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41화
241화. 방송(10)
패션은 경쟁이다.
이곳만큼, 경쟁이 두드러지는 곳은 경쟁 자체가 존재 이유인 스포츠계 빼고는 아마 없을 것이다.
각 브랜드는, 각 브랜드만의 느낌이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패션은, 시대를 앞서가기도 하지만 시대를 역행하기도 하며, 시대를 무시하기도 했다.
트렌드를 추구하지만, 트렌드를 무시하기도 했다.
추구하는 이상도 다르고, 지키려는 가치도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게 있다면, 각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경쟁심리였다. 모든 브랜드가 그렇지만 패션 쪽은 한 번 다른 브랜드에 밀렸다, 생각되면 가치의 하락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이는 차나 핸드폰 같은 기계처럼 제품 성능이 수치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인식.
누가 이겼고, 누가 졌다고 생각하는 소비자의 생각이 브랜드 간의 순위를 매길 때도 있었다. 때로는 시총과 매출 자체를 무시하고도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아주 유명한 셀럽이 있다고 치자.
이 셀럽의 선택은 언제나 최고였다고 치자.
그런 셀럽이 한 브랜드는 걷어차고, 똑같은 분야의 다른 브랜드를 선택했다.
차량으로 따지면 A사를 거절하고 B사를 선택한 거고.
의상으로 따져도 N사를 거절하고 A사를 선택한 거다.
그런데 이 거절이, 단순히 계약 내용의 문제로 틀어진 게 아니라 아예 그냥 까인 거라면? 협상 테이블 자체에 올라가지 못하고 그냥 차인 거라면?
그럼 이때부터는 단순 취향 차이도 아니고, 계약 문제도 아니다.
이때부터는 그 브랜드의 인식은, ‘선택받지 못한 브랜드’가 된다.
전체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유명한 셀럽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다.
패션 브랜드는 사랑이 기본이었다.
소비자에게 선택받고, 사랑받아야만 했다. 그들이 소비자를 선택할 수 없기에 더욱 그랬다. 에르메스 같은 경우야 지독히 한정적으로 제품을 생산하다 보니, 제품이 소비자를 선택한단 이미지가 있지만 다른 브랜드는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제품을 홍보해 줄 모델에겐 갑이어도, 소비자에겐 을일 수밖에 없었다.
너 말고도 사줄 사람은 많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밖으로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 소비자를 졸로 보고 막말하고 막 대하는 순간 세계수급 거목이라도 단숨에 뿌리째 뽑힐 수도 있었다. 특히 형상화된 이미지 자체를 팔아서 먹고사는 브랜드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게 현실이었다.
아무리 콧대가 높은 브랜드라고 해도, 소비자를 무시하곤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수잔 루이는 작품을 태웠다.
그 영상 아래에는 아무런 코멘트도 없었지만, 그녀가 작품을 태웠다는 것 자체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까였다.
차였다.
선택받지 못했다.
천하의 루이비통 디자이너 수잔 루이가, 차였다.
화르르 불타는 영상.
그 영상 아래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영어와 불어를 포함해 세계 각국의 언어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에는 한국어도 있었다. 4월 초 주말을 뜨겁게 달궜던 사건이 괴상한 방향으로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했다.
말 그대로, 딱 그렇게 마무리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보였던 것뿐이었다.
* * *
대단하다.
임은진이 수잔 루이의 SNS를 보면서 터뜨린 감탄사였다. 그래서 지영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요?”
“지영이 넌 이게 어떻게 보여? 아니, 어떤 의도로 보여?”
“음…… 그냥 화나서 불태웠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럴 일은 없고.”
1차원적으로 보면 그게 전부였다.
지영에게 까인 수잔이 분노를 풀 길이 없어 제 작품을 태웠다. 이렇게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영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수잔 루이를 못 만나봤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이미 한차례 봤었기 때문에 저 영상에 담긴 메시지는 그런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곧장 들었다.
지영이 봤던 수잔은 전형적인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막 나가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만약 그런 성격이었다면 한국에 오자마자 지영을 향해 달려왔어야 하고, 멱살을 잡은 채 왜! 왜 거절했는데! 이렇게 소리치며 흔들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한국 여행을 즐겼고, 돌아가기 전날 지영을 찾았다.
그리고 대화 때도 그랬다. 나중에 열을 내긴 했지만, 그 이전까진 속내를 숨길 줄 알고, 연기도 충분히 잘하는 불여우의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끝내 대화는 평행선을 걸었다.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갈라섰다. 그녀는 그길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그런데, 프랑스까지 향하면서도 분노가 식지 않아서 끙끙대다가 화형식 영상을 업데이트했다?
지영도 그럴 가능성이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냥 도복만 태우고 말았을 거다. 영상은 올라오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영상이 올라왔다. CCTV도 아니고, 분명 제대로 구도를 잡아서 찍은 영상이었다.
“의도가 분명히 있는데, 흠. 누난 아세요?”
“내가 수잔 루이가 아니니 정확하다고는 못하겠지? 하지만 의도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
의도?
“뭔데요?”
“나 혼자 죽진 않겠다?”
“네?”
지영은 이번엔 단숨에 이해하지 못했다.
혼자 죽지 않겠다니. 뭔 뜻일까? 지영이 더 얘기해 달라고 바라봤지만, 임은진은 흥, 하고 놀리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너 때문에 이번에 마음고생 한 벌이야. 이다음은 너 혼자 알아내 봐!”
“……네.”
단순 협찬도 아니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었다는 데도 거절해서 임은진은 솔직히 처음으로 지영을 원망했었다. 이런 관계가 계속되면, 잘하면 지영이 루이비통의 뮤즈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단 생각 때문이었다.
시작부터 뮤즈의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지속해서 영감을 주어 뮤즈가 되기도 하니까. 임은진의 그런 생각은 이상한 건 아니었다.
배우의 위상은 매니저의 위상이기도 한 이 바닥이니, 지영은 임은진에게 미안했다.
수잔 루이.
한 디자이너 때문에 가뜩이나 피곤했는데, 솔직히 이제는 제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이 들었다.
뮤즈?
모델?
CF?
돈?
명예?
다 필요 없다.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충족을 이길 수 있는 건, 지영에게는 없었다. 우정, 그리고 가족은 아예 논외다.
그래서 지영은 그냥 신경을 잠시간이라도 끄기로 했다.
이제 곧 액션 스쿨에 도착하고, 정신 못 차리면 부상으로 이어질 고강도 훈련이 시작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시 충실히 스케줄을 이어 나가는 지영은, 시합이 10일 남은 시점에 임은진이 했던 얘기를 다시 기사로 접했다.
* * *
그들만의 세상.
지영은 수잔의 SNS에서 시작된 그들만의 세상일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같이 밥을 먹던 친구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훈련이 끝나고 알았다.
수잔의 영상을 보고, 조롱을 날렸던 디자이너들이 그녀와 설전을 벌인 끝에, 지영을 자신의 ‘쇼’에 세우거나 도복을 입히고 말겠다는 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사건이 터졌음을.
시작의 발단은, 어떤 디자이너가 수잔을 조롱한 걸로 시작됐다. 그녀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브랜드에 소속된 그 디자이너의 조롱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받아쳤다. 즉시 그곳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몇몇 디자이너가 더 참전해 수잔을 조롱했다.
그런 조롱이 벌어진 이유는 임은진의 말을 따르면.
수잔을 조롱하고, 그녀가 지면 루이비통의 명예가 떨어진다. 이런 느낌일 거라고 했다. 즉, 조롱조차 의도적이었단 소리다. 수잔의 소속 브랜드의 아성이 워낙에 견고하다 보니까,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려면 SNS에서 총성 없는 전쟁은 자주 벌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수잔은 그 장작을 직접 준비해서 모두가 쓸 수 있도록 공평하게 정중앙에 떡하니 던져놓았다.
그리고 그 장작에 불을 붙여, 자신에게 던져주길 원했다.
실질적으로 자신을 불태워야 하는 화형식. 그 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냐고?
이게 중요했다.
‘역시 여우가 맞아. 대단하다, 진짜.’
이미 루이비통은 공식 SNS를 통해 지영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리고 지영은 공식적으로 거절했고. 그러자 담당 디자이너가 곧장 한국으로 날아왔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얘기였다. 이미 기사로도 나갔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도 없이 업계 관계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얘기였다.
문제는, 업계 관계자들이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이렇게까지 일이 벌어졌는데 조용하다? 잠잠하다 아무런 액션이 없다? 어째서? 천하의 루이비통이 공식적인 행보를 벌였는데? 그렇다면 결국엔, 진짜로 까였다는 게 언제고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지영이 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밝혀질 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고고한 자존심이, 소비자도 아닌 모델 선정 시작부터 까였다는 게, 그들에겐 진짜 큰 문제였다. 앞서 말했듯 소비자에겐 선택받아도, 그 외적으로는 자신들이 선택해야만 하는 게 그들이었다.
그래서 화형식이 펼쳐진 거다.
“와, 혼자 안 죽겠다고 저러는 건 진짜 쇼킹하다. 역시 우리랑은 사는 세계가 다르네. 우와…….”
이성진이 닭가슴살을 인상을 팍 쓰며 먹으며 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화형식. 그녀는 자신을 불태워, 불나방들을 모았다. 왜 불나방들을 모았냐고? 극히 심플한 이유 때문이었다.
혼자는, 죽지 않겠다.
다 같이 죽자.
나만 까인 게 아니라, 다 같이 까이자.
이게 바로 이유였다.
그녀가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는, 지영이 자신들뿐만이 아니라 어디가 제안하더라도 거절할 걸 알아서였다. CF고, 앰버서더고 뭐고 아무런 관심도 없는 모습을 지영이 보였고, 수잔이 그걸 확인했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불태워 지금의 ‘쇼’를 만들어냈다.
‘내가 어차피 다 거절할 걸 알 테니까.’
만약 지영이 다른 곳을 선택하게 되면 그녀는 진짜 어마어마한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녀는 그만큼 확신했다. 지영을 처음 보자마자 정말 관심이 없음을 간파한 감이 기본 바탕이 되었을 거다.
그렇게 시작되어, 그녀는 자신을 조롱한 다른 브랜드의 디자이너 말에 욱하면서도 역으로 살살 자극했다.
어이 수잔! 동양의 햇병아리한테 차였다며? 쯔쯔, 어쩌다가 루이비통의 디자이너가 그런 꼴을 당하는 거야? 감이 너무 죽은 거 아니야?
동종업계의 라이벌이자 같은 업을 짊어진 종사자의 놀림을.
빌어먹을! 안 그래도 기분 별로니까 건드리지 말아줄래? 그리고 너! 너는 뭐 다를 줄 알아? 너는 더 어림도 없었어!
이런 식으로 스윽, 긁어댔다.
그렇게 하나도 아니고 전부, 제대로 긁어버렸다. 그 결과 눈치 빠른 몇몇은 빠르게 탈출했다. 하지만 탈출하지 않고 수잔의 역도발에 걸린 이들은 발끈했고, 그건 곧 일종의 대결이 됐다. 내가 해서 되면 어떡할래? 하는 얘기에 무릎 꿇고 발등에 키스라도 해주지! 라고 대답한 수잔의 일갈에 혹한 이들이 너도나도 참전했다.
그리고 그 기록은 화형식 영상에 고스란히 남았다.
이게 영상이 올라가고 근 10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디자이너가 결국 SNS를 통해 지영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는 무려 유도복에 진짜 순금으로 자사 브랜드의 로고를 어깨에 멋들어지게 박아서, SNS에 올렸다. 성인 남성 손바닥 크기의 브랜드 로고가, 무려 순금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도복은 기능성 제품이다.
의도한 대로 쓰이지 않으면, 빛이 바래는 제품이었다.
그런데 가장 많이 잡는 어깨 부분에 순금으로 로고를? 그것도 양쪽으로? 그걸로 기능성이 완전히 죽어버렸다.
그다음은? 더 가관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더 가관이었고.
소위, 예술 좀 한다는 인간들의 광기가 미친 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시류가 만들어졌다. 거기다 그걸 보고 조롱을 날리면, 조롱당한 사람이 그 사람을 지목해서 네가 해보라는 식으로 얘기를 던졌는데, 그걸 그 사람이 또 받았다.
그게 이어지면서 마치 버킷 챌린저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미친 듯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지영은 깨달았다.
어쩌면, 이 자체가 수잔의 복수일 수도 있다는 게.
자신에게 보내줄 테니 주소를 내놓으라고 발악하는 광인들을 보면, 그냥 저절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은, 지영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