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25화
225화. 가노컵(19)
다가온 임은진이 폰을 내밀었다.
대표님. 이라고 적힌 걸로 보아 장세리 선배님이었다.
“네, 선배님.”
-어, 지영아. 기자들 지금 연락됐거든?
“네? 벌써요?”
-응. 정정 기사 낼 생각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뭘 원하는 눈치던데?
“……혹시 인터뷰 같은 거요?”
-그렇겠지?
“…….”
하, 하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진짜.
왜 지영이 언론과 단절을 했겠나. 오죽하면 친누나라 생각하는 이선영의 부탁도 거절했다. 그런데 이런 짓에 걸려서 인터뷰한다고? 지영은 화가 확 올라왔다.
“저도 그렇지만, 한결이는 절대 안 할 거예요. 그냥 쿨하게 인정할걸요? 솔직히 별로 비밀로 할 생각도 없었거든요.”
연애하는 게 뭐가 큰 대수라고?
사실 지영도 그렇지만 황금세대 전체가 자신들이 연예인이란 자각이 거의 없었다. 그냥 운동선수. 그 정도가 전부였다. 전부 제대로 언론에 노출되었던 적이 있으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비밀 연애 같은 건 아예 머릿속에 있지도 않았다.
그건 강한결이나, 지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강한결도 만약 걸리게 되면, 쿨하게 인정하고 가기로 했던 거다.
-그렇지? 알았어. 그럼 이쪽은 일단 무대응으로 가다가. 한결이한테 맡긴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수고하고. 참, 어제 우승 축하해.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장세리와도 전화를 마친 지영은 한숨과 함께 기사를 좀 더 살피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차세대 피겨 여신이라 그런지 양지원의 기사는 생각보다 많이 올라왔다. 그리고 딱 1시간 만에 실검 1위를 먹더니, 순위권을 모조리 가져가는 기염을 토했다.
양지원 후원.
양지원 후원 재단 임원.
피겨 여신 후원 등등 검색어였다.
신기한 게 그러면서도 강한결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올라와 기사들이야 복사 붙여넣기 수준의 기사라서 그런 거니까 그렇다 쳐도, 최초 올렸던 언론사는 역시 아직도 정정 기사를 내지 않았다.
목적이 언론에 대한 굴복인 사람들이다.
지금의 페이스를 무너뜨리는 인터뷰 한 방이면, 확실히 그런 모양새가 나오게 된다. 그럼,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아, 황금세대가 이제 언론을 상대하는구나, 하는 느낌만 들어도 이건 언론이 이긴 게 된다.
그리고 그게 아무래도 예전에 황금세대를 공격하다가 역공을 맞아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언론사들의 목적일 것이다.
하.
집요하다.
언론이 집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라서 지영도 정말 질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잉.
이성진이다.
“어, 성진아.”
-준결 시작했는데 어디야?
“화장실. 이제 가고 있어.”
-거짓말하네. 한결이 기사 때문에 밖이지?
이성진도 봤나 보다.
하긴, 벌써 1시간 가까이 지났는데 이성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전화하긴 했는데, 진짜 이제 들어가는 중.”
-빨리 와.
“응.”
지영은 임은진에게 태블릿을 건네주곤, 체육관으로 다시 들어갔다. 가면서 마주친 소녀 팬들. 꺄아아! 갑자기 들리는 환호에 고개를 돌렸다가, 지영은 그래도 팬이니까 사인을 해주기로 했다.
임은진에게 팬이 없이는 스타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었기도 하고 해서 상황이 상황이지만 사인은 잊지 않는 지영이었다.
사인을 해줬더니 종이가방을 건네왔다. 선물? 그걸 받아서 봤더니 목도리였다. 두툼한 검은색 목도리. 지영은 이걸 준 팬을 잠깐 바라봤다.
“이거 나 주는 거 맞아요?”
지영의 말을 임은진이 통역해 주자, 소녀 팬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고마웠다. 이런 팬의 존재가 어느 순간부터 지영에게는 조금씩 소중해지고 있었다. 자신을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팬은 조건 없는 사랑을 준다.
이 차이가 너무 극과 극이라, 지영은 그냥 마냥 고마웠다.
반대쪽에 선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이, 이쪽에 선 사람들 때문에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고마운 사람들과 사진도 찍어주고, 가볍게 대화도 나눈 뒤에 지영은 다시 관중석으로 올라왔다.
“미안. 앞에서 팬들 만나서.”
“응. 한결이 어머님이랑 대표님은 뭐래”
“당연히 한결이 의견 따르겠다고 하시지.”
“한결이 의견이라……. 음, 그럼 공개 연애로 가겠네.”
“아마도.”
지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언론이 원하는 게 우리 인터뷰라는 것도 얘기했다. 그러자 이성진의 얼굴이 역시 대번에 찌푸려졌다.
“아직도 포기 안 한 거네?”
“포기하겠어? 새파랗게 어린 우리한테 제대로 물 먹어서 문까지 닫았는데. 그 인간들 속성 보면 이를 갈면 갈았지, 절대 회개할 타입은 아니잖아.”
지영의 말에 이성진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언론과 적이 되는 건 생각보다 피곤했다. 특히 이성진처럼 언론의 힘을 받아야 하는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면 더욱 그랬다.
“일단, 시합 끝나고 얘기하자. 한결이랑 같이.”
“그래. 알았어.”
지영의 말에 이성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봤다.
이제 시합에 집중할 때다. 아무리 자신의 시합이 아니라고 해도 계속 자리를 비우고 하는 건,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나 적진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이다.
선수들이 힘을 낼 수 있게 응원은 필수였다. 그리고 응원의 목소리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커지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당연히 좋았다.
시합은 이제 준결승 여자부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여자부 경기는 어제 중량급이었으니, 당연히 오늘은 경량급이었다. 한국 팀은 준결승에 1명이 올라갔다.
-48.
불면 훅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체급이라 생각되겠지만, 선수들을 보면 훅 불어선 절대 날아갈 것 같진 않았다.
작지만, 단단했다.
폼이 넓은 유도복이라 절대 하늘하늘하단 느낌이 나지는 않았다. 게다가 준결승이면, 이 체급에서 유도를 제일 잘하는 이들만 올라온다고 보면 되었다. 특히 가노컵 정도의 메이저 대회면 세계랭킹 순위권자가 다수 나오니까, 이런 대회의 4강이면 이 체급에서 가장 잘하는 사람이 세계에서도 가장 잘한다고 봐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된다.
그런 대회의 4강.
당연히 치열하고, 피 터지는 경기가 이어졌다.
여자 선수들의 유도라고 하늘하늘하고, 재미없을 거로 생각하면 진짜 큰 오산이다.
솔직히 유도 선수들은 여자이기 이전에, 유도 선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반적인 여성과는 완전히 다른 강함을 보여줬다.
제일 작은 체급이지만, 저 정도 선수가 제대로 잡기만 하면 일반 성인 100 정도는 그냥 하늘로 날린다. 거짓말 같겠지만 진짜다. 무방비 상태여야 한다는 가정이 붙지만, 그래도 100㎏ 정도는 가랑이 사이로 파는 업어치기 한방이면 바닥에 처박혀 거품을 물 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다.
아니, 힘을 주고 대비를 한다고 해도 업어치기 모션에 안다리 한방이면 뒤로 훅 넘어가 뇌진탕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겠다.
그런 선수들이, 클린해진 판정 아래 마음껏 실력을 겨루고 있었다.
“오연선 파이팅!”
“오연선 파이팅!”
오연선.
이번에 대표팀에 들어온 새내기 아닌 새내기였다. 오연선은 정수원과 비슷한 느낌의 선수였다. 항상 최고가 아닌, 2위, 3위에 머물렀던 선수였다. 대표팀이 되었던 적이 있지만, 선수촌에서 훈련 중 무릎이 아작나면서 다시 하차했고, 그 이후 대표팀 등선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이번에 선발전에서 1등을 하면서, 나이 서른셋에 대표가 되었다.
오연선은 그런 스토리가 있는 선수였다.
마침 그런 오연선의 경기에, 지영은 이전의 문제는 전부 잊고 시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연선의 상대는 코소보 선수였다.
그래도 다행히 세계랭킹 1위인 디스트리아 크라스니키는 아니었다.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면서, 아까 기권한 토나키 후나를 제압한 선수인 그녀는 이번 대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대신에 시밀 드리나라는 선수가 나왔는데, 후보 선수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그런 시밀 드리나와 오연선의 경기는 언론 때문에 골머리를 섞던 지영이 단숨에 집중할 정도로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오연선은 올라운더다. 허리후리기도, 업어치기도 전부 주력 기술로 사용할 정도로 둘 다 수준급으로 장착했다.
이를 악물고, 이전 경기에서 이마가 찢어졌는데도 붕대를 피로 물들인 채 경기를 하는 모습 때문에, 체육관은 정적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에 땀이 쥐어지는 경기였다. 그러다가, 제대로 잡은 오연선이 쭉 끌어서 그대로 업었다. 그리고 제대로 업혔다.
쿠웅!
아아!
업어치기에 걸렸는데, 그걸 한 바퀴를 더 돌아서 아예 앞으로 떨어졌다. 상대의 아크로바틱한 방어에 사방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신기한 게, 이렇게 경기가 흘러가면 사람들은 부상을 당한 선수를 응원하는 습성이 있었다.
누가 나쁜 사람이고, 누가 착한 사람도 아니어도 그냥 다친 사람이 시합하면 투지를 불사른다는 생각에 그쪽을 응원했다.
지금 오연선의 경기가 그랬다.
그녀의 투지에 체육관에 모인 관중들 대부분이 오연선이 넘어가려고 하면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고, 넘기려고 하면 어어! 하고 기대했다.
이를 악문 채, 피가 상당히 나는데도 경기에 집중한 오연선은 다른 스토리도 있었다.
대표팀에 들어오기 전, 그러니까 선발전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편모가정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혼자가 된 오연선이었고, 생전 어머니의 꿈이 국가대표고, 올림픽 금메달이란 유언 아닌 유언이 그녀의 삶이 목적이 됐다.
그래서 이 악물고 훈련했고, 선발전 경기를 치렀고, 국가대표가 됐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결승으로 가는 관문에서, 유도 강국의 차세대 유망주와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승부의 신은, 원래 잔혹하지……. 그래도 이번엔 잔혹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지영이지만, 지영은 시합을 보면서, 조금씩 표정을 굳혔다.
승기가 넘어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출혈 때문에 오연선의 상태가 확 나빠지기 시작하는 게 일반인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무래도 다시 찢어졌는지 이마의 출혈이 상당했다. 이런 출혈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당연히 경기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지금 딱 그런 상태 같았다.
마음 같아서야 오연선이 이겼으면 좋겠다.
국가대표로 나선 첫 대회니까,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다. 하지만 승부의 신은 너무 냉혹해서, 결국 오연선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털썩.
“어, 어어…….”
잡기 싸움을 하려다 말고 비틀거리더니, 털썩 주저앉는 오연선.
그런 오연선을 향해 전기정 감독이 급히 뛰어 들어갔다. 감독이 난입하면 당연히 기권패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일어난 지영과 이성진. 그리고 어제 경기를 끝낸 선배들까지 전부 아래로 내려갔다.
빙 돌아서 내려가자 부축을 받고 나오는 오연선이 보였다.
오연선의 눈은 제대로 풀려 있었다.
승부에 억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무리한 감량 뒤에 출혈까지 생겨 의식이 제대로 나간 것 같았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손을 간헐적으로 뻗었고, 눈빛이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직, 그녀의 의식은 매트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도록 왜 감독님은 경기를 진행시켰을까?
보통 이렇게 되면 감독 선에서 시합을 끝내는 게 정상이었다. 아마 멀리서 본 자신들보다, 바로 앞에서 본 감독의 눈엔 시시각각 망가져 가는 오연선의 상태가 보였을 더 잘 보였을 텐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감독에게 부축받아 나오면서, 시합이 끝났다는 걸 동료들을 보고 깨닫고는 오히려 죄송하다고 하는 오연선의 말이 왜 말리지 않았는지를 알려줬다. 신호였다. 경기를 말리지 말아 달라는. 다른 말로는 투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불태웠던 투지도, 결국엔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병원으로 떠난 오연선에게 자극을 받은 건지, 선수들의 눈빛이 확실히 변했다.
누군가의 의도로, 고의로 입은 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태가 안 좋다는 걸 느끼면서도 끝까지 경기에 임한 오연선의 투지는, 조금 느슨해졌던 긴장을 바짝 조였다.
그건 임효중의 경기부터 곧장 드러났다.
“효중이 답지 않은데?”
“그러게.”
상당히 공격적인 잡기.
임효중의 잡기는 보통 지영과 비슷했다. 먼저 잡혀주고 시작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거의 엇비슷하게 잡아서 체력 손실을 최대한 피하는 스타일을 갖춘 임효중인데, 이번엔 먼저 상대를 압박해갔다.
그런 스타일에 상대는 자기가 준비해온 것과 달라 좀 놀랐는지 연신 뒤로 물러나다 지도를 받았고, 지도를 더 받기 싫어 맞부딪쳐 나오다가 깜짝 빗당겨치기에 그대로 한판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들어간 강한결도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꽤 공격적인 유도를 했다.
물론 이기고 결승에 진출하긴 했지만, 위험한 장면이 몇 번 나왔었다. 그래서 지영은 황석이 등장하자마자 곧장 소리쳤다.
“황석! 야! 석아!”
지영의 부름에 다행히 관중석을 올려다보는 황석.
지영은 황석에게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는 행동으로 부른 이유를 보여줬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던 황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하얀 이가 보일 정도로 웃었다. 그러곤 다시 단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황석의 상대는 호르헤 폰세카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쿠웅!
압도적인 점수로 랭킹 1위를 고수 중인 호르헤는, 왜 자신이 1위인지를 시작과 동시에 안다리 절반을 따내며 증명했다.
시작과 동시에 절반.
마백 준결승은 그렇게 불안 속에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