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40화
240화. 방송(9)
수잔 루이.
이게 실명인지, 아니면 연예인들처럼 쓰는 디자이너 닉네임인지, 그건 확실치 않았다. 이런 수잔 루이에 대해 지영이 아는 건, 루이비통의 디자이너라는 점밖에 없었다. 따로 알아보고 싶어도 이상하게 이 여자에 관한 기사는 거의 없었다.
외국 검색 사이트를 이용해도 마찬가지.
인스타는 있어서 그래도 좀 알아볼 수 있긴 했지만, 인스타로 알 수 있었던 건 한국 연예인과 비슷하단 점이었다.
야경 사진.
명품 사진.
호화로움을 자랑하는, 그런 인스타.
허세, 허영이 아닌 진짜 자신의 것을 당당히 드러내는 예술가.
지영이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인터넷이란 공간에서는 확! 눈에 들어오는 뭔가는 없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좀 수수하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 그 정도였다.
그리고 직접 만난 지금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팍 들었다.
예술가는 흔히 괴팍하다고들 하는데, 수잔 루이에게는 그런 느낌이 제대로 묻어났다. 그리고 마냥 어린 것도 아니라서 어떻게든 작업을 하겠다는 의지가 팍팍 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지영은 깨달았다.
‘열받았구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예술가의 분노가 짜르르하게 느껴졌다. 지영은 감이 좋았다. 보통 이쪽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감이 안 좋은 경우는 거의 없으니, 지영이 딱히 특별한 건 아니었다. 수잔 루이가 지영이 루이비통에 정말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본 것처럼, 지영도 이 여자가 자신이 거절했기 때문에 화가 나서 즉흥적으로 한국행을 선택했다는 걸 알아본 정도였다.
‘이거 참…….’
거절은 이미 했다.
그래서 지영은 처음엔 상대가 자신을 다시 설득하기 위해 연락했을 거로 생각했고, 실제로 그게 맞긴 맞았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보니 미묘하게 달랐다.
음.
‘구걸하지는 않겠다는 건가?’
예술가.
그것도 루이비통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명품 브랜드에 소속된 예술가이기에, 이미 거절당했으니 다시 구애하지는 않겠다는 느낌이 났다. 지영은 그럼 이 자리가 왜 만들어진 걸까? 그게 궁금해졌다.
궁금했던 걸까?
천하의 루이비통을 거절한 자신이?
“한국은 어떠세요?”
그래서 지영은 그런 질문을 던졌다.
굳이 자신도 일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질문이었다.
“좋아요. 음식도 맛있고. 풍경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치안이 마음에 들어요.”
“한국의 치안은 유명하죠.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지갑을 두고 잠깐 자리를 비워보세요. 제법 신기한 경험을 할 테니.”
“아!”
짝!
나이가 마흔은 넘었는데, 소녀처럼 손뼉을 치며 환히 웃는 수잔 루이. 역시 고단수다. 지영이 일부로 주제를 돌렸는데도 아주 능숙하게 그 흐름을 쫓아오는 정도를 넘어 동화되고 있었다.
“저도 들었어요. 한국은 카페에 노트북이나 지갑, 휴대폰을 놓고 자리를 비워도 괜찮다고 하죠? 하지만 제가 사는 곳도 제법 치안이 좋아서 그런 일은 제법 겪어봤답니다. 후후.”
아하.
부자였지.
치안이 확실한 동네에서 살았을 테니, 한국의 카페가 딱히 신기하진 않았을 거다.
“지영은 프랑스에 온 적은 있나요?”
“아니요. 몇 번 대회를 나가봤지만, 프랑스는 없습니다.”
홍콩, 일본, 헝가리는 가봤다.
하지만 프랑스는 가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올림픽이 프랑스에서 열렸다면 갔겠지만, 독일로 변하는 바람에 프랑스는 갈 일이 없었다. 지영은 그런 사실을 당연히 얘기하지 않았다.
“후후, 그런 멍청한 짓 때문에 올림픽이 독일로 변하지만 않았어도 프랑스에 방문했을 텐데. 아깝네요.”
그런데 그걸 수잔 루이가 먼저 말했다. 지영은 그 말에 그러게요. 하고 짧게 답했다. 쓸데없는 것 같지만, 쓸데없지 않은 대화가 그렇게 계속 오갔다. 그러다 차 하나가 다 비워진 순간, 수잔 루이가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이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제 나이가 스무 살이라고 했나요?”
하지만 통역을 통해 전달받아서 그런 느낌은 훅 죽었다.
지영은 그래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네.”
“한국의 스무 살은, 다 이렇게 노회한 느낌인가요?”
“네?”
“아니, 어디를 봐도 지영 당신은 스무 살처럼 느껴 지지가 않아서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임은진도, 그리고 통역을 해주는 분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통역사분은 자기가 말을 전해 놓고, 그 말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여 지영의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지영은 적당히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러자 수잔 루이는 씩 웃었다.
“좋아요.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죠. 당신은 정말 나와, 우리와 작업할 생각이 없죠?”
“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혹시, 저에 대해 안 알아봤습니까?”
알아봤다면 왜 지영이 CF를 찍지 않는지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최소한 조사는 했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안 했다면, 그건 아마 자신감의 발로일 거다. 내가 선택했으니 살인을 비롯한 중죄인만 아니라면 다 상관없다는 그런 자신감 말이다. 그런데 진짜, 그런 이유가 맞았다.
“혹시, 지영은 중범죄자인가요?”
“설마요.”
“그럼 마약을 한다거나?”
“네?”
“그도 아니면 여자친구를 폭행한다거나?”
“…….”
이해했다.
싱글거리면서 독한 말을 내뱉는 수잔.
“아니죠? 그런 게 아닌데, 뭐가 문제죠? 내가 선택했는데.”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과 그녀가 이룩한 것, 또한 그녀가 소속되어 있는 곳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자신감은 충분히 가질 만도 했다. 실제로 지영의 자신감의 원천도 그동안 지영이 이룩한 것들에서 비롯되는 중이니까.
지영은 그래서 면전에서, 제대로 거절해주기로 했다.
“저를 포함한 제 친구들을 아이돌이라고 부릅니다.”
“알아요. 음, 다들 잘생겼고. 운동도 잘하는 친구들. 그룹인가요?”
“네.”
실제로는 아니지만.
따로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냥 그룹이라고 대답했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런 친구들과 정한 법칙입니다. 우린 상업적인 CF를 찍지 말자는.”
“그러니까 왜죠? 그걸 이해 못 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찌릿!
크게 소리친 것도 아닌데, 룸이 조용히 울릴 정도였을 뿐인데도 박력이 엄청났다. 그간 숨기고 있던 예술가의 분노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지영은 이글이글 불타는 불여우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했다.
“어째서? 아이돌이라면서! 우리의 선택을 거절한 거냐! 내가 궁금한 건 그거예요!”
자존심에 상처가 컸던 모양이었다.
하긴, 천하의 루이비통이니까. 그곳에 입사해 승승장구를 해왔을 테니까. 설마 극동의 한 운동선수이자, 배우에게 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다.
“혹시 다른 곳과 계약했나요? 샤넬? 구찌? 로랑?”
따다다!
흥분하면 말이 좀 빨라지나 보다.
통역을 통해 전달받은 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찌릿.
역시 상당히 박력이 셌다.
임은진이 흠칫, 흠칫할 정도였다.
“언성을 낮춰요. 싸우러 온 건 아니실 테니.”
지영의 차분한 말에 하! 코웃음을 치더니 그래도 진정하려는지 숨을 크게 내쉬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과는 없었다.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집. 꺾여서는 안 되는 프라이드.
선택하지, 선택받지 않는다.
이는 브랜드의 기본이다.
전자와 후자가 가치의 차이가 엄청나기에, 이는 당연했다. 고집과 자존심이 그 어떤 분야보다도 강력한 게 바로 명품 패션 브랜드였다.
지영은 수잔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유를 제대로 설명했다.
연희고 아이돌이 해왔던 일.
그게 아이들의 성장에 일부분 기준이 되었던 일.
지표가 되었으니, 지켜야 하는 이유.
상업적이지 않고, 화려함에 취하지 않은 모습으로 등대가 되어줘야 한다는 현실.
이 중심이 깨지는 순간, 지켜왔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 그걸 솔직하게 오픈했다. 솔직히 이건 어린아이의 치기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당시에는 솔직히 진짜 어리기도 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성인이 된 지금도 어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게 비록, 우리만 이해하는 고집이라고 해도.’
남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도 지켜야 할 ‘가치’였다.
“수잔이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건 그건 나와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제시한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 가치를 설명해 줘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솔직히 더 이해시킬 필요가 있을까?
이 말에는 결국 임은진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대로 전달하는 통역사는 놀랐고. 통역사는 기본적으로 기밀을 엄수해야 하니, 이 대화가 흘러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통역사에게 지영의 말을 전달받은 수잔의 눈매가 대번에 꿈틀거렸다.
아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생각하는 상식과 가치관이 너무 달랐다. 이 차이는 뭘 해도 좁혀지지 않았다. 타협? 그건 지영이 물러나는 것밖에는 없는데 솔직히 그러기도 싫었다.
루이비통?
대단한 곳인 건 안다.
그곳과 작업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되고, 명예로운 일이라고 하는지, 지영은 이미 일주일간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들에게였다.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지영에게는 그 공통의 상식이 적용될 수 없었다. 자신의 이러한 과거를 모르는 수잔에게 지영은,
‘이해할 수 없는 고집으로’ 똘똘 뭉친 괴상한 생명체일 것이다.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시건방진 애송이’ 정도로 보이거나.
그리고 지영은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어차피 상관없었다.
지영은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지영은 이틀 전에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의견을 물어봤었다. 혹시 이 고집이 싫은 사람이 있는지. 남들은 손가락질할 우리만의 가치를 지키는 게 싫진 않은지. 그렇게 물었을 때 아무도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괴상하고, 독특한 고집이 자신들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황석과 이성진이 보내준 편지에는, 학부모의 편지도 있었다. 아이가 우리를 등대로 삼아서, 밝고 올바르게 잘 나아가고 있다고. 그래서 그렇게 기준이 되어준 게 너무 감사하다고. 그런 편지도 있었다.
황석이 그랬다.
‘열에 아홉이 우리랑 다른 길을 가도, 열에 하나가 우리를 기준으로 삼아 제대로 성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흘러넘치지 않을까?’
그 말은 울림이 있었다.
한 명.
딱 하나를 위해서라도 고집을 지키자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이미 이런 대화를 나눠서 황금세대는, 연희고 아이돌이 나아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작품에 욕심은 내도, 상업을 추구하진 말자.
말 같지도 않은 소리긴 했다.
지영은 이 여자가 아마도 절대 자신의 이런 고집을 이해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수잔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니, 왜? 다른 과정 다 생략하고 작업하자는데, 왜 싫다고 하는 걸까? 그녀는 그걸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지영도 이해시킬 생각이 없으니 이제 더 대화해 봐야 서로 언성만 높아지는 평행선을 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정말이지 너무 쓸데없는 감정 소모이고, 시간 낭비였다.
그걸 지영도 알고, 수잔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두 사람은 이 자리는 여기서 마무리가 되어야 함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불여우는 고민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자신이 까였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인정할 수는 더더욱 없는 그러한 현실이 그녀의 입이 떨어지는 걸 막고 있었다.
“서로 더 대화를 나누다간 언성이 높아질 것 같으니, 이제 그만할까요?”
그래서 지영이 대신했고, 그녀는 눈꼬리가 파르르 떨릴 정도로 화를 감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짧은 인사 뒤에 자리를 빠져나갔다.
삐졌다.
화난 게 분명했다.
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큰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지영의 착각이었다.
제대로 빡친 것처럼 보이는 수잔이 자신이 만든 작품을 불태우는 걸 SNS에 올렸는데…… 이게,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