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57화
257화. 나의 무사님S2(4)
“재!”
휘리릭!
까앙!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후욱, 후욱.
기습은 실패했다.
재가 목숨을 걸어 달라고 했던 것과 정말 다르지 않게 상황이 흘러갔다. 북부의 중기병을 자극해 달려들게 만들어 쇠심줄보다 질긴 밧줄로 전열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무너뜨린 건 고작 열기 내외.
아직 구십 이상이 멀쩡했고, 재는 저격을 통해 그 수를 줄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당연히 쉽지 않았다. 워낙에 두꺼운 중갑이라 웬만한 화살은 그냥 무시했다. 그래서 작정하고 투구의 눈을 노렸다.
그러나 이들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머리를 노리고 화살을 날리자, 대번에 창으로 모든 활을 튕겨냈다. 그 정도 무예는 갖춘 자들이었다. 결국에 돌격이 시작됐다. 이족의 전사들은 활만 잘 다루는 게 아니었다. 활을 들었을 때 정말 무섭긴 하지만, 정글이나 밀림, 평야의 짐승들은 정말 날래고 빠르다. 그래서 화살을 피하고 달려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만약 다룰 줄 아는 게 활밖에 없다면 십중팔구는 그곳에서 뼈를 묻었을 것이다.
그러니 대인전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건 이족 전투의 기본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평야였다. 협곡 아래로 내려오는 바람에 평야였고, 이점이 사라졌다. 재는 먹혀들진 않겠지만 그래도 놈들을 유리한 전장으로 유인해봤다. 하지만 역시 먹히지 않았다. 이들을 이끄는 중기병대의 대장은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재가 자신을 유인한다는 기색을 느끼자마자 대를 멈추고 오히려 뒤로 물렸다.
보급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철철 넘쳤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정면으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는, 남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맞붙었고, 깨고, 깨부숴지는 중이었다.
전투는 양패구상으로 흘러갔다.
이족의 전사들은 일당백의 무력으로 쉽게 기병대에 물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산개해서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기병대가 일점 돌파할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로 선전하고 있었다.
치고, 빠지고, 치고, 또 빠지고.
그렇게 최대한 보급대의 이동을 막다 보니…… 어느새 전력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하루 간 치러진 여섯 번의 전투는 천하의 재에게도, 무리였다.
“선고! 퇴각 신호 보내!”
“알았어!”
재의 근처에서 살에 시위를 먹인 채 전방을 쏘아보던 선고가 얼른 뿔피리를 불었다. 부우우! 날카로운 호각과는 정반대되는 둔중한 울림에, 사방에서 싸우던 이족의 전사들이 급히 몸을 빼기 시작했다. 기병들은 그런 이족을 당연히 쫓았다. 하지만 서로 교차하면서 견제를 해준 덕분에 무사히 숲의 경계로 이동했다.
재도 선고의 견제를 통해 무사히 빠져나왔고, 천천히 물러나는 북부 중기병을 바라봤다.
저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이쪽이 절반이 날아갔다면, 저쪽도 절반이 날아갔다.
“재, 들어가자.”
“응.”
선고의 말에 재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 숲의 어둠에 몸을 숨겼다. 벌컥벌컥. 갈증을 호소하는 목에 물을 넣어주자, 이족의 전사 타분이 다가왔다.
“세요와 사헌이 카샨과 함께 떠났어.”
“……그래.”
보고받은 선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재의 표정도 만만치 않게 굳었다. 세요와 사헌. 한 시진 전에 웃으면서 같이 육포를 뜯어 먹었다. 그렇다 보니 둘에 관한 정보가 훅훅 떠올랐다. 세요는 부락에 어여쁜 색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헌은 딸이 둘이고. 그중 둘째는 갓난쟁이다.
그 둘째는 샨강의 지척에 제국의 군대가 출몰했다는 소식에 급히 군을 꾸릴 무렵 태어났다. 출발 직전 태어난 딸을 딱 한 번 안아본 사헌이다. 그리고 이제는 두 번 다시 안아줄 수 없게 됐다.
“제기랄…….”
그러한 사실에, 절로 입에서 욕지기가 나왔다.
숭고한 사명? 글쎄.
재는 순간적으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란 생각이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 재는 양부가 서책을 줬지만, 그걸 내려놓고 칼을 쥐었다. 당시에 양부가 정적이 보낸 살수에 크게 다친 것도 이유지만, 책은 졸리고 칼은 재밌었던 게 더 큰 이유였다.
이후 양부는 다시 말렸지만, 재는 칼을 놓지 않았다.
끝끝내 백적파란 단체까지 만들어서, 황제에게 인정받은 무력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칼이 되어, 제국 곳곳을 누볐다.
역모, 도적, 혹은 다른 제국에서 보낸 정찰대나 척후, 간을 보러 온 전투부대와 죽고 죽이는 전투를 치렀다.
죽음은 언제나 가깝게 있었다.
손에 피가 마를 날이 드물었기에, 피 냄새가 진동해도 그 안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재였다.
연을 지켜, 그랬던 시절의 제국을 다시 세우는 것.
양부가 연을 지켜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그 유언을 끝까지 지키는 게 그의 숙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숙명이 흔들렸다.
이번에 나온 이족의 전사단은 다들 젊었다. 가장 많은 전사가 이제 고작 다섯 살 난 자식이 있을 정도였다. 육체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중이고, 밀림과 평야, 산맥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후기지수들은 전부와 있었다.
그런 젊고, 유망한 전사들이 벌써 절반이나 죽었다.
좀 전에는 태어난 딸을 딱 한 번 안아보고 전장으로 나온 전사가 죽었고, 아직 합방도 제대로 못 한 세요도 죽었다.
“그리고 나도, 죽겠지.”
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누구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불쑥 그런 생각들이 떠올라 감정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그때 불쑥 선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 샨강 너머의 부족을 생각해.”
“……아.”
그래, 이 전투의 목적이 뭐였는지 깨달았다.
거듭되는 죽음으로, 퇴색된 전투의 의미가 떠오르자 급속도로 정신이 차려졌다. 물러서면 죽는다. 나도 죽고, 시궁창에서 자신을 거둬준 양부의 유언 조각인 연도 죽겠지만, 그 너머의 숲과 평야와 산의 이족 또한 모두 죽을 것이다.
남녀노소.
꺄르르! 웃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반짝이는 눈으로 칼을 정비하고, 칼을 수련하는 자신을 보던 꼬마들과 제국의 성도에선 철없이 뛰어놀 나이에도 엄마의 일손을 돕는 꼬마 숙녀들도, 클클거리며 그런 아이들을 더없이 자애롭게 보는 어른들도. 제국의 창칼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재가 아는 후는 후환을 남겨두는 성격이 절대로 아니니, 철저하게 뿌리를 뽑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이 중요했다.
이 죽음조차, 의미가 있다고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이게 최선이라 생각해야 했다. 아니아니, 최선이었다. 의미를 굳이 부여할 필요도 없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미안. 후우.”
그리고 재는 그걸 까먹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거듭되는 죽음에, 그 죽음으로 인해 심정이 흔들렸었다. 그렇게 흔들리던 감정은 다행히 선고로 인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미안은. 나는 오히려 당신이 죽음에 무뎌지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
“…….”
“그리고 카샨과 함께 여행을 떠난 우리 이족 전사들의 죽음에 슬퍼해 줘서, 고맙고.”
따뜻한 선고의 위로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길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
고맙다는 말도, 꼭 살아 돌아오라는 말도, 몸조심하라는 그 흔한 말도 하지 않았던 공주. 그런 공주를 떠올린 재는 처음으로, 양부가 틀렸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 * *
후우.
숲의 어둠 속에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재의 감정을 바라보던 홍진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만, 조금만!’
그녀의 바람대로, 끝내 절정에 도달하는 감정.
“오케이!”
크게 외치며 신의 끝을 알리자, 감정을 올렸던 배우가 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정리했다.
홍진아는 그런 지영을 대견하게 바라봤다.
물이 오른 감정 연기다.
극 중 전투에 시달린 재의 감정변화가, 가히 천변만화처럼 이어지는 것을 담는 신이다. 처음에 대본을 봤을 때 그녀는 이걸 대체 어떤 식으로 콘티를 짜야 하나. 했을 정도로 고민했었다.
이번 신은, 주인공에게 매우 부담이 많은 신이었다.
내밀한 감정 연기는 내공이 10년, 20년 된 배우들도 힘들어했다. 물론 힘들어도 그 정도 세월 동안 이 바닥에서 살아남았다면 정은정 작가가 힘을 준 이 신을 어렵더라도 소화는 해낼 것이다.
‘한, 최소한 반나절 정도는 걸려서 말이지.’
그런데 지영은 그 반의반도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미진했다. 부족했다. 방향은 제대로 잡았지만, 그녀가 원한, 그리고 정은정 작가가 원한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천변만화라고 해서, 감정의 변화가 끝에서 끝으로 훅훅 내달리는 게 아니라 단계별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처럼 한 영역에서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처음엔 그 변화의 색이 옅었다.
애매해서, 변한 건가? 싶은 정도였다.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눈빛과 표정으로 알아차리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는 차이였다. 그러니 오케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어진 촬영.
횟수를 거듭할 때마다 지영은 나아졌다. 자신이 내린 디렉팅도 찰떡같이 수행했다. 극단적인 변화보다, 물 흐르듯이 이어져야 한다는 주문도 제대로 지켰다. 그렇게 이어진 촬영을 그는 1시간 만에 끝냈다.
“와…….”
오늘 이 신을 촬영하는 걸 알고 찾아온 정은정 작가가, 지영의 연기를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사실 이 신은 수정된 신이었다. 나의 무사님 촬영 초기에 지영의 연기가 깊어진 것을 본 정은정 작가는 대본을 조금 수정하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조금 변한 게 이 부분이었다.
본래는 세요, 사헌의 죽음 뒤에 그 가족을 잠깐 생각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다가, 명복을 빌어주는 순서로 흘러갔을 신이었다. 그런데 그걸 정은정 작가는 이렇게 바꿔왔다.
이 신은, 그리고 극에 ‘불화’를 넣는 첫 신이었다.
왜?
컷백으로 선고와 연의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줄 거기 때문에, 연에 대한 불만을 시청자뿐만 아니라 극 중 재조차 느끼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양부의 유언으로 연을 지키던 재였다.
여기에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았지만, 적당히 지키다 끝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닌 재였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연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재는 수행했다. 이는 시즌1 때도 나온 장면 중에 있었다.
누가 봐도 무리한 작전인데, 연은 재에게 수행하길 바랐고, 재는 수행했다.
그리고 다쳤다. 그 결과 시청자 게시판에 폭발적으로 연에 대한 욕이 달렸었다. 그렇게 연은 주인공이지만, 악역에 가까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그래도 극 중 재는 연에게 그 어떤 불만도 느끼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신으로, 재는 연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다.
이렇듯 불화가 생기면?
‘이제, 필연적으로 갈등이 조장되지.’
사고의 차이, 의견의 차이. 관념의 차이 등등.
부딪칠 건수는 수없이 많았다.
극 중의 상황에 맞춰 파생될 감정들은,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은 부딪치게 만든다. 그 시작의 포문을 여는 게 바로 이 신이다. 그래서 이 신은 중요했다. 최소 반나절은 여기다가 쏟아부을 각오를 했을 정도로. 그러나 정확히 다섯 번 만에 지영은 매우 만족스러운 연기를 보여줬다.
연출인 그녀의 요구와 대본을 쓴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들어간 연기였다.
“진짜, 제대로 물이 올랐구만.”
현 출연진 중 가장 경력이 긴 황덕수의 말에, 홍진아는 물론 그녀 주변에 있던 이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좀 잘한다.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린다.
정도의 느낌을 주던 지영의 연기가 지금은.
특별하다.
특출나다.
이런 느낌을 주는 연기로 변해 있었다.
아직은 경악할 레벨은 아니지만…….
“이렇게 계속 성장해 주면 진짜…….”
“괴물의 탄생을 보게 되겠지.”
홍진아가 중얼거린 걸 받은 황덕수의 말처럼 될 것 같았다.
그 말에 촬영장엔 묘한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컷 사인에 일어나 감정을 정리하는 배우를 보면서, 황덕수는 펄럭!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경력이 가장 길고, 누구보다 연기에 진심인 황덕수마저 불타오르게 했다.
그런 지영을 조용히, 소리 나지 않게 손뼉 치며 흐뭇하게 보던 이연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게 했다. 정은정 작가가 픽했지만, 실제로 앞에 서 뛴 건 친분이 있는 이연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이연은 화제나 인기는 몰라도, 연기로 지영에게는 밀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됐다. 좀 전의 그 연기는, 감정 연기에 자신 있는 본인도 쉽지 않은 연기였다.
표정과 눈빛, 자세, 행동 등등으로 극 중 캐릭터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제대로 보여줘야 하는 아주 힘든 신이었으니까.
솔직히 오늘 지영이 고생 좀 할 줄 알았고,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는 지영을 위로 좀 해주고, 조언 좀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영은 고작 1시간 만에 그 힘든 신을 끝냈다. 그 결과 황덕수처럼…… 불이 붙어버리고 말았다.
“인기에선 밀릴 수 있지. 인기에선…….”
하지만, 연기에서는 밀릴 수 없지.
“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왔는데.”
악착같이 노력해서, 걸그룹 꼬리표를 떼어내고 이제는 연기자 소리를 듣는 이연이었다. 그 길은 험하고, 지난했다. 심지어 정은정 작가의 뮤즈로 불리지만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소화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믿어주는 언니 덕분에, 이렇게 정상급 여배우가 됐다.
그 모든 게,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넘어선 독기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런데 이제 고작 세 작품째 들어가는, 경력 2년 차의 배우에게 밀린다?
배우이기 전에 한 인간인 그녀의 자존심이 그건 용납하지 않았다.
이연이 그런 마음으로 돌아서서 촬영장을 떠나자, 한쪽 구석에 있던 ‘후’도 일어나서 현장을 떠났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불이 붙었으니, 분위기는 가히 끝내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인기에도, 다들 중심을 유지했다.
이런 흐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주연배우의 인기나 화제 때문이었을까.
3화는, 기어코 30%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