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44화
244화. 방송(13)
뭐든, 극단은 문제가 된다.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관계는 물론 종교, 기술, 정치, 외교 등등 과한 건 항상 부족하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해왔다. 이는 예술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다. 일각에선, 혹은 본인들 스스로는 과하면 뭐? 그게 예술인데! 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그래도 과한 건 언제나 만인의 지탄 받아왔고, 주변을 힘들게 했으며, 죄 없는 사람에게 피해를 줬었다.
지금도 그랬다.
지영은 이 문제 때문에 과사에 들러 상황을 요약해 설명하고 강의를 전부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영에게 기사 링크를 보내고 즉시 출발한 임은진과 함께 서울로 향하면서, 지영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혹시?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지영은 언제나 과하게 나오는 인간들에게 피해를 봐왔기 때문이었다. 과한 행동. 그건 요즘 한국에선 선을 넘었다고 표현했다. 기자들이 그랬고. 일본 유도 협회가 그랬다.
그들은 언제나 과하게 움직여 선을 넘었고, 지영을 귀찮고 피곤하게 했다.
때론 힘들게도 했다. 그래서 지영은 이번에도 혹시? 하는 생각을 안 했던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혹시나 했던 것처럼 이번 사건이 터졌다.
지영은 다시 기사를 확인했다.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였다.
‘라피앙. 라피앙 파벨로.’
프랑스의 출신이고, 남자였다.
나이는 30대 중반이었다. 대표작은 없었다. 예술에 입문했고, 예술로 성공하기를 소망하는 수없이 많은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라피앙은 정확하게, 자신이 만든 유도복 작품 위에다가 피를 뿌렸다. 어떻게 뿌렸냐면, 그 위에다가 팔을 뻗어서 칼로 쭉 그었다. 트릭일 수도 있지만, 영상은 트릭이 아니었다. 실제였다.
그는 이미 몇 차례나 자신의 SNS에 사고를 치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물론 그걸 전부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영이 자는 동안 이미 전문가까지 동원되어 영상은 거짓이 아님이 확인됐다. 즉, 진실이란 뜻이다.
그래서 답답하고 속이 쓰렸다.
광기에 휩싸인 예술가. 이런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을 지영은 모른다. 아무리 회귀했어도, 지영이 살았던 시간에는 그런 상대법이 없었다.
차는 서울에 도착했다.
벌어질 일이 벌어졌단 반응의 기사를 보며 지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 벌어질 일이 벌어져?’
뭔 개소린데, 그게?
지영은 이때다 싶어서 다시 지영을 공격하는 기사를 보며, 순간 참기 힘든 짜증이 올라옴을 느꼈다. 하지만 가까스로 그걸 도로 내리눌렀다. 지금은 임은진밖에 없는데 여기서 짜증을 내면 운전 중인 그녀가 놀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
최대한 이성적으로.
그래야 이 난관을 이겨낼 수 있다.
회사에 도착했다.
임원분들과 오늘 촬영 스케줄이 있는데도 뒤로 미룬 장세리 선배가 회의실에 모여 지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영이 자리에 앉자, 대책 회의가 시작됐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라피앙 파벨로란 예술가의 마음입니다.”
“마음이요?”
“네.”
슥.
피곤한 표정의 황의수 실장의 말에, 장세리는 더 얘기해 보란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아예 회의실 정면에 한 인물을 사진을 올렸다.
지영도 기사로 본 라피앙 파벨로였다.
곱슬머리에, 창백한 느낌을 주는 30대 중반의 프랑스인.
프랑스인 특유의 콧대가 인상적이지만, 지영의 눈엔 마치 감정이 거세된 것처럼 느껴지는 눈빛이 더 인상적이었다.
“라피앙 파벨로. 나이 서른여섯. 결혼했고, 현재 딸이 하나 있다고 하네요. 어려서부터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라피앙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진로를 잡고,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한 초기에는 제법 두각을 드러내는 젊은 예술가로 불렸지만, 신기하게도 결혼하면서 경력이 단절됩니다. 아내가 좋은 회사에 다녀 그가 육아를 대신 보게 된 거죠. 그리고 이 경력 단절은, 라피앙 파벨로의 재능을 조용히 살해합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장세리 대표의 말에.
“그가 SNS에 남긴 넋두리 발췌입니다. 즉, 본인이 내린 자가 진단인 셈이죠.”
왕희수 실장은 그렇게 대답했고.
“흠…….”
장세리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지영도 그 말에 수긍했다. 본인이 그렇다고 한다면, 의사가 다른 진단을 내려도 저 말을 믿는 게 나았다. 저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면, 말 같지 않아도 그게 진짜 속내일 테니까 말이다.
“이어가겠습니다. 이런 라피앙 파벨로의 SNS를 통해 확인한 건, 그가 굉장히 고집이 세다는 점입니다. 특히 댓글을 확인해 보면 나오는데, 그는 예술 작품을 올렸을 때 일어난 논쟁에서 자기주장을 굽힌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완전히 혼자만의 세상에 빠진 건 아니지만, 상대를 내 생각으로 감화시키려는 노력이 상당히 많이 보여요.”
이런 걸 벌써…….
역시 전문가들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지금 상황에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라피앙 파벨로가 영상에서 말한 것처럼, 정말 죽음까지 작정했냐는 부분이에요. 이런 경우는 보통 허세, 과대포장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게 맞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벌어진 영역이 예술의 세계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계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사회 전체를 논리 세계로 본다면, 예술 세계 한 곳은 절대 그렇게 부를 수 없었다. 논리적이지 못한 세계. 사실은 논리적이지만, 많은 이들이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 예술계였다.
그러니 라피앙의 말이 무시되지 못하는 거다.
하아.
한숨을 쉰 장세리 대표가 물었다.
“그럼 저 라피앙이란 예술가가 지금, 자신을 목숨과 지영의 평판을 인질로 삼은 테러리스트라는 거지?”
“네.”
테러리스트.
과격하기까지 한 단어였다.
하지만 라피앙의 지금 행동은 충분히 그렇게 불려도 무방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그는 본인의 목숨으로 지영을 걸어서 협박 중이었다. 이는 테러리스트의 수법과 매우 흡사했다. 아니, 똑같았다.
“후우. 그럼 어떻게 하나? 지영이가 진짜 누구 걸 하나 골라야 해?”
“그럼 테러리스트에게 굴복했단 오명을 뒤집어쓸 겁니다.”
왕희수 실장의 냉정한 답변.
새벽에 나온 그녀는, 지영을 힐끔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원망이나 그런 건 없었다. 그냥 이게 내 일이니까, 내가 한다는 느낌만 있었다. 귀찮아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에 지영은 감사함을 느꼈다.
“그러다 정말 저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면요?”
지영의 질문에.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지영 배우가 이 문제에 부담을 느껴 작품을 선택한다면, 그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방법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왜요?”
“지금 강지영 배우의 이미지는 엄청나거든요. 루이비통의 작품을 거절한 건 우스울 정도로 올라왔어요. 사실 저도 그때 CF를 거절한 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강지영 배우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 때문에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보내온 걸 보면 단독 CF도 아니고, 그냥 스쳐 가는 모델 중 하나일 뿐이거든요. 노출되어 봐야, 한…… 2초 정도? 그 2초를 위해 목숨을 거는 모델계이긴 하지만, 지영 배우는 아니니까요.”
왕희수의 말이 맞았다.
실제로 제대로 날아온 제안서를 보면 지영의 단독 CF가 아니었다. 지영은 유도복과 나의 무사님 재를 연상시키는 무복을 입고 짧게 스윽, 스쳐 가는 역할이었다. 그 사실 그걸 모르고 거절한 거지만, 알았다면 더 쉽게 거절했을 정도로 대우는 별로였다.
그런데 그 결과, 지영은 지금 예술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존재가 됐다.
지금은 전 세계가, 지영의 선택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무자비한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깨갱! 하고 꼬리를 말 것인가.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복잡했다.
지영은 솔직히 이 문제를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지, 그 어느 쪽도 고르지 못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지영이라고 해도, 이런 문제를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하기에는, 경험 자체가 일천 했다.
사람의 목숨.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선택은 신중해야 했다. 여기서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게 베스트다. 라피앙 파벨로의 저 말이, 단순한 허장성세이길 바라는 게 최고였다. 사실 예술계에서도 정말 자신의 예술성 때문에, 그 예술을 위한 광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아무리 예술이라고 해도.
정말로 과연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간의 욕구 중 생존에 관한 욕구는 거의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고 강력했다. 수면욕과 식욕, 성욕은 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생존 욕구만큼은 돌발 상황에서도 훅 튀어나올 정도로 강력하다. 삶을 접어야 할 만큼 너무나 힘든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예술 그 하나만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는 어렵다.
특히, 가정이 있고 며칠 전까지 단란한 모습을 SNS에 올리던 인간이 말이다.
그러니 의심해도 좋았다.
“저게 단순히 화제를 얻기 위해서일 가능성도 있는 거지?”
장세리 대표의 말에 왕희수 실장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사실 저는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어요. 지금 이 유행은, 생각보다 대유행이거든요. 그리고 누구 하나가 선택되면 그 하나가 승리자가 된다는 것 때문에,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열의가 상당해요. 그러니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생각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래도 지영이가 자기 거를 안 고르면 말짱 도루묵 아냐?”
“아니요. 이미 그는 화제성을 얻었어요. 라피앙 파벨로란 이름은 오늘 하루 동안은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리고, 가장 많이 타이핑되었을 겁니다. 한국은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오늘 하루 동안 가장 많이 불렸죠. 이게 각인 효과예요. 그리고 예술계에서, 이 각인 효과는 솔직히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쪽 연예계와도 비슷해요. 특히 무명 신인들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이름을 알려야 하잖아요?”
왕희수 실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이라는 게 그랬다.
수많은 회사에서 신인을 키울 때, 어떻게든 화제성을 키우기 위해 발악했다. 한 번이라도 더 언급되고, 한 번이라도 더 기사를 내야 사람들이 아아, 걔네. 하고 이름이라도 기억해 주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건 뭘 하거나, 어떤 방송에 나오든 아주 작고 작아도 미약한 관심으로 돌아온다.
아예 이름도 모르는 것과 이름이라도 기억하는 것의 차이는 정말 극과 극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대중에게 노출시킨다. 예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건 예술이 아니었다. 혼자만의 만족? 그건 취미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거고, 예술을 업으로 삼았다면 필연적으로 선보이고, 선택받아야 하는 거였다.
그걸 위해서 이 ‘쇼’를 기획했을 가능성도 다분했다.
그리고 왕희수 실장은 사실 그렇게 이미 진단을 내린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지켜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몇 시간 내로 다른 액션이 더 있을 거예요. 그리고 솔직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렵게 구축한 이미지잖아요? 그러니 최대한 지킬 수 있으면 지켜봐야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렵게 구축한 이미지라.
딱 맞는 말이지만 지영은 그런 이미지는 솔직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에게나 그런 거지, 이들에게는 당연히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사람을 키우는 사람들.
무명이었던 사람을, 유명하게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얼마나 소중한지 정도는 이미 지영도 임은진과 함께하며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본다.
그의 의도가 좀 더 명확해질 때까지.
“그럼, 일단 좀 더 두고 보는 걸로 하고 회의는 끝냅시다.”
장세리가 그렇게 회의를 끝내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라피앙 파벨로의 두 번째 영상이 중지된 SNS 말고, 다른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공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