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23화
223화. 가노컵(17)
고요했다.
두 선수의 시합은 피 튀기는 혈전이 아니라, 고요한 숲속에서 울리는 클래식 같았다. 유도 경기는 파이팅이 넘치는 경기다. 투기 종목. 그것도 유도 경기는 UFC처럼 진짜 피가 터지진 않더라도 충분히 액션이 넘치는 경기였다.
그런데 두 선수의 시합은 고요했다.
같이 시합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미 승부가 난 경기장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런 고요함이 더욱 넘쳤다.
게다가 두 선수의 시합 스타일이 일단 많이 움직이는 편이 아니었다.
경량급에서 중량급, 헤비급으로 넘어가는 순으로 선수의 움직임은 당연히 떨어진다. 특히 플백 같은 경우는 거의 서서 유도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90 정도 되면, 그래도 활발하게 움직이긴 한다.
하지만 선수에 따라 스타일이 갈린다. 조금 서서 하는 선수가 있고, 신나게 움직이는 선수가 있고. 각자 저마다의 스타일대로 경기를 하는데 이 두 선수는, 굉장히 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강한결이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는 스타일이다 보니 원래 그렇고, 베카우리 라샤는 그런 강한결에게 스타일을 맞춘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두 선수는 차분하게 잡기 싸움을 하고, 서로 맞잡아도 또 차분하게 타이밍을 보고, 그렇게 경기가 흘러가다 보니 파이팅은 하나도 없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기가 됐다.
그러나 그건 두 선수와 관련이 없는 이들이나 그렇게 느끼는 거고, 지인들은 달랐다.
폭풍전야라 하던가?
폭풍 전의 고요함을?
지금 느껴지는 분위기가 딱 그랬다.
이런 경기는 보통 한 방이다.
그냥 한방에 쾅! 하고 어느 한쪽이 한판으로 승리를 따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기가 분명 그렇게 끝날 거라는 게 예상이 되니 손에 땀이 절로 찼다.
‘제발, 제발…….’
베카우리 라샤는 강했다.
강한결이 연장 접전을 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는데, 심지어 누가 이길지 감이 안 잡힌다는 것 자체가 그의 강함을 증명했다. 다른 선수들은 아마 강한결의 실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을 거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 강한결이 저렇게 경기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그가 선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일 거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강한결의 성적은 아직 세계 청소년 선수권과 아시아 선수권이 끝이었다. 그러나 베카우리 라샤는 도쿄 올림픽 금메달을 포함해 이미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선수였다. 그러니 연장까지 온 강한결이 그래도 선방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게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란 걸 지영은 인정했다.
인정했지만,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왜?
지영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미래를 살다 왔다.
유도에서 멀어졌지만, 가까이 있기도 했다. 꽤 오래 코치 생활을 하며 지영은 안목이란 걸 길렀다. 얼마 안 되는 선수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선수들만으로 성적을 내려면 상대 선수와 내가 가르치는 선수와의 실력 차이를 아주 객관적으로 보고,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메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쪽으로도 재능이 뛰어났던 지영이라서, 전력 분석관을 해도 충분할 정도의 실력이 이미 갖춰져 있었다.
그걸 토대로 봤을 때 강한결의 실력은 지금 세계 최정상급이다.
여러 가지 정보를 토대로, 냉정하게 내려본 계산으로 그랬다. 실제로 이는 대표팀 전력분석실도 똑같이 예측했다.
단순히 우리나라 선수니까 세계 최고! 이러는 게 아니라 강한결이 붙었던 국내 선수들, 그리고 세계 대회서 붙었던 선수들, 이런 것들을 최대한 교차검증 해가며 랭킹, 실력 등을 뽑아보는 거다.
그렇게 뽑아봤을 때, 강한결은 첫 번째였다.
하지만 공동이었다. 베카우리 라샤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이 전력 분석팀에서도 서지 않은 거다. 그걸 지영은 오기 전에 분석팀장이랑 얘기하다가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분석이 틀리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찰떡같이 맞아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
전력 분석이라는 게, 언제고 틀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맛테!
경기 초반에 나왔던 지도 하나씩.
그게 연장 1분쯤에 하나씩 더 늘어 2개가 됐다. 이제는 둘 다 뒤가 없었다. 밀리면 반칙패로 게임 끝이고, 패자전으로 추락이다. 반대로 승자는 4강으로 올라가고. 그 방향을 가를 순간이 왔다.
역시, 지도 하나씩 더 들어가니까 공기의 질이 변했다.
이전까지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었다면, 지금은 심지가 거의 다 타들어 간 폭탄을 보는 기분이었다. 언제 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폭탄. 그만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속이 타들어 간다는 뜻이었다.
하지메!
다시 시작.
지영은 본능적으로 이번에 승패가 갈릴 거라는 걸 깨달았다.
두근, 두근두근.
뛰는 심장이 곧, 큰 게 온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그 알림대로,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콰앙! 체육관의 정적을 찢는 소리와 함께 우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예상한 것처럼, 승부가 났다.
* * *
와아!
번쩍!
“이겼다아!”
양지원은 두 손을 번쩍 들고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
“아 깜짝아! 얘! 놀랐잖아!”
같이 TV를 보고 있던 곽현정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훈련 도중이었다.
한겨울에 돌입했으니, 양지원도 한창 시즌 중이고 얼마 뒤에 대회가 있어 훈련에 몰두해야 하지만,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 결정적인 공헌을 한 남자친구 강한결의 시합이 오늘이라 오늘은 가볍게 몸만 푸는 중이었다.
그러나 몸 푸는 것도 이미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양지원이라 괜히 다칠까 봐, 아예 연습을 끝냈다. 그리고 체육관 사무실에서 TV를 보는 중이었다.
-강한결 선수! 깔끔한 업어치기 한판입니다!
-아, 아름다워요! 오른쪽 맞잡은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틈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반대로 몸을 틀면서 소매꽂이를 넣었어요! 아, 베카우리 선수의 허를 정확히 찌르고 들어간 기술이었습니다!
-네! 정말 멋있습니다! 아 강한결 선수가 베카우리 라샤 선수를 업어치기로 잡고 준결승전에 진출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강한결 선수!
멘트 뒤에, 강한결의 반대쪽 업어치기 한판 장면이 계속해서 리플레이로 나왔다.
짝짝짝!
양지원은 화면 가득 들어온 남자친구의 모습에 물개박수를 쳤다. 그에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현재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곽현정 사단이라고 해도 좋고, 양지원 사단이라고 해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양지원의 경기를 위해 모인 사람들도, 그래서 그만큼 가까웠다.
따라서, 그녀와 강한결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정혜야, 진짜 신기하지 않아? 항상 무표정한 지원이가 저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펄쩍펄쩍 뛰는 게?”
“윤정 언니도 그래요? 저도 그렇긴 해요. 저 얼음공주가 만면에 미소라니. 팬들이 알면 까무러치겠어요. 근데 언니, 둘은 언제부터 사귀었대요?”
“글쎄? 나도 늦게 들어와서 잘은 모르는데, 일단 내가 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진한 썸 관계였을걸? 그때도 강한결 선수가 주말에 시간만 되면 찾아와서 구경하다 가고 그랬거든.”
“아 진짜요? 와…… 근데 이거 알려지면 난리 나겠죠?”
“난리 날 게 뭐 있니? 선남선녀 커플인데.”
양지원의 모든 스케줄을 ‘관리’하는 이윤정의 말에, 컨디션부터 시작해 양지원의 전부를 책임지는 장정혜가 고개를 저으며 딴말을 했다.
“잘 어울리는 건 저도 알죠. 그런데 안쪽으로 들어가면 후원 관계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쉿.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절대 하지 마. 있지도 않은 얘기가 그런 사소한 걸로 흘러나가니까.”
“아, 넵!”
소곤소곤 얘기해서 아무도 듣지 못한 얘기. 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었다. 뭐 건질 것 없을까 해서 슬그머니 접근했던 한 기자가 창문 틈 사이로 흘러나온 대화를 들었고, 그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방방 뛰는 양지원의 사진을 포함해 대화들을 다 담아서, 몸이 얼기 직전에서야 그 자리에서 떠났다.
그것도 모른 채, 양지원은 TV만 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빛.
본인도 대회가 얼만 남지 않았다는 걸 알기는 하는지……. 그게 기가 막혀서 곽현정이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
“너 아주, TV로 들어가겠다. 들어가겠어!”
“코치님.”
“어, 왜!”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뭐?”
“힝, 가서 직관하고 싶어요.”
울상이 되는 양지원의 모습을 잠시 보던 곽현정은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자기도 연애 때는 그랬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오글거리는 손발을 달랬다.
“아주 은퇴하면 바로 결혼할 기센데?”
“어, 음? 나쁘지 않은데요? 언니는 지영 오빠 그랜드 슬램 달성하면 바로 결혼할 거래요.”
“응?”
이건 또 뭔 소리?
곽현정은 뭔가, 여자로서 굉장히 흥미가 동하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양지원에게 바짝 붙었다.
“뭐라고?”
“언니요. 지영 오빠가 고백했대요. 자기, 그랜드 슬램까지만 기다려달라고.”
“그랜드 슬램? 그거 왜?”
“한결 오빠도 그렇고, 지영 오빠도 그렇고 그랜드 슬램 이루고 나면 유도 은퇴할 거래요. 미련 없이 박수 칠 때 떠날 거래요.”
“…….”
헐.
허얼…….
은퇴?
유도를 은퇴한다고?
지영의 나이가 이제 고작 고3이다. 며칠 후면 스무 살이 되겠지만 법적으로는 만 나이로 치니 성인도 아니다. 하지만 스무 살이나, 열아홉이나 운동선수로 생각해 보면 큰 차이가 있을 나이는 아니었다.
내년이 올림픽인데, 그때가 되면 지영이나 한결이나, 황금세대 애들이나 전부 스무 살이다.
피지컬적으로 거의 절정을 찍기 직전의 나이. 실력으로도 절정일 나이였다.
피겨는 다르지만, 유도라는 종목은 그렇다고 들었다. 스물에서 스물 중후반까지, 절정을 달리는 만큼 은퇴라는 얘기를 입에 담기에는 일러도 너무 이른 나이였다.
“아니, 왜? 걔들이면 2연패를 넘어 3연패도 가능할 텐데?”
곽현정이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묻자, 양지원이 빙판 위에 피어난 모닥불같이, 위험하면서 따뜻한 그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결 오빠 대학교도 사회복지학과로 간대요. 그리고 그랜드 슬램 이루면, 방송 활동도 하면서 지금 하는 후원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대요.”
“아…… 진짜?”
이건 곽현정도 처음 듣는 얘기라서 정말 놀랐다.
“네. 그럴 거래요.”
“와 진짜 대단…… 아니, 이게 아니지. 은퇴하고 지영이가 뭐?”
“언니한테 고백했대요. 기다려 달라고. 그랜드 슬램 이루면, 결혼하자고.”
“헐…….”
곽현정은 정말 놀랐다.
“정말이지, 상식을 벗어나는 애들이구나…….”
“후후, 그렇죠?”
“그래, 와, 장난 아니다…….”
마침 TV가 환한 미소로 박수를 치고 있는 강지영을 잡았다.
카메라를 확인했는지,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짓는 강지영. 양유진은 장을 보고 집에 있을 언니가 또 저거 보고 얼마나 꺅꺅거리고 있을지, 안 봐도 선했다.
“그럼 넌? 괜찮아? 언니가 그렇게 일찍 결혼해도?”
곽현정의 물음에 양지원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 오빠는 믿을 수 있어요. 그 오빠 말은 없어도 하는 걸 보면 우리 언니를 얼마나 위하고 있는지 정말 너무 잘 보이거든요.”
“그래? 그런 게 벌써 보여?”
곽현정이 웃으며 묻자, 양지원도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이 식당에 가면요. 지영 오빠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언니를 향하고 있어요. 수저 젓가락 챙겨주는 거. 물 따라주는 거. 먹을 건 챙겨주는 것도, 그런 게 전부 언니를 향해 있어요. 아! 우리 오빠도 그래요.”
“후후, 알아. 알았다, 이것아.”
혼자 흥분해서, 혼자 볼이 빨개지는 양지원이었다.
“그래서 지영 오빠라면 믿을 수 있어요.”
“너는? 너는 한결이 믿어?”
“네? 그럼요!”
믿어.
믿어요!
그 사람의 진심이라고 믿고 있어요!
곽현정은 두 눈으로 그렇게 투쟁하는 투사처럼 외치는 것 같은 제자의 눈빛을 보고, 정말 잘 됐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상 신기한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더니, 인연이 닿고 닿아 재능은 정말 신이 내렸는데 현실은 악마가 뒤에서 버티고 있는 것처럼 막막하던 아이들의 빛이 되어줬다.
그 결과 제자는 이제 세계 최고를 노리고 있었다.
준비는 거의 끝났다.
남은 건 증명할 기회뿐.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 지영이, 한결이가 너무나 고마운 곽현정이었다.
아직 어리니까, 어떻게 될지는 솔직히 그때 가봐야 아는 거지만 곽현정은 두 커플이 꼭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 한결이 나온다! 지원아!”
“네? 벌써요?”
후다닥 몸을 돌리는 양지원.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준결승에 올랐으니 아직 그의 경기는 한참 남았는데, 빤히 알고 있으면서 속은 양지원이었다.
깔깔거리는 직원들 때문에 볼이 빨개진 양지원은 슬그머니 사무실을 나갔다. 밖으로 나갔던 그녀가 다시 들어온 건, 준결승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열애설이 터진 직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