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55화
255화. 나의 무사님S2(2)
고통을 이겨낸 인간은 성숙해진다고들 한다. 그래서 쇠는 두들기면 강해지는 것과 비교했다. 개소리였으면 좋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만, 고통은 인간을 정말 강하게 만들기는 했다.
지영이 그에 해당했다.
“음, 깊어졌네, 역시.”
“눈빛이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지?”
“다르지. 확 뒤바뀐 건 아닌데, 은은하게 깊어졌어.”
이런 지영의 변화를 배우들은 연기를 함께하며 하나둘씩 알아차려 갔다.
확실히 지영의 변화는 극적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재능이 있던 친구가 갑자기 이 바닥에서 수십 년 굴러먹은 끝판왕급의 연기를 보여준 건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은은하게, 깊어지기만 했다.
아무리 연기자라고 해도 감이 없는 친구들은 있고, 그런 친구들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변화기도 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알았다.
이 작은 변화는 연출과 편집을 거치면 둔한 시청자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장면으로 변한다. 그게 편집이란 마법이다. 하지만 그런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전제 조건은 앞서 말했듯이, 연기였다.
아무리 날고 기는 연출이라고 해도, 기본도 안 되는 연기로는 마법을 부릴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지영의 연기는 그 재료가 되기에 아주 충분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연출자라면 이렇게도 만져보고, 저렇게도 만져보고 싶은 욕구가 필연적으로 생길 정도까지 올라왔다. 이런 변화를 배우들이 먼저 알아차렸다.
사실 조연들은 대부분 잔뼈가 굵은 연기자들이었다.
이족이란 설정 특성상, 굉장히 자유분방하면서도 거친 몸짓과 행동들이 나와야 하는데 이건 어느 정도 짬이 차지 않은 배우들로는 소화 불가능했다. 그래서 충분히 커리어가 쌓인 배우들이 이 역할에 많이 투입됐다.
그래서 이들은 내공이 상당했다.
이 상당한 내공은, 연기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해줬고, 그래서 미묘한 차이를 확인한 그들의 마음가짐 또한 변했다. 아직 지영의 연기가 연기 경력 10년도 넘는 자신들을 잡아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전체적인 그림에서 눌릴 가능성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는 아주 큰 문제였다.
아무리 드라마라는 게 주인공이 살아야 그림이 좀 산다지만, 그렇다고 조연이 주연의 무게와 아우라에 확, 죽게 되면 다음에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야, 긴장해야겠는데?”
“…….”
“…….”
차분하게, 변한 연기를 펼치는 지영을 지켜보던 조연 한 명이 한 말에,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어, 막내. 왜?”
“지영이 형 연기가 변하긴 한 거예요? 제 눈엔 똑같은데?”
극에서도 막내, 실제로도 막내인 장오윤의 질문에 다른 배우들은 그냥 웃고 말았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니 보이지 않을 뿐이었고, 그건 잘못이 아니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거니까,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을 까맣게 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막내도 좀 더 경험 쌓이면 보일 거다.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가기나 해. 그럼 뭐가 됐든 간에 얻는 건 있을 테니까. 알았냐?”
“아, 넵!”
그래도 씩씩해서, 예쁨을 독차지하는 막내였다.
그렇게 주변의 시선을 바꾸어버린 지영은 사실 스스로는 아직 인식 전이었다. 그냥 예전처럼, 똑같이 하고 있었다. 배운 대로, 감정을 담고 덜고, 잘라내고, 풀어내고 하면서. 지영은 애초에 정통파가 아니었다.
연기를 제대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배운 연기자가 아니라 그냥 이미지와 느낌, 그리고 화제성으로만 캐스팅돼서 감각에 의존해 연기한 케이스였다. 그리고 요즘엔 이런 케이스는 확실히 드물었다.
제대로 검증된, 그런 배우를 쓰고 싶은 욕구들 때문이었다.
조연에는 들어갈지 몰라도, 주연으로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런데 지영은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배우였다.
그걸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기 수업도 받지만, 그 연기 수업도 사실은 체계적인 정통파 수업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단적인 느낌을 훨씬 극대화하는 수업에 가까웠다. 감각에 의존하는, 극히 위험한 스타일을 극대화하는 방법이었다. 실로 양날의 검이지만, 지금 당장은 지영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 되어줬다.
‘음?’
연기를 하다 말고 지영은 그 힘을 어느 순간 느끼기 시작했다. 지영은 감이 좋았다. 감각적인 배우니 당연히 감이 좋지만, 실제 눈치라고 부르는 것도 진짜 상당했다. 그래서 눈치챘다. 미묘하게 변한 배우들의 분위기. 그리고 자신과 합을 맞추는 배우의 열정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높았다.
연기자의 기운이라고 해야 할지, 열정이라고 해야 할지, 연기력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것들이 높게 보였다. 그래서 합을 맞추는 게, 이전보다 조금씩 힘이 들었다. 뭐랄까, 마치 내게서 목소리를 1이라도 더 높게 나오게 하려는 느낌?
그런 느낌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가진 힘에, 밀리지 않으려고 버티거나, 역으로 밀고 나오는 느낌? 그런 느낌이었다. 시합하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부드럽게 합을 맞추는 게 아니라, 적으로 만난 배우들은 그런 느낌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피가 보글보글 끓다가, 뜨겁게 혈관을 타고 돌면서 전신을 화르르 데우기 시작했다.
열기.
그런 상대의 기운에 동화되어, 자기도 모르게 집중한 지영은 현실과 연기의 경계선 어딘가로, 휙 날아가 버렸다.
* * *
사박사박.
수풀이 발에 밟혀 악 소리를 내며 몸져눕는 소리가 귀를 간질거렸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저 멀리, 샨 강으로 가는 제국 보급대가 곧 등장할 테니까. 여기서 에취! 소리라도 내면, 천하의 역적이 되는 거다.
후우.
감각을 죽였다.
곧 전투가 벌어질 테니, 무념무상으로 마음을 비우진 못했지만 덜어내고, 비워 내려 노력했다. 치르륵, 치르륵. 이상한 소리가 갑자기 나 눈동자만 굴려 아래로 내렸다.
뱀이었다.
꼬리에서 구슬 굴러가는 소리를 내는 뱀이 가죽신 바로 앞에 똬리를 틀고, 재를 위협했다.
독사였다.
물리면 해독제를 바로 복용해야 살아날 수 있는, 맹독을 가진 뱀이었다. 재수 없으면 살긴 살아도 물린 부위의 피부가 괴사해 무인으로서의 삶이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재의 눈빛은 여전히 여상 했다.
차분히, 이전과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뱀을 내려다보던 시선이, 다시금 앞으로 향했다. 이미 덜어지고 비워진 마음은 구슬 뱀의 등장에도 그리 동요하지 않았다.
두드, 두드드.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차는 소리를 낸다. 하나 천지를 요동시킬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기병대.’
말을 탄 일단의 무리다.
아니, 여기서는 일단의 무리가 아니라 제국의 기병대일 게 분명했다. 말을 타고 적진을 뚫는 기병대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무시무시했다. 특히 기동력이 느린 보병에게는 사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기병대가 만약 함께하고 있다면 작전은 실패다.
일백의 이족 전사의 위용은 어마어마하다. 숲과 산에서는 일천과 싸워도 능히 해볼 만할 정도로. 하지만 이 협곡 아래는 평야다. 보급대를 태우려면 당연히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평야에서 사냥꾼이 기병대를 상대하는 건 날 죽여 주소! 하고 목을 씻고 내미는 짓보다도 못하다.
차라리 그렇게 자살할 거면 그냥 이 협곡에서 뛰어내려 죽는 게 더 고통 없이 하늘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니 기병대가 아니기를 바라야 한다.
기병대여도, 그 수가 적거나 최소한 경기병이길 바라야 했다. 중갑을 걸쳤다면, 묵직한 중갑의 방어에 이족의 저격이 쉽게 통하지 않을 테니, 뒤로 물러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야밤에 샨강을 잠영으로 건너온 보람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 보람보다 더 중요한 건, 저 보급대가 샨강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고작 일백이지만, 이 인원으로 저 보급대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여기서 샨강까지는 이틀 거리.
‘절반이. 아니, 그 이상이 죽더라도…….’
보급대는 끝장낸다.
그걸 끝내지 못하면 샨강 너머 변방의 평야에 사는 이족이 가장 먼저 당할 거고, 그 뒤에 밀림과 산악에 사는 이족이 당할 거다. 그 수는 무려 수십만이다. 후는 절대로 끝을 보기 전엔 멈추지 않을 테니, 막아야 했다.
이는 연의 바람과는 반대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연의 목적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재였다.
뭐 어쨌든, 그렇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전투가 이제 벌어질 예정이라는 거, 뭐 그런 거다. 피식. 그에 실소를 흘리기 무섭게 꼬리를 파르르 떨던 구슬 뱀이 훅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짧게 스친 빛살에 목이 잘려 나갔다.
재는 도로 칼을 넣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지평선을 바라봤다.
땅 울림이 좀 더 심해졌다.
슬슬 모습을 보일 때가…… 됐다.
라고 생각한 순간 선두 전열이 한 바퀴를 돌아온 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기병이다.
역시.
경갑도 아닌, 철갑을 두른 기병대다.
심지어 가슴에는 악귀나찰이 음각되어 있었다.
북부의 중기병이었다.
전장에서는 악귀와 나찰이 되어, 제국을 수호한다는. 오죽하면 북부 세인 산맥 너머 이민족도 두려워한다는, 그 중기병이었다.
“지랄…… 환장하겠네.”
참지 못하고 나온 욕지기.
그런 재의 곁으로 선고가 바짝 붙었다. 그리고 선고의 행동에 별동대 일백이 귀를 활짝 열었다.
“쟤들, 세?”
“북부에선 저승사자로 불리는 놈들이야.”
“저승사자?”
“인간이 죽으면 영혼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찾아온다는 귀신 같은 놈 있어.”
“오, 우리도 있어. 카샨이라고. 전사가 죽으면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불새지. 그거랑 비슷한가 보네. 어쨌든, 그만큼 센 놈들이라는 거지?”
“응.”
그리고 하필이면…… 상성도 지랄이다. 궁병과 보병, 보병과 기병, 기병과 창병, 창병과 다시 궁병. 이는 기본적으로 상성을 얘기함이었다. 화살을 쏘는 궁병은, 방패를 착용한 보병에게는 쥐약이었다. 방패를 착용하고 적을 천천히 압박하는 보병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격해오는 기병에게 쥐약이고, 이런 기병은 기다란 장창으로 찔러대는 창병에게 약했다. 반대로 이런 창병은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 보니 멀리서 활을 쏴대는 궁병에게 약하다.
이런 상성을 생각했을 때, 기본적으로 궁병에 가까운 이족의 전사들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놓은 중기병에게는 쥐약일 수밖에 없었다. 갑옷의 이음새에 제대로 화살을 박아 넣지 않는 이상, 적은 죽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중기병이 무려 일백이다.
오십만 돼도 욕지기를 내뱉을 만한데, 전방에 칠십, 후방에 삼십이나 있었다. 이게 끝? 설마. 수만의 병력에게 가는 보급대인데 고작 일백으로 뭔 수비를 하겠나. 당연히 호위대는 따로 있었다.
‘예상했구나, 후.’
전권을 손에 거머쥔 승상 후는, 아무래도 자신이 보급대를 칠 거라고 예상한 것 같았다. 내정과 정치, 외교뿐만이 아니라 군략에도 밝다는 게 이제야 떠올랐다.
예전에 양부가 이런 말을 했다.
‘재야. 너는 몸을 쓰는 것에 정말 일가견이 있구나. 그런데 너무 그쪽으로만 몰려 있어 아쉽다.’
‘마치 너는 어린 승상 같구나. 어린 승상이 그랬지. 승상은 머리를 쓰는 쪽으로 모든 재능이 몰려 있거든.’
나쁜 건 아니란다.
‘쓰기 나름일 뿐이지. 흘흘. 그리고 너는, 충분히 잘해낼 게다. 이 아비는, 그리 믿는다. 그러니 너도 그리 믿도록 해라.’
후.
역적이나, 지닌 재능이 하늘에 닿았다는 평이 자자한 자.
말을 떼기도 전에, 글자를 뗐다는 불세출의 천재. 말하고 쓰기 시작할 때쯤, 당대의 승상을 감복시킨 시를 쓰기도 했다는, 진짜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는 만 리의 거리를 격해, 재의 의중을 뚫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가 만 리를 격해 뚫은 의중을, 깨부수겠다.
스윽.
각오를 다진 재는 몸을 돌렸다.
“재?”
“……미안한데.”
“응?”
“여기서 다 죽어줘야겠어.”
“…….”
이제까지의 어조로 죽음을 얘기하는데도, 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재의 말에 이족의 전사들은 피식 웃었다.
대답은 이들을 이끄는 대장, 선고가 했다.
“기꺼이.”
죽음을 각오한 것치곤 지나치게 화사한 연인의 미소라, 그것 하나는 천하의 재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예정대로 이곳에서, 보급대를 친다.
목숨을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