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33화
233화. 방송(2)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걸 알겠다.
하지만 문제는 시기였다. 지영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적어도 작년처럼 가을이 끝나기 전엔 다시 선수로 복귀해 폼을 올릴 생각이었다.
사실, 신기하게도 지영은 드라마를 찍는 동안 훈련을 제대로 못 해도 심각할 정도의 기량 하락이 상당히 적었다.
보통은 일주일만 쉬어도 선수는 티가 나게 마련이었다.
매일 하던 훈련을 쉬면, 선수가 가장 먼저 몸이 무겁다는 걸 느끼는 법인데, 이상하게도 지영은 그런 폼의 하락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건 친구들인 황금세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폼의 하락은 선수에겐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이 폼을 유지하기 위해 평소에도 그 힘든 훈련을 견디고, 또 견디는 게 운동선수들이었다.
그런데 지영은 그런 폼의 하락이 심하지 않았다.
음, 몸이 조금 무거운 정도? 그 정도가 전부인데 그것도 일주일 정도 훈련에 임하면 거의 풀려서 다시 재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휴식이, 그것도 굉장히 긴 휴식이 오히려 지영은 역으로 자신의 실력에 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았다.
오래 도복을 입지 못했었던 만큼, 도복을 입으면 이상하게 설레서 운동이 더 잘되기도 했다.
이런 느낌은 스스로도 솔직히 좀 신기했다. 그러면 올림픽 얼마 안 남기고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정상의 기량을 찍었다고 해도, 고된 훈련은 선수 멘탈을 단단하게 잡아준다.
특히 집중 훈련을 통해 시합에 대비해놓으면, 경기 때 그 준비는 자신감으로 변해 선수를 보호해 준다.
이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얼마 안 남겨두고 훈련을 시작하면, 주변에서 아마 가만히 있지를 않을 거다. 지영이 연예인일 때는, 솔직히 연예인 일이 먼저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지영은 자신의 본업이 유도 선수라 생각했다.
그래서 적어도 올림픽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싶었다.
이런 지영을 위해, 정은정과 홍진아는 상당히 배려를 해줬다.
다른 무엇보다 지영의 스케줄을 존중해 줬다. 심지어 감독과 문제가 생기자, 감독을 날리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그 모든 게 지영의 출연을 위해서였다. 이런 배려를 받았으니 지영도 자신의 욕심대로만 할 수는 없었다.
양보받았으면, 나중에 나도 양보할 줄은 알아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 생각했다.
“지영 씨는 시합 스케줄이 앞으로 어떻게 돼요?”
일단, 홍진아는 지영의 스케줄부터 물었다.
이미 랭킹을 상당히 올려서 지영은 많은 대회를 나가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원래 2월에 있을 예정이었던 가노컵을 이미 작년에 치렀기 때문에 6월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6월에 세계 선수권이 있고, 8월에 올림픽 일정이었다.
가노컵, 세계 선수권, 올림픽.
올해 출전하려고 했던 대회였다. 마스터즈도 있지만, 그쪽은 출전하지 않는 방향으로 잡았었다.
하지만 올림픽이 없어졌으니, 감을 잡기 위해서 올해 적어도 대회 두세 개는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걸 전체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일단 촬영 스케줄을 말씀해 주셔야, 거기에 맞춰 대회 스케줄을 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건 대표팀 감독님도 허락해 주신 사항이에요.”
전기정 감독도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연희고 황금세대 덕분에 요즘, 유도는 유례가 없던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예능, 영화, 드라마, 아이돌 판에서 활약하는 덕분에 그들을 따라 유도를 시작하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특히 사회인 유도가 엄청나게 활성화됐다.
예전에는 체육관 하면 태권도 합기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유도였다. 오죽하면 일단 유도체육관부터 찾고, 자리가 없으면 태권도나 합기도를 보내는 추세였다.
거짓말 같겠지만 이 모든 게 연희고 아이돌로 인한 낙수 효과였다.
그래서 전기정 감독은 지영을 포함해, 전원이 지금처럼 대회 스케줄을 조정하며 연기나 예능에 집중해도 오히려 좋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겨울 전까지는 가능하면 이쪽 스케줄에 맞춰주고, 그게 끝나면 본격적으로 올림픽을 준비하자고 했다.
그래서 지영은 2월에 있던 선발전에도 출전하지 않았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음, 일단 2부는 금방 촬영에 들어갈 거예요. 이미 로케도 끝냈고, 팀도 전부 짰으니 우리 심수정 배우 작품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리면 돼요.”
홍수정의 말에 심수정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는 요즘 다른 드라마에 출연 중인데, 제법 시청률과 화제성도 좋고, 연기로도 호평을 받고 있었다. 선고와는 전혀 다른 재벌가 손녀딸 역인데, 철없으면서도 때에 따라 냉철하고, 통찰력 있는 모습을 보이는 역인데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머니와 요즘 드라마에 관심이 많이 생긴 양유진도 재밌다고 했었던 작품에 출연 중이었다.
그래서 이쪽 준비가 끝나도 바로 촬영에 들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이름을 알린 거야 워낙에 미모로 선수 시절부터 유명했지만, 제대로 배우로서의 포텐이 터진 건 나의 무사님부터 시작인지라, 심수정은 이 작품에 관한 애정이 상당했다. 지금도 좀 전에 나눠준 시나리오와 대본 전체를 마치 신줏단지처럼 품에 꼭 안고 있었는데, 누나인데도 그 모습이 마치 생일선물을 빼앗기기 싫은 아이 같아 정말 귀엽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 자체가 그녀가 작품에 가진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수정 씨 촬영 언제가 마지막이라고 했죠?”
정은정 작가의 물음에, 심수정은 수첩을 꺼내 일정을 살폈다.
본인이 직접 하는지, 낡고 꼬질꼬질한 수첩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그녀의 심성이 어떤지 잘 보이기도 했다.
“이번 달 말이요. 29일까지 있고, 그 뒤엔 추가 촬영 아니면 없어요.”
3월 말이라.
여유가 넘친다고는 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다.
“음, 3월이면 좀 빠듯하겠는데요?”
“끝나자마자 바로 촬영 들어가면 아무래도 지영 씨 스케줄이랑 겹치겠어요.”
드라마 한 작품은 꽤 오래 찍어야 한다. 지영이 아무리 가을이 끝나기 전까지 시간이 있다고 해도, 시간이 계속 나는 건 아니었다. 대회도 나가야 하니 대회 준비로 최소 한 달은 꼼짝도 못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수정의 체력도 문제였다.
그녀가 운동선수 출신이라 체력이 남다른 건 알겠지만, 드라마 체력은 지영이 겪어본 결과 역시 좀 달랐다. 지영도 체력 하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데, 드라마 촬영은 정말 천천히, 서서히 체력을 말려가는 느낌이라서 이걸 컨트롤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누나, 체력이 따라가겠어요? 작년에 나의 무사님부터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일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번 작품 끝나자마자 스핀오프 들어가고, 다시 2부 본방 들어가면 앞으로 1년은 쉬지도 못할 건데. 누나 진짜 병나요. 그렇게 달리면.”
지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그녀의 매니저가 가장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매니저는 굉장히 깡마른 여성 매니저였는데, 칼처럼 떨어지는 단발과 안경, 그리고 창백하다 싶은 피부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일 거란 예상과는 달리 한없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심수정을 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좀 쉬게 해야 하는데, 말을 듣지 않아요. 지금 아니면 언제 하냐면서…….”
에휴.
아효.
한숨을 계속해서 내쉬는 매니저.
하지만 그런데도 심수정은 단호한 얼굴이었다.
“제가 힘들다고 하면, 선고 역할 다른 배우한테 갈 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충분히 쉴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이고.”
“음, 꼭 그런 것까진 아니지만…….”
이미 중요한 배역인 선고를 심수정이 했기 때문에, 이걸 갈아치우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선고는 활을 매우 잘 쏘는 명사수였다. 그런데 심수정은 실제로 양궁 선수였고, 배역 때문에 보우 액션까지 따로 배웠을 정도로 배역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00%는 아니어도 90% 이상의 싱크로율을 보이는 선고가 탄생했다.
평소에는 말괄량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
그러나 시위에 살을 먹이는 순간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매가 되었고, 노렸던 표적은 절대 놓치지 않는 사냥꾼이 된다.
실제로 활을 쏠 줄 아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의 차이는 매우 컸다.
후자의 경우라면 신을 잘라 붙여야 한다. 하지만 전자라면? 아예 그냥 통으로 배우가 활을 쏴 표적에 맞추는 장면을 보여줄 수 있었다. 물론 맞는 장면은 표적은 CG를 입히겠지만, 그래도 디테일이 엄청나게 살아날 것이다.
그런 디테일은, 대중의 몰입감을 끌어낼 수 있고, 실제로 나의 무사님에서 선고가 활을 쏘는 장면은 CG만 조금 입힌 모습으로 나갔는데도 대호평을 보였다. 거기에 보우 액션까지 제대로 배웠으니 흉내를 내는 것과는 아예 다를 수밖에 없었다.
“1년이잖아요? 죽었다고 생각하고 1년! 1년 열심히 활동하고 쉬면 됩니다! 그리고 저 그 정도 체력은 있어요!”
심수정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그렇게 답하니, 홍진아나 정은정이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수정아. 혹시 너 내가 예전에 했던 말 담아두고 있어?”
“네?”
“왜 내가 신인 때는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고 악착같이 잡으라고 했던 말.”
“아…… 헤헤.”
바보처럼 웃는 심수정을 이연은 한숨을 폭 내쉬며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책임인가 봐요. 그래도 제가 했던 말을 잘 따라주는 후배를 봤으니, 체력안배나 이런 건 제가 신경 쓸게요. 그리고 우리 한 식구기도 하고.”
실제로 심수정은 이연의 소속사가 맞았다.
그렇게 심수정의 스케줄 부분이 지나가고, 지영의 차례가 다시 왔다.
“지영 씨 촬영은 드라마 중후반부니까, 5월 중순에서 6월 초일 거예요. 기간은 길게 잡아봐야 3주 정도?”
“별로 안 기네요?”
“후반 4부에만 출연하는 거니까요. 시점은 대본 보면 알겠지만, 전쟁 중의 사랑 느낌으로 갈 거예요. 처음에는 은근, 이후는 은은하게 이어가는 모습을 담을 예정이니까 감정 잘 이해해 두세요.”
홍진아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 갔다. 양유진과 처음 연락했을 때의 설렘. 은근하게 다가가려는 노력. 은은한 향을 내며 시작된 연애. 아마 그런 느낌을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감정을 이용하는 건…….’
조금 실례일까?
지영은 이 부분은 나중에 고민하기로 했다.
“그럼 2부 본방 촬영은 언제 시작되나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기사가 나갈 건데, 하반기 시즌은 통째로 우리가 접수했어요. 그러니 쉬지 않고 그대로 이어갈 거예요. 그럼 지영 씨가 스케줄을 빼줘야 하는 건 못해도 칠, 팔, 구월 정도 되겠네요.”
석 달이다.
빡센 스케줄이다.
5월에서 6월 초까지 스케줄을 비워야 하고, 다시 칠, 팔, 구월을 통째로 비워야 했다. 지영은 폰을 꺼내서 메모장에 적어뒀던 세계대회 스케줄을 확인했다. 다행히 마스터즈가 여름이고, 아시아 선수권은 9월이다. 지영이 나가려고 했던 세계 선수권은 다행히 올림픽과 함께 일정이 조정되어 올 11월 말이다.
‘그냥 하나만 나가야겠네.’
부족한 폼은, 국내대회로 충당하기로 했다.
대신 한 체급으로 올려서 감량 걱정하지 않는 선에서.
딱 적당한 대회가 눈에 들어왔다.
4월 중순에 있는 춘계 대학연맹이다.
“좋네요. 그럼 그렇게 알고 스케줄 비워둘게요.”
“괜찮아요, 이렇게 가도?”
“네.”
4월에 대학연맹 하나. 11월에 세계 선수권 하나.
중간에 여름 부분이 비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고, 지영은 올해 여름의 실전 감각을 포기하는 걸로 정했다. 대신 11월 말의 세계 선수권부터 내년 올림픽까지는, 선수촌 죽돌이가 되기로 했다.
짝짝.
“자, 그럼 더 자세한 스케줄은 제가 따로 짜서 공지로 돌릴 테니까, 오늘은 이만할까요?”
“좋죠! 어, 우리 오늘 저녁 먹나요?”
심수정의 말에 홍진아가 카드를 꺼냈다.
“후후, 법카 받아왔습니다. 가시죠!”
법카의 위용은 역시,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법카로 인해 그 누구에게도 부담이 없는 회식에 참석한 지영은 오랜만에 음료수가 아닌, 술잔을 들었다.
스무 살.
술을 마셔도 되지만, 지영은 첫 잔만 건배하고는 자제했다. 다행히 운동선수라는 걸 더 마시라고 보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미팅이 끝나고 이틀 뒤 나의 무사님 스핀오프 ‘선고’의 제작이 공식,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