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54화
254화. 나의 무사님S2(1)
대군.
변방의 밀림과 대평야의 이족을 모았으니, 능히 대군이라 불릴 말한 규모의 병력이 모였다. 하지만 그 앞에 강 하나 너머에 모인 제국의 군대 앞에는 보름달 앞에 반딧불 정도의 규모일 뿐이었다.
규모 면에서 너무 상대되지 않았다.
재는 그런 병력의 차이를 심유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이보게.”
그런 재를 찾아온 이족의 대족장 강문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재를 불렀다. 재는 기색을 얼른 정돈했다. 일군을 이끄는 대족장이고, 그런 대족장이 가장 의지하는 게 바로 자신이다. 그러니 자신이 힘든 기색을 내보여서는 아니 되는 법이었다.
“네, 족장님.”
그리고 그건 대족장도 마찬가지였다.
어조에는 근심이 꼈으니, 표정에는 근심이 없었다. 자신의 표정을 본 수하들이 동요할까 봐 얼른 표정을 정돈한 것이다.
“내일 작전, 꼭 나가야겠나?”
“네. 가야 합니다.”
내일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히는 오늘 자정을 넘긴 직후를 말함이었다.
“자네는 부족의 중심이야. 자네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동요가 이만저만이 아닐걸세.”
“그래도 가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군을 통솔하는 것보단, 적당히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적진을 타격하는 게 더 성미에 맞습니다. 아니, 이 경우는 성미가 아니라 능력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래도. 그러니 자네에겐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소리야.”
“족장님. 그래도 가야 합니다. 제국의 보급대가 도착하면, 저들은 반드시 도하를 준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린 아직 준비가 채 되지 않았으니 적의 도하를 허용해서는 아니 되고요.”
“알지. 알지만…….”
재는 웃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제국의 추적을 피해 변방으로 도망쳐, 이족의 땅으로 들어섰다. 그중 가장 먼저 만나 부족의 족장이었던 강문이다. 그는 지금은 재와 가장 많이 전투를 치른 전사였다. 그러면서 생긴 전우애는 만만치 않게 깊고, 단단했다.
나이를 떠난, 전사 대 전사로서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강문이 대단한 게, 강문은 선고의 아버지였다. 이 작전은 선고도 함께 가는데 그는 선고보다는, 재를 오히려 더 걱정했다. 그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족의 전사는 싸우다 죽는 것 자체를 명예로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족이 아닌 재이기에, 그는 재가 싸우다 죽는 걸 명예라 생각하지 않았다.
문명의 수준은 분명 떨어지나, 도리와 이치는 오히려 이쪽이 더 밝다고 느끼는 재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꼭 살아서 돌아올 테니.”
“……후우, 그 고집을 누가 꺾겠나. 알겠네. 내 기다리지.”
강문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하고 말았다. 그러곤 돌아섰다. 끝까지 딸을 부탁한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강문이 떠나자 힐끔, 밤하늘을 보는 재.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위험한 작전이었다.
제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보급대를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냥 보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보급대를 고작 일백의 전사를 이끌고 친다. 손발을 자주 맞추긴 했지만, 그래봐야 고작 일백이다. 저 건너편의 수만 병력에 비하면 정말 새 발의 피일 정도로 작은 병력이다.
“그래도 해야겠지.”
다시 적군을 보며 재는 조용히 읊조렸다.
무모하고, 위험한 작전임은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재는 그렇기에 반드시 치러야 하는 전투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직 이족의 군대는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제국의 군대가 샨강을 향해 먼저 왔기에 가능한 병력부터 끌고 와 진을 쳐 막았지만, 적군이 만약 무사히 도하를 한다면 개인의 기량으로 제국의 군대를 깨부수는 건 솔직히 힘들었다. 하물며…….
“저 군대에 동부의 철갑대와 서부의 송곳부대가 일부지만 합류했으니 더더욱 힘들 거고.”
제국이 자랑하는 정예 중의 정예였다.
동부의 철갑대는 방패병인데, 기병의 돌격조차 막을 정도로 견고한 방어력을 자랑했고, 서부의 송곳은 무엇이든 뚫어낸다는 얘기가 파다한 부대였다. 그 전체가 오지 않았지만 재는 분명 보면서 그 전체를 파악했다.
일부.
하나, 일부라지만 적어도 일천은 되어 보였다.
철갑이 앞을 막고, 송곳이 뒤에서 장창으로 찌르기 시작하면 훈련되지 않은 이족의 군대로 상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재는 숙고 끝에, 보급대를 치기로 했다. 보급대를 쳐 도하를 늦추고, 이쪽의 보급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되지 않으면, 전쟁은 시작과 동시에 끝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 강은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배수의 진이라고 재는 생각하기로 한 상태였다. 그래서 지킬 작정이었다. 이곳을 지켜야 이족을 지키고, 공주를 지키고,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으니.
“재!”
홰액!
날다람쥐처럼 연인 선고가 어둠을 가르고 달려오고 있었다. 급한 표정이 아니니 뭔 일이 있어서 저리 빨리 달려오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감정 표현이 또렷해서……. 와락! 안기러 달려오는 거였다.
“어이고, 넘어진다니까.”
“음? 이 천하의 선고가 달리다 넘어져? 무슨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야.”
“나는 선고야. 원숭이가 아니라!”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는 선고.
주변에서 지켜보는 병사들이 있음에도 그녀는 재의 허리에 매달려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재를 올려다봤다.
“재, 저녁은?”
“먹었지. 준비는 끝났어?”
“응! 다들 준비 중이야. 재만 오기만 하면 돼.”
“그래? 슬슬 시간이니…… 가볼까?”
“응!”
밝게 웃는, 선고.
그런 선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는 재. 그리고 그런 둘을 멀찍이서, 담담하게 바라보는 연.
세 사람을 지켜보던 구름이 슬그머니 다가와 달빛을 가렸다.
* * *
컷!
만족스러운 신이었다.
감독 홍진아는 특히, 지영의 연기에 주목했다.
‘깊어졌어. 역시 그 사건이…….’
확실히 깊어진 시선과 감정이었다.
홍진아는 연출을 맡았고, 그렇기에 배우가 연기에 담은 내밀한 감정을 파악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근자에 들어 지영의 연기가 작년에 비해 확실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이전에도 강지영이란 신인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신인의 연기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어색함이었다.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어색한 연기력과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장 등은 작품 자체에 해를 입혔다.
‘시청자들이 그래서 아이돌을 싫어하지.’
그래도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배역을 맡은 신인들은 그나마 낫다. 이 애들은 적어도 기본은 갖췄으니까. 홍진아도 이런 신인들은 그리 꺼리진 않는다. 애초에 경력 있는 신입을 뽑는 건 연예계에서는 불가능하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신인은 자라지도 못한다. 능력이 되는 애들만 뽑는 것도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문화 강국이고, 한 해에 수없이 많은 콘텐츠가 생산된다. 그걸 능력 있는 사람들끼리만?
기회를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다 해 먹으면 뭐 당장이야 좋을 거다.
하지만 나중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계속해서 기회를 줘 신인을 중견으로 키워야 하는 법이었다. 그건 홍진아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돌은 싫었다.
아이돌 중에서도 연기를 제대로 배웠다면 오케이. 타고난 재능이 있다면 그것도 오케이다. 하지만 그냥 이름값으로 들어와 연기를 시작하는 아이돌을 보면, 쌍욕을 박아 넣고 싶은 욕구를 홍진아도 매우 많이 느꼈었다.
지영은 그런 아이돌에 가까웠다.
아이돌은 아이돌인데, 타고난 재능으로 특정 장르의 캐릭터는 정말 찰떡같이 소화하는 배우였다.
작년 나의 무사님 후반부에 들어왔을 때 그녀가 지영의 연기를 보며 느꼈던 건, 잘한다였다. 말 그대로 잘했다. 배역에 전혀 어색하지 않게 녹아들었고, 고난도 액션도 전부 소화할 정도로 몸도 잘 썼다. 발음도 나쁘지 않아서 전달력도 상당했다. 신인이지만, 확실히 재능을 갖추고 태어난 신인이었다.
그리고 그런 재능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의 인기와 화제를 등에 업은 친구기도 했다.
뭐 여하튼, 지영의 연기력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늘, 지영의 눈빛과 표정 연기를 본 홍진아는 이전의 평가를 수정해야만 했다. 이전에는 잘한다였다.
정말 말 그대로 잘한다였다.
하지만 오늘은?
깊었다.
연기에 깊이가 생겼다.
아주 짧은 틈이지만, 고뇌와 걱정 등이 담긴 심적인 변화가 눈빛이 찰나 파르륵! 스쳐 지나가는 게 연출인 그녀의 눈엔 확실히 보였다. 아주 미묘한 표정의 변화지만, 그녀는 제대로 분명히 봤다.
“책임감 또한 같이.”
극 중 설정상, 제국의 추적대가 이족의 부족민을 죽여서 명분을 먼저 부여하긴 했지만, 그래도 재와 연이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녀 전쟁에 동원한다는 설정 또한 확실히 가미가 되어 있었다. 그럼 극 중 재는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책임감이 있어야 했다.
미안함도 있어야 했다.
전쟁이 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기에, 이런 두 가지 감정을 느껴야 했다. 사실 나의 무사님 시즌 1 때는 그런 느낌이 조금은 약했다. 아직 감정 연기가 원숙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디렉팅을 봐주지 않는 이상 종종 놓치기도 했다.
그리고 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제대로이진 못했다.
좀 티가 나는. 아 나 지금 고민 중이고, 미안한 중입니다! 하고 느껴지는 표정의 변화였다. 지금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스윽 스쳐 가는 게 아니라. 대놓고 짓는 표정이라 인위적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일절 없었다.
그래서 홍진아가 깊어졌다고 생각한 거였다.
“이여, 이거 참…….”
그리고 그런 변화를 연기 내공이 되는 조연들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선고의 후반부는 좀 밝았다. 치열한 모습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감정의 변화를 제대로 잡는 신은 없었다. 그래서 다들 짧은 감정 신은 처음 봤다.
보고,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전부 놀랐다.
특히 그중, 짧게 같이 호흡을 맞춘 황덕수가 가장 놀랐다.
“직접 해보니까 어때요?”
홍진아가 내심을 숨기지 않고 살짝만 돌려 그렇게 묻자.
“카메라에 제대로 담기는 깊이가 있습디다. 이야. 역시 인간은 사건 사고를 겪어야 강해지고 깊어진다더니……. 허 참.”
“그 정도였어요?”
“지금은 짧아서 큰 임팩트는 없었고, 나중에 진짜 제대로 감정 잡는 신 찍으면 아마 또 다를 것 같습니다. 이거, 우리 홍 감독님 찍을 맛 좀 나겠는데?”
황덕수의 말에 홍진아가 씩 웃었다.
“안 그래도 기대심이 마구 피어나는 중이에요. 아, 이걸 정 작가가 봤어야 했는데.”
“봤어요.”
“보던디?”
힉!
깜짝 놀란 홍진아 PD가 데인 것처럼 돌아섰고, 피곤함이 가득한 정은정 작가를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진짜 피곤함이 가득한데,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지영이 천재라면, 홍진아는 이 눈앞에 작가도 천재라고 생각했다.
비슷하지만 결이 다른 천재.
그 천재는 딱 봐도, 자극받은 얼굴이었다.
“대본 또 고치게요?”
“조금요, 조금만.”
“……쪽 대본은 안 됩니다?”
“네.”
정은정 작가는 네, 라는 대답만 남기고 바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하여간 이해하기 힘든 천재라는 족속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천재를 자극한 다른 천재가 다가왔다. 담백한 표정이었다. 지금 자신이 천재를 자극했다는 건 꿈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순진무구란 느낌은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느낌을 풍겼다.
“감독님.”
“응, 지영 배우. 왜?”
“저, 한 번만 다시 가볼 수 있을까요?”
“다시? 나쁠 건 없지. 나쁠 건 없는데, 그래도 일단 영상 확인부터 해볼까?”
“네.”
괜히 뻐기고 싶어 다시 찍자는 건 아닌 느낌이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고.
‘그럼 본인이 뭔가 부족한 부분을 찾았다는 건데…….’
재밌네?
시키는 대로만의 연기를 하는 연기자에서, 능동적으로 문제를 찾아 나서는 연기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새 전작이 끝나고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한껏 원숙해져서 돌아온 주연 배우.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인기와 화제를 업고 온 주연 배우.
홍진아는 생각했다.
‘이 정도 조건으로 흥행시키지 못하면…… 접어야지.’
그녀는 정말 흥행에 실패하면.
다 때려치우고 카페나 열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기 손이 계란프라이도 제대로 못 하는 똥손이라는 걸 아는 홍진아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정말, 영혼을 갈아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무사님 시즌2는, 시작부터 시즌1과는 다른 분위기를 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