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37화
237화. 방송(6)
일주일은 7일이다. 지영은 이 중 3일을 훈련으로 돌렸다.
아무리 지영이 감각이 좋아도, 아예 도복을 입지도 않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3일은 도복을 입었다.
이는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당장 4월 말에 대학연맹 시합이 있다. 이 대회는 체중을 빼지 않고 전부 1체급씩 올려서 출전하는 거로 합의를 봤다. 그래서 크게 부담은 없었지만, 아예 포기한 대회처럼 준비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필요한 게 3일이다.
다른 선수들이었으면 쌍욕이 박혔을 테지만, 황금세대였다.
그 재능이 가히 다른 선수에겐 재앙이나 다름이 없는 친구들이라, 주 3일의 훈련으로 충분히 감각 유지가 가능했다.
남은 3일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연기 수업과 액션 스쿨에 다녔다.
아예 시작도 안 했으면 모를까, 이미 시작한 이상 절대 중간에 그만두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지영이었다. 액션 스쿨에서 다시 나의 무사님에 맞춘 액션 감을 되찾았고. 연기 수업을 통해 이전보다 훨씬 더 디테일한 세계에 들어갔다.
신기했다.
사실 지영은 전문가의 연기 수업은 처음으로 받아봤다. 첫 연기 때는, 아예 작가가 자신이 그린 서건이란 캐릭터에 필요한 자료를 보내줘서 그걸 바탕으로 연기했다.
두 번째 작품인 나의 무사님에서는, 그냥 강지영이란 캐릭터를 재에 대입시키길 원했다.
그래서 지영은 그냥 가진 걸로만 연기했다.
그렇다 보니, 체계적인 연기 세계는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에도 체계적이기보단, 감각적인 느낌을 개발하는 연기 수업이었다.
애초에 두 사람은 비슷했다.
체계적인 연기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연기. 잘하는 것만 잘하는 연기. 그걸 돋보이게 만드는 연기. 그걸 하나하나 배우는 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재밌었다. 새로운 세계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다시 3일을 보내고, 일요일은 쉬기로 했다.
인간은 쉬지 않고는 절대 계속해서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솔직히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임은진은 일요일만큼은 팔다리를 묶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지영을 쉬게 했다.
그렇게 스케줄을 나누어서, 대학 생활까지 바쁘지만, 착실히 스케줄을 소화했다.
성큼 다가온 4월.
대학연맹 대회가 4월 말에 예정되었고, 구슬땀을 흘리던 지영은 막 촬영을 시작한 ‘선고’의 현장으로 호출됐다.
예고 없던 호출은 아니었다.
왜냐면 제작을 시작했으니 캐릭터별, 그리고 단체 티저가 필요했다. 당연히 거기엔 지영의 모습도 담겨야 했다. 후반 4부만 출연하지만 엄연한 주인공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카메라가 가득 찬 공간에 들어왔다. 어색하지만, 낯설지만, 익숙한 공간의 느낌에 지영은 조금 설레는 마음도 들었다.
“여! 지영이 오랜만이다?”
“어, 감독님 안녕하세요.”
촬영 감독의 인사에 지영도 마주 인사했다.
연출을 잡은 PD가 변하지 않았으니 제작팀도 아무도 변하지 않았다. FD나 그 외쪽에서는 좀 변화가 있지만, 책임자들의 라인업은 그대로였다. 그들과 반갑게 인사한 후 지영은 대기실로 들어갔다.
이연과 심수정, 후 역의 강서훈이 모여 있었다.
나의 무사님 주인공 3인방이었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던 3인방은 지영이 들어오자 곧 4인방이 되었다.
“어, 왔어?”
강서훈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지영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워낙에 냉담한, 차가운 느낌을 가진 마스크라 좀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영은 강서훈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잘 안다.
강서훈은 좋은 사람이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그는 정말 연기밖에 모르는 연기 바보였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긴 하지만, 일정 이상은 아니었다. 회식은 가도 2차는 안 가는 캐릭터였다. 그럼 그 시간에 뭘 하냐. 오직 연습이다. 연기 연습.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하나의 신을 위해 공을 들이는 정말 장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한길밖에 모르지만 다 디테일이 달랐다. 그래서 차가운 귀공자 역만 맡아도, 작가나 감독이 가장 먼저 그를 떠올리는 거였다. 똑같은 귀공자라도 그는 전부 느낌을 다르게 줄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강서훈은, 연기만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과하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관심을 주지 않으니, 트러블이 일어날 일도 없었다. 선을 딱 지켜줘서 솔직히 지영에겐 이연보다도 편한 사람이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지?”
“네, 그럼요. 선배님은요?”
“하하, 나도 잘 지냈지. 그럼 난 잠깐 매니저 좀 보고 올게. 얘기들 나누고 있어.”
지영이 들어오자 귀신같이 타이밍을 보곤 스윽, 빠져나가는 강서훈. 여자 앞에서 숙맥인 성격은 아니지만 텐션 높은 두 사람은 확실히, 버거웠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 지영도 좀 버거웠다. 이연 하나도 말이다.
근 한 달 만인 두 사람은 이미지가 확실히 변해 있었다.
이연은 비수기에서, 미모 성수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심수정도 이전 작품에서 조금 맹하고, 살이 살짝 오른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다이어트에 들어갔는지 제대로 홀쭉해져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첫 주연으로 인해 반짝거리고 있었다.
“누나 엄청 홀쭉해졌네요? 저번에 봤을 때랑 완전 다른 사람 같아요.”
지영이 인사 대신 한 말에, 심수정이 활짝 웃었다.
자신의 다이어트가 성공적이란 뜻이니, 이런 인사를 싫어할 여성은 없었다.
“진짜?”
“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감량하면 체력에 분명 문제 왔을 텐데.”
그런데 이게 전부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짜 많이 빼긴 했다. 이전에 봤을 땐 분명 살짝 살이 오른 느낌이었다. 그때 맡고 있던 배역이 재벌가의 철없는 딸 역할이라 살집이 좀 있었다. 아주 간단한 논리로, 재벌가의 냉철한 막내딸 역할이었으면 자기관리가 철저하단 설정도 붙을 테니, 지금처럼 살을 좀 깊게 뺐어야 했을 거다. 하지만 철없는,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캐릭터라 자기관리를 살짝 놓은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다 나의 무사님으로 오면서, 당연히 빼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족.
오지 부족의 삶을 사는데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부족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의식주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식이다. 먹는 것. 농경은 물론 목축 쪽으로도 진입 전이고, 진입했다고 쳐도 농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져 식량은 언제나 부족하단 설정이 이족에겐 붙어 있었다.
그런 이족의 부족장 딸이고, 타고난 전사인데 볼에 빵빵하게 살이 올랐다?
그 모습은, 그 모습대로 캐릭터의 파괴였다.
캐릭터의 설정에 따라 배우가 준비해주지 않으면, 그 모습에 몰입하기 정말 힘들어진다. 지영이 오늘 촬영을 위해 다시 감량해서 74㎏까지 만들어 온 것처럼 해주지 않으면 선고의 모습은 시작부터 위화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차이점 때문에 심수정은 정말 열심히 감량했고, 확실히 한 달 전과 비교해 이미지가 다를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어서 왔다.
“야, 나는? 나는 안 빠졌어?”
그래서 칭찬 겸, 사실을 얘기했는데 역시나 이연이 툭 치고 들어왔다. 티저 영상이지만 절대 짧지 않다. 오늘내일 이틀간 예고편을 포함해 꽤 많이 찍어야 하고, 그래서 출연 비중이 높은 만큼 이연도 살을 빼긴 했다.
그리고 그게 한 달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티가 나긴 했고.
그게 딱 눈에 보이지만.
“어제 라면 먹고 잤어요? 뭐 이래 부었대?”
“이게!”
주먹을 콱! 들어 올리는 이연이지만 지영은 슬그머니 의자와 함께 이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물러난 상태였다. 그러자 이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대회는?”
“그건 이달 말이요. 큰 대회는 아니라서, 천천히 쉬엄쉬엄 준비하고 있어요.”
“그래? 참 대단하다, 너도. 드라마 준비에, 유도 대회도 준비하고. 그게 둘 다 같이 준비 가능해?”
이연의 질문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힘들긴 힘들었다. 힘든 게 정상인 스케줄을 짜놓고, 그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완전히 괜찮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정말로, 버틸 만했다. 남들이 봤을 때는 ‘쫓기는’ 것처럼 보여도, 지영은 스스로 자신이 원해서 잘, 잘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미련하다고 할 거다.
이성진이 걱정했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고, 임은진이 걱정하는 것처럼 언제고 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그래도 좋았다.
지영이 이성진의 그 말에 심리상담사까지 만났지만, 결국에는 이전처럼 고집스럽게 나아가는 이유가 스스로가 좋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알 리가 없는 욕구가 터진 상황이기 때문에, 지영은 그냥 거기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가능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심리상담사는 두 번 만났는데, 지영이 이 부분에 대해서도 물은 적이 있었다. 힘들지만 나는 만족한다.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니냐. 상담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 게, 나를 속여서 내놓은 대답이 아니라면 괜찮다.
다만, 육체를 쉬게 해줄 필요가 있다.
정신과 다르게 육체는 어느 선을 넘기면 와르르 무너지고,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도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고.
그러니 체력과 정신을 잘 조율하라고.
그래서 실제로 잘 조율 중인 지영이었다.
“돼요. 힘들 것 같지만, 익숙해지면 괜찮거든요. 누나는 이런 적 없어요? 누나 아이돌 때 엄청 바빴을 거 아니에요.”
“아…… 장난 아니었지. 하루 두세 시간씩 자고 움직이고 막 그랬으니까. 그때 정산만 제대로 받았어도 내가 강남에 건물 두 개는 세웠는데. 크, 아깝당…….”
하하.
잘 가다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는 저런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이, 역시 이연이었다. 그런 이연과 심수정의 주도하에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슬슬 촬영 준비를 했다. 다른 대기실로 가서 피팅한 의상을 입고, 세부적인 모습을 좀 더 다듬는 지영.
오랜만에 잿빛 무복에 칼까지 허리춤에 패용하니 낯설면서도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음, 역시. 역시 지영이 넌 긴 머리가 잘 어울린다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미술팀 감독이 직접 와서 지영의 코디를 점검해주곤 해준 칭찬을 지영은 가볍게 받았다. 짧게 머리를 자른 적이 없어서 그때 이미지가 잘 떠오르지 않아 비교하긴 그렇지만, 자신도 이런 긴 머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한데 그러모아 질끈 묶었을 때, 그때 나오는 서늘한 이미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준비를 끝내고 시작된 촬영.
후의 날카로운 패도의 모습. 그가 제국을 전복하고, 지키는 모습.
연의 악착같은 생존, 제국의 부활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재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보는 모습.
선고의 생존, 그리고 사활을 건 시험, 위험에 빠졌을 때 그의 앞에 등장하는 재를 바라보는 모습.
연을 목숨을 걸고 지키지만, 그런 연에게 일말의 연정도 품지 않는 재의 모습을 차곡차곡 촬영했다.
하루 만에 끝날 촬영은 아니었다.
티저를 포함해 예고편 등에 쓰이는 장면엔 대사도 충분히 들어가 있어야 하고, 액션도 들어가야 해서 해는 이미 한참 전에 졌지만, 여전히 세트장엔 불빛이 충천하고 있었다. 12시가 지나자, 어김없이 야식이 들어왔다.
치킨과 족발.
뜨끈한 국수였다.
온종일 움직이고, 에너지를 쏟아 스태프 배우 할 것 없이 허겁지겁 야식을 먹고, 또 촬영에 들어갔다. 10분짜리 세 개에, 배우별 티저까지 뽑아내려면 이틀간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밤 신.
추적을 피해 도망가는 재를 구하는 선고의 모습을 담는 신을 찍을 때는, 솔직히 지영도 체력적으로 한계를 맛봤다. 하지만 그래도 부상, 사고 없이 신을 잘 마무리했다. 그 신을 끝으로 지영의 오늘 신도 끝났다.
신을 끝내고 막 대기실로 들어오는데. 임은진이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지영아! CF 들어왔다!”
“네? CF요?”
“어!”
“그래요?”
조금은 시큰둥한 대답.
근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희고 아이돌은 방송 활동을 하지만 아무도 CF를 찍지 않았다. 찍은 거라곤 예전에 학교폭력 방지 공익 광고를 찍은 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희소성이 있고, 그래서 제안도 정말 많이 들어왔었다. 그러나 그 모든 걸 거절해온 지영이었고, 연희고였다. 실제로 CF는 찍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런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임은진이 이렇게 상기한 표정을? 그걸 깨달은 지영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어딘데요?”
“루이비통!”
“…….”
헐, 대박.
쉬고 있던 이연과 심수정이 몸을 일으켰고, 남 일에 관심 없인 강서훈마저 놀란 눈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지영이 이 중에서 제일 많이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