다. 그렇게 두 바퀴를 돌고 나자, 벌써 30분이 지났다. 어쩔 수 없이 30분 더했다. 1시간을 딱 채우고 일어나려는데, 지영의 시선에 한 아이가 잡혔다.
“…….”
매우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창백한 피부의 아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비가 오던 날. 검은 상복을 입은 미망인이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날. 그날 미망인의 등 뒤에 숨어있던 아이다. 즉, 라피앙 파벨로의 딸이다.
유전병에 걸린 딸.
그 아이가 가만히 지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 옆으로 파벨로 부인이 서 있었다. 파벨로 부인은 지영을 여전히 미안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지녔던 파벨로 부인이었다.
남편이 했던 일이, 용서받기 힘든 일이란 걸 알았고 그래서 지영을 보자마자 사죄했다. 그리고 지영은 파벨로 부인은 용서했지만, 라피앙 파벨로는 아직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딸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아이는 죄가 없다.
이제 고작 초등학교 1학년?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여아에게 뭔 죄가 있겠나.
“지영아. 안 가?”
“잠깐. 저기 아이 보이지?”
“누구 재? 저 아이가 누구, 아. 전에 그…… 파벨로?”
“응. 잠깐 만나고 올게.”
“……그래.”
임은진은 지영의 그런 돌발행동을 이해해 줬다. 프랑스까지 함께 왔었고, 지영이 얘기는 안 했지만, 당시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저 아이를 보자마자 지영이 심적으로 동요했음을 금방 눈치챘다. 또한, 말리지 못함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지영은 무대를 내려가 철제 펜스 앞까지 향했다.
모두 지영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리를 지르다가, 지영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고는 빠르게 입을 닫았다.
라피앙 파벨로는 지영의 팬에게는 정말 원수나 다름이 없으면서도, 지영이 지금의 인기를 가지게 해준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좋지도 않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딸은?
유전병에 걸린 그의 딸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죄가 없다. 이건 프랑스 인에게도 당연히 통용되는 말이었다. 라피앙이 그렇게까지 미친 짓을 한 이유는 딸 때문이었다. 자신의 유전병을 하필이면 가지고 태어난 딸. 약값도 약값이지만, 언제 도화선이 타들어 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평생을 조심하고 살아야 하는 가여운 딸.
그 딸을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나 그래서 라피앙의 딸, 레나가 잘못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라피앙의 그런 행동은 그래도, 레나에게는 좋게 작용했다. 테러리스트에 가까운 과격한 행동이었지만 전 세계에 라피앙 파벨로란 이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의 작품은 확실히 고가에 거래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생각보다 매력이 있기도 했다.
이미 이름이 뜨고 나니까, 작품에 생각지도 못한 스토리가 이어 붙었다. 기존의 작품에 최소 수십 배에 거래되니, 당연히 레나의 약값에 많은 도움이 됐다.
지영은 그런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무릎을 굽힌 지영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레나가 앙상한 손을 철제 펜스 사이로 넣어 지영의 손가락을 잡았다. 작은 손이었다. 지영의 손 두세 개를 잡으면 안에 꽉 차는.
그리고 차가웠다.
“잘 지냈니?”
지영의 인사를 통역해주는 강한결.
레나는 그 인사에 그제야 좀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레나가 입을 열기 전에 지영은 일어나 양손을 뻗으며 파벨로 부인을 바라봤다. 자기가 안아도 되겠냐는 제스처였고, 파벨로 부인은 딸을 들어 지영에게 넘겼다.
파바바바밧!
엄청난 카메라 세례였다. 모인 팬들과 기자들이 찍어대느라 어두웠던 밤이 잠시간 도망쳤을 정도였다. 지영은 레나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앞을 가려주자 반사적으로 지영의 목을 감는 레나.
“잘못했어요.”
“…….”
덜컥. 심장이 마치 브레이크를 밟은 차량처럼 잠깐 덜커덕거렸다. 잘못했어요? 왜? 하지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두가 레나를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프랑스라고 설마 악플러가 없을까?
‘그리고 어린아이들일수록 더욱 잔인하지.’
이성적이지 못한 사고력에서 나오는 폭력은, 그 무엇보다 악마적이다.
레나는 그런 악마에게 시달린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잘 지냈냐는 말에, 잘못했다는 사과의 말이 나온 거다. 그리고 이렇게 할 정도로 아이는 성숙했다. 아마 라피앙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레나는 대부분 이해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영은 달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라피앙은 여전히 밉다. 솔직히 말하면 죽을 때까지, 그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당장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나 레나는 아니었다.
“왜, 누가 뭐라고 해? 안 그래도 돼. 아저씨는 레나를 조금도 미워하지 않으니까.”
“정말요……?”
“그럼. 안 미우니까 이렇게 안고 있지. 미웠으면 이렇게 안아주겠어? 보고도 못 본 척하고 갔지.”
“히잉…….”
심지어 마음고생까지 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재주는 솔직히 없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가만히 들으면서, 지영은 강한결에게 레나가 몇 살인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10살. 또래보다 훨씬 작아서 8살이나 그 아래일 줄 알았는데 10살이다.
이 정도면 성숙한 애들은 진짜 성숙해지니, 진짜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했다.
“누가 뭐래도 레나는 잘못 없어. 그래서 아저씨는 레나를 조금도 미워하지 않아.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하면 오늘 이렇게 찍은 사진 꼭 보여줘. 알았지?”
“네…….”
레나는 지영의 말에 울음을 그쳤다.
지영은 그런 레나를 보며 웃어줬다. 한점의 사심도 없는 미소였다. 그래서 아마도, 정말이지…… 눈부실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레나는 다행히 지영의 미소를 보고 정말 안심한 것 같았다.
아빠 때문에 자기가 죄인이란 생각을 했었다가, 지영이 그걸 아니라고 직접 말해주니 이제는 마음이 홀가분해진 게 분명했다. 그런 레나를 다시 파벨로 부인에게 넘겼다. 병에 관해서 묻고 싶었지만 레나가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궁금한 건, 나중에 알아내면 된다.
“잘했어.”
돌아서자마자 강한결이 한 말에 지영은 아, 이번 행동이 정말 잘한 거구나.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이제 이 행동으로 또 기사가 엄청 나가겠지만, 그래도 친구들은 이해해 줄 거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올. 강지영. 멋진데?”
“잘했어. 재가 레나지? 너무 창백해 보이는데, 많이 안 좋데?”
“잘했다. 지영아.”
친구들의 칭찬에 지영은 좀 멋쩍게 웃고는 전기정 감독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사는 무슨. 잘했다. 멋있었어. 그래, 애는 잘못이 없지. 내 선수가 멋진 길을 걷는 것 같아서 참 좋다. 하하.”
다행히 전기정 감독도 지영의 행동을 이해해 주고, 칭찬해 줬다.
갑작스러운 이벤트였지만 지영은 자신도 레나를 보고,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호텔로 가는 길.
이미 지영과 레나의 만남은 프랑스 언론, SNS를 시작으로 폭발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하도 몰려 있었기 때문에 구도가 잘 잡힌 영상은 없지만, 그래도 지영과 레나의 대화가 다 들어간 영상도 제법 많았다.
그에 지영이 라피앙 파벨로를 이제 용서한 거다. 아니다란 논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금방 수그러들었다. 중요한 건 지영이 레나를 안심시켰다는 것. 안아주고 다독여 줬다는 것. 그 훈훈함에 다른 논란을 넣을 필요는 없다는 것. 이번엔 자정작용이 일어나 그냥 있는 그대로만 보고, 느꼈다.
-너는 진짜 움직이기만 하면 화제다, 화제야.
“죄송합니다.”
-죄송은? 잘했다는 거야. 이번에도. 컨디션은 문제없지?
“네, 잘하고 갈게요.”
-그래, 이쪽은 알아서 할게. 그럼 파이팅하고!
“네.”
장세리와 통화를 끝낸 지영은 어머니와도 통화를 했다. 어머니도 그렇고, 그 뒤에 한 양유진도 그렇고 전부 기사를 접했고, 지영에게 잘했다고 했다. 특히 어머니는 너무 좋아하셨다. 그렇게 파리에 도착과 동시에 다시 화제를 일으킨 지영은 다음 날 저녁, 계체도 무사히 통과했다.
이윽고 시작된 마스터즈.
지영의 첫판은 일본이었다. 하지만 신지도 아니고, 하시모토 소이치도 아니고, 오노 쇼헤이도 아니었다.
오요시 켄.
세계 랭킹 70위권의 선수였다.
랭킹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랭킹이 뒤에 있다는 건, 그만큼 기회를 받지 못했거나 기회를 줬어도 살리지 못했음을 뜻했다.
지영은 당연히 이런 오요시 켄에 관한 시합 정보를 사전에 파악하고 왔다.
‘왼쪽잡이.’
틀어잡기에, 허리기술이 주특기지만 제대로 잡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하는 선수. 마스터즈에 나올 정도의 실력자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현재 세계를 쓸고 있는 일본 유도 3인방에 비하면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오요시 켄은, 지영과 마주 서서 거만하게 그를 바라봤다.
참 신기하다.
대체 왜 이런 눈으로 볼까?
지영의 어디가 얕볼 곳이 있다는 걸까?
미야모토 신지를 비롯해 하시모토 소이치, 오노 쇼헤이까지 전원 지영에게 진 전적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지영을 얕볼까?
‘어디 그만큼 실력이 있는지 볼까?’
인사하고 입장. 인사하고, 한 걸음 앞으로. 하지메!
악! 기합을 넣은 지영은 자세를 오른쪽으로 바꿔서 접근했다. 그러자 한 번에 훅 달려드는 오요시 켄. 지영은 그걸 받아 그대로 업었다. 하지만 마지막쯤에 깃을 놓쳐 아깝게 앞으로 떨어졌다.
쿵!
크게 날았지만, 너무 앞으로 떨어져 점수는 없었다. 그런데 심판이 그쳐를 하기도 전에 자세를 푸는 오요시 켄. 지영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쑥, 목으로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발로 허리를 감아 아랫배에 힘을 빡! 줬다.
“키이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기를 10초. 축 늘어진 오요시 켄을 놓은 지영은 일어나 흐트러지지도 않은 도복을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