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22화
222화. 가노컵(16)
베카우리 라샤.
2023년인 지금 고작 스물셋의 젊은 선수다.
한국으로 따지면 대학교 4학년쯤일 베카우리 라샤는 대학이 아닌, 세계 최강의 선수였다. 강한결이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넘보기 시작했다면, 베카우리 라샤는 이미 세계 최고다.
그는 도쿄 올림픽부터 시작해 이미 수많은 메이저 대회를 접수하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낸 선수였다.
강한결에게 아직 물음표가 붙는다면, 베카우리 라샤에겐 최강! 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재.
혹은.
괴물.
그도 아니면.
최강.
-90체급에서, 세계 유도인이 베카우리 라샤를 칭하는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지영이 봤을 때도 베카우리 라샤는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한 선수였다. 잘했다. 그냥 다른 미사여구를 다 빼고 베카우리 라샤는 천재라고, 괴물이라고, 최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잘했다.
영상을 잠깐 봤는데도 그런 느낌이 물씬 나는 게 베카우리 라샤였다.
그리고 오늘 실제로 라샤가 시합하는 모습을 보면서, 강한결이 이번엔 제대로 임자를 만나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조용해졌다.
강한결을 향한 응원이 좀 있긴 했는데, 반대로 그만큼 베카우리 라샤도 응원을 받았다. 그도 강한결 못지않은 아주 훈훈한 미남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8강전.
여기서 이기는 사람은 4강, 준결승이다.
지면 패자전으로 떨어지고.
그러니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만만치 않으니 지영은 절로 긴장됐다.
하지메!
심판의 사인에 동서양을 대표한다고 봐도 좋은 두 젊은 천재가 맞붙었다. 베카우리 라샤는 전형적인 오른쪽 자세에서 허벅다리, 허리후리기, 밭다리 등을 찍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훅 들어오면 안아서 안다리를 걸기도 하고 그랬다.
그러니 자세로 본다면 강한결과 맞잡는 스타일이었다.
강한결도 오른쪽 정통 자세다.
베카우리 라샤와 정말 거의 판박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스타일이 비슷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좀 더 부드러운 유도를 구사한다는 것 정도?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승패에 차이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유도가 유자가 아무리 부드러울 유(柔) 자가 들어간다고 해도,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제압한다는 전제는 이미 유도가 스포츠화가 되면서 깨진 지 오래였다. 요즘은 힘 유도도, 기술 유도도, 지영처럼 변칙 카운터 유도도, 아니면 잡기로 상대를 코너로 밀어 넣어서 승기를 잡는 운용 형태의 유도도, 어떤 것도 다 중요했고, 다 강했다.
그러니 좀 더 부드럽다고 그게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었다.
역으로 생각하면 부드럽다는 것 자체가, 상대보다 근력이 부족하다는 걸로 보일 수도 있고, 근력이 부족한 건 넘길 때, 방어할 때 힘에서 밀린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그러니 두 선수 중 누가 우세할지는, 아직 모른다.
지영이야 솔직히 강한결이 우세하면 했다.
강한결이 더 잘해서, 그가 이겼으면 했다. 하지만 스포츠 세계만큼이나 냉정한 세계도 드물었다. 실력 차가 없이 백중세라 하더라도, 승리의 여신이 무조건 이쪽을 향해 미소 지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믿어야 했다.
‘믿는다, 강한결…….’
지영은 속으로 그렇게 친구를 믿었다.
“강한결! 믿는다!”
그리고 이성진은 대놓고 친구를 믿었다.
그런 이성진의 응원에 지영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응원은 이런 거다. 후,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배에 힘을 빡! 주면서!
“강한결! 파이팅!”
“악!”
쩌렁!
지영의 응원에 놀란 이성진이 귀를 막으며 지영을 바라봤다. 지영은 그냥 씩 웃어주곤 다시 한번 파이팅을 크게 외쳤다. 강한결! 파이팅! 그리고 지영의 큰 응원이 신호탄이 된 건지, 맞붙었다.
휘익!
서로 맞잡이.
둘 다 오른쪽으로 틀어잡으며 곧장 자세를 잡았다.
서로 손속을 겨루지도 않고 바로 이런 포지션으로 들어왔다는 건, 서로에 대해 조사가 제대로 되어 있단 뜻이었다. 베카우리 라샤는 천재인데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세계 최강의 자리에 있는 선수인데도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강한결과의 경기를 준비한 게 눈에 보였다.
그걸 깨닫자마자 반사적으로 ‘힘겨운 경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영의 체급만 하더라도, 지영이 두 번이나 이겼지만 언제 져도 이상하지 않을 미야모토 신지라는 괴물 천재가 있었다. 지영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와 자신의 실력 차가 거의 없음을 알았다.
그날의 컨디션.
그날의 경기운.
그날의 승부욕.
그런 것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거다.
그리고 거기서 승패가 갈린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없다는 소리다. 지영이 보기에 베카우리 라샤와 강한결이 그랬다. 강한결 등장 이전에 압도적 퍼포먼스를 보이는 선수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다. 고작 네 살 차이. 그러니 실력, 피지컬, 거의 모든 게 동등하다.
툭, 툭.
서로 발목 받치기를 가볍게 툭툭 대면서 신경전을 벌였다.
곧장 치고 들어가기엔, 서로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지영과 신지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굳이 저런 신경전, 탐색전이 필요 없지만, 저 둘은 아무리 경기 영상으로 분석을 했어도 실제 잡는 건 처음이다.
그러니 탐색전을 통해 시합 방향성을 경기 중 즉시 수정하고 싶은 것 같았다.
경기 영상 분석과 다르게 가는 경우가 시합 때 자주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상대도 자신의 스타일에 맞춰 전략을 짰을 테니, 당연히 스타일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맛테!
그쳐 후 지도 하나씩.
그리고 이 지도 하나가 짧은 탐색전을 끝냈다. 아마 머릿속에 두 선수는 계산이 섰을 거다. 자신이 준비한 대로 시합이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선수들은 상대를 딱 잡는 순간 경기가 쉽게 가겠구나. 어렵게 가겠구나. 이런 기초적인 정보는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지영도 잡아보면 딱 느껴진다. 아, 넘기기 쉽겠다. 잡기가 약하구나. 이런 기본 정보들은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 잡아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리고 그 안에 빠르게 캐치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이번엔 서로 똑같이 잡지 않았다.
같은 자세로 틀어잡는 자세는 모 아니면 도의 자세다. 저 자세에서 가장 위험한 게 밭다리인데, 밭다리가 진짜 벼랑 끝 기술이다. 제대로 걸면 상대를 한판 던지기 가장 쉽지만, 저 자세에서 되치기당하면 무조건 한판밖에 안 나오는 벼랑 끝 기술. 그래서 맞잡는 자세에서는 한판이 잘 나왔다. 넘기든가, 되치기당하든가.
승자는 그럼 누가 될까?
잘하는 놈이다.
잘하는 놈이 이기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맞다고 할 수 있었다.
쿵!
베카우리 라샤가 몸 쓰기 후 찍은 밭다리. 강한결은 몸 쓰기 시작할 때부터 밭다리라고 느꼈는지 즉각 자세를 낮췄다. 그 직후 밭다리가 들어왔고, 버틴 다음 되치기를 걸려고 했는데 베카우리 라샤는 힘이 상당했다.
그냥 그 자세에서 맞불.
강한결은 자세가 좋아서 밀리지 않았고, 베카우리 라샤는 힘으로 버텼다.
맛테!
심판의 그쳐 사인과 함께 떨어지는 두 선수. 이걸로 유효 포인트를 먼저 베카우리 라샤가 가져갔다. 기술을 걸어 넘어가는 것처럼 만드는 것만이 유효 포인트의 전부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선공 후, 버티기 같은 장면이 나와도 먼저 기술을 건 선수에게 유효 포인트가 들어갔다.
여기서 라샤의 선공이 한 번 더 이어지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 강한결에게 무조건 지도가 들어가게 될 거다.
‘그럼 쫓기게 될 거고…….’
경기 흐름이, 원하는 대로 가다가 꽉 막힌 것처럼 변한다.
마치 물이 나오는 호수의 중간을 집게로 찝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영은 강한결을 믿었다. 베카우리 라샤는 천재다.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다. 하지만 강한결도 천재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천재. 지영은 강한결의 실력이 결코 라샤와 비교해 부족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경기 운용? 그건 지영의 특기지만 애초에 이런 운용을 가장 많이 참고한 게 바로 강한결이었다.
언제나 차분한 정신으로 상대방을 시종일관 압도하는 유도를 선보였다.
지금은 임효중이 가장 경기가 편안……한 마음으로 보고 있지만, 원래 그 원조는 강한결이었다. 그래서 지영이 지금의 스타일을 만들 때, 가장 많이 참고한 게 강한결이었다. 그래서 강한결에게 연습 때 가장 많이 넘어갔던 지영이었다.
그러니 강한결은 아마 알고 있을 거다.
지영처럼 수비적인 유도는 라샤의 유도를 더욱 빛나게 해줄 뿐이라는 걸.
하지메!
다시 시작된 경기.
역시 강한결은 알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나가는 척하며 벼락처럼 모두걸기를 쓸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간 모두걸기였다. 유도 기술은 전조 자세가 보인다. 보통은 업어치기든, 허리후리기든 스텝과 각을 만들기 위해 사전 준비 동작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축구에서 볼을 차기 위해서는 발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농구에서는 볼을 머리 위로 올려서 자세를 잡는 것처럼, 그런 자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도의 기술들도 그런 자세가 필요했다. 제자리서는 상대를 잡아도, 스텝을 밟지 않는 이상 절대로 돌아서, 앉아서, 업어치기를 걸 수 없었다. 겨드랑이에 공간을 만들고, 상대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는 스텝이 이어져야 하고, 이런 순차적인 연계가 필요한데 강한결은 그게 없이 그냥 나가는 자세에서 모두걸기를 툭 쓸었다.
물론 제대로 힘이 들어간 자세는 아니었다.
준비 자세가 없었기 때문에 기술에 힘이 전달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제대로 걸리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발이 살짝 뜨는 그 찰나의 틈.
지면에서 살짝 뜨는 그 순간. 강한결은 그 순간을 노렸다.
툭, 툭! 아니고, 그냥 톡, 걸린 정도의 느낌이지만 지면에서 살짝 뜬 베카우리 라샤의 발이 강한결의 모두걸기에 매트 위로 훅 쓸려나갔다. 발이 쓸려나가고, 중심도 같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베카우리 라샤는 이 정도로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베카우리 라샤 정도로 세계에서 군림하려면 넘기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방어도 수준급 이상이어야 했다. 공방일체가 갖춰진 선수만이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는 법이었다.
라샤는 버텼다.
쓸려 나가는 아주 짧은 순간을 인지하고, 급히 발을 매트에 강하게 대면서 중심이 무너지는 걸 막았다. 하지만 이미 그때 강한결은 자신의 자세를 잡았다.
베카우리 라샤의 목과 가슴 깃을 정확히 잡고, 틀어잡기 자세를 완성한 강한결은 몸 쓰기 후 다시 툭, 안뒤축을 쳤다. 아직 자세를 잡지 못해서 엉거주춤한 상태라 베카우리 라샤는 이 정도의 기술에도 중심이 흔들렸다.
그러나 강한결은 무리하지 않았다. 툭툭. 짧게 연계하면서 쳐내는 하체를 집중공략하는 강한결.
잘 잡긴 했지만 여기서 큰 기술을 걸었다가는 크게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걸 강한결은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전 공방 때 선공을 주며 유효 포인트를 빼앗긴 것만 상쇄하기로 정한 것 같았다.
‘잘한다, 잘하고 있어.’
지영은 그 선택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라샤의 경기를 보면 되치기도 많았다. 좌, 우. 말아업어치기 같은 것도 타이밍만 잡으면 그대로 찍어 눌러 굳히기로 연결하는 카운터를 치는 라샤였다. 지영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준급 카운터 능력자였다. 그러니 급하게 기술을 거는 건, 날 넘겨달라고 양팔 벌려 달려드는 것과 똑같았다.
맛테!
그쳐.
지영은 서로 반칙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처럼 서로에게 들어간 반칙은 없었다. 브라이언 오셔 사태 이후, 판정이 불편한 정도로 클린해졌다.
하지메!
시작.
다시 시작된 경기.
한 번씩 주고받았다.
지영은 라샤의 표정이 엄청나게 차분한 걸 보면서, 괜히 정상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구나란 생각이 자연히 들었다. 보통 저 나이에 왕좌에 올랐으면 오노 쇼헤이처럼 좀 건방져질 법도 한데, 라샤에게는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조금의 방심도 없이 강한결을 상대하는 베카우리 라샤.
미야모토 신지에 이어, 또 다른 라이벌의 출현이었다.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거라는 지영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공방은 계속 이어졌다. 서로 틀어잡았다가, 서로 한 번씩 기술을 주고받아 반칙 받을 각을 없애고. 이게 반복되니 4분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지도 하나씩 주고받고. 점수 없음.
연장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