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18화
218화. 가노컵(12)
지영은 하시모토 소이치가 정말 생각보다 별거 없구나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을 지영은 그의 경기 영상을 보면서도 했었다. 세계 랭킹 1위. 가장 눈부신 업적을 달성한 선수 중 하나.
그런 수식어가 붙은 하시모토 소이치지만, 시합 영상을 보면 정말이지, 깔끔한 맛이 없었다.
오노 쇼헤이는 그 자체로 제왕의 느낌이 난다.
그는 정말 확실히 잘한다! 역시 올림픽 2연패를 할만하다! 이런 느낌이 확 난다. 신지는? 대놓고 천재의 느낌을 팍팍 풍긴다. 그래서 신지는 지영 본인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하시모토 소이치 이 선수는 아니었다. 좌우로 꽂는 빗당겨치기는 솔직히 이게 뭔 기술이지 싶을 정도로 억지 기술이었다.
조금 더 냉정하게 얘기하면, 대체 이 선수가 어떻게 세계 최고가 된 거지?
이런 느낌이 드는 경기력이었다.
옛날 안호진 선수와 맞붙었던 경기 영상을 봐도 그랬다.
정말 별거 없었다.
잘 밀어붙이고, 경기 운용도 그럭저럭하지만, 상대를 넘기는 특별한 한방이 없는 선수였다. 이게 문제였다.
유도가 무슨 종목인가?
상대를 넘기는 종목이다.
축구가 둥그런 공을 상대의 골대에 넣어서 이기는 경기라면, 우도는 상대의 등이 매트에 먼저 닿게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스포츠다. 그런 스포츠에서 상대를 넘기는 기술 자체가 없다?
‘뭐, 자기보다 실력이 떨어지면 그럭저럭 잘 넘기긴 하겠지.’
하지만 실력이 비슷하거나, 잘하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하시모토 소이치는 그 영역에서 너무 떨어졌다. 적어도 지영이 보기에는 그랬다. 옛날보단, 현대 유도의 혜택을 아주 듬뿍 받은 선수였다. 그리고 그걸 아마 일본 유도 협회도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자체 선발전을 했지만, 결국엔 오노 쇼헤이가 나왔다.
왜?
그가 좀 더, 세계 유도에 강했기 때문이었다.
오노 쇼헤이는 기술이 있었다.
유도 선수가, 유도 선수답게 보이는 절대적인 기준인 상대를 넘기는 기술이 그에게는 확실히 있었다. 그리고 신지에게도, 이번 대회에 나오지 못한, 아직 지영이 잡아보지 못한 에비누마도 기술이 있었다.
껍데기.
그걸 본인도 안 걸까?
그래서 상대를 그렇게 깔보는 그런 시선으로 처음부터. 혹은 이기고 나서 그렇게 던졌던 걸까?
지영은 준결승이 끝나고 자신을 보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우쭈쭈, 좀 하긴 하네?
그래도 결승까지 올라온 걸 보니까?
딱 그런 느낌이 담긴 눈빛이었다.
지영은 이쯤 되니까 알 것 같았다.
40초 남은 시간을 확인하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덤벼드는 하시모토 소이치를 차분하게 상대하다 보니까 이제는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이 선수는 이랬어야 했다. 아무리 잘하고, 세계 정상의 무대에 서도 하시모토는 애초에 오노 쇼헤이란 벽을 넘지 못했다. 66에서 올라온 에비누마는 잡아도, 오노 쇼헤이란 벽은 넘지 못해 결국 이인자의 자리밖에 그에게는 없었다.
왕이 없는 왕좌에 몰래 앉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거드름이라도 피우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내가 최고다.
나도 세계 최고다!
상대를 깔봄으로써,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깔보고 이를 가는 선수들을 눈으로 보고 그래야 부족한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지영은 그걸, 철저히 무너트렸다.
“으아!”
업어치기를 하려고 몸을 돌리는 걸 배로 툭 튕겨내면서 손을 뜯었다. 제대로 잡지도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걸던 기술이라, 이 동작에 그냥 힘없이 도복을 놓쳤다. 이건 확실한 위장 공격이지만 이번엔 반칙을 주지 않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하시모토 소이치는 다시 지영에게 덤벼들었다.
소이치는 급했다.
하지만 지영은 느긋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딱 버티고 선 채로 철저히 기술을 봉쇄하고, 뜯어냈다.
소이치는 지영이 본 실력을 드러낼 정도까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20초 남았을 때, 이 이상 시합을 하는 건 정말이지 의미가 없겠다 싶어, 빗당겨치기를 또 이상하게 욱여넣는 타이밍에 모두걸기를 때렸다.
처음에 그를 무너지게 만든 계기를 제공한 모두걸기가, 결국 그의 중심을 또 붕 띄웠다. 저 멀리서 아 와사바리!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아…… 안타까운 탄식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큭…….”
이를 악물고 억울해하는 하시모토 소이치를 잠시 보던 지영은 아직도 그가 가슴 깃을 툭 채서 뜯었다. 그에 소이치의 표정이 또 꿈틀거렸다. 그런데 그러면 뭐. 패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다. 지영은 상체를 세우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관중들을 둘러봤다.
우우…….
이전에 비해서 힘이 바짝 떨어진 야유를 가만히 듣던 지영은 그냥 작게 피식 웃으며 자리로 가서 섰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 실력을 인정하지 못해 승패에 굴복하지 못한 눈빛인 하시모토 소이치.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우우!
지영의 눈빛을 본 건지, 야유가 더욱 강해졌다. 지영의 눈엔 벌써 물병을 일발 장전한 관중까지 보였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인데,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진심으로 지영을 싫어하는 눈빛이었다.
심판의 승자 선언.
지영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악수하러 하시모토 소이치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는데 그냥 툭 치곤 뒤돌아서 나가버렸다. 뭐 하는 인간이지?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본적인 매너가 진짜 꽝이다.
지영은 그런 소이치의 행동에 피식 웃곤 몸을 돌려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우승.
금메달이다.
가노컵이니까, 이번에도 일본에서 일본 유도의 자존심 중 하나를 깔끔하게 깼다. 솔직히 지영은 진짜 독한 마음을 먹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야유와 조센징이라는 단어에 이쪽 단어로는 야마가 홱 돌아버릴 뻔했다.
하지만 역시 경기가 시작되자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실력이 ‘별로’인 하시모토 소이치의 실력에 실망해서 그런지 흥이 팍 식어버렸다. 오노 쇼헤이도 그렇고, 하시모토 소이치도 그렇고, 지영의 감각이 깨어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날은 왔다가 도로 물러가 버렸다.
홱!
깡! 까강!
철로 만든 수통이 날아들어 바닥에 떨어졌다.
지영은 그걸 보고 있었기 때문에 걷다 말고 멈춰서 그냥 가만히 지켜봤다.
우우!
죽어라! 조센징!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지영은 자신에게 야유를 보내는 관중을 가만히 보다가, 몸을 돌려 빠져나갔다. 이 이상 할 용기는 없는 사람들이다. 일본어로 뭐라고 떠들긴 하지만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그리고 지금 저러는 모습은 전부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한국팀이 바보도 아니고, 저런 비매너를 넘어선 범죄 행위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전기정 감독은 이걸 반드시 IJF에 기소해 강력히 따질 생각이었다.
경기가 끝났다.
지영의 결승전을 끝으로 첫날 대회가 전부 끝났다.
원래는 시상식이 이어져야 하는 순간이지만.
“시상식 없이 그냥 메달만 건네주고 끝내자?”
“네. 그렇게 말하는데요?”
“이야, 아주 지랄 들을 하는구나?”
일본 협회에서 나온 사람이 한 말을, 협회에서 같이 온 통역사가 통역해준 말에 전기정 감독은 결국 험악한 말을 대놓고 던졌다. 세계 유도 명예의 전당은 물론, 업어치기 하나만큼은 일본에서도 엄청난 존경을 받는 전기정 감독이다.
그런 전기정의 분노에 협회 사람은 연신 허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단 말만 연발했다.
“하아, 당신이 뭔 힘이 있겠습니까. 알았으니까, 가보세요.”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를 연발하며 그가 나가자, 전기정 감독은 올라오는 짜증을 감출 길이 없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분노를 눌렀다. 지영은 그런 감독을 보면서, 덤덤한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잠시 뒤, 여자팀까지 대기실로 들어오자 전기정 감독은 상황을 설명했다.
“극우 단체 때문에 시상식 힘드니까, 그냥 돌아가란다. 미안하다.”
전기정 감독이 그렇게 말하며 사과를 했다. 사실 그가 사과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인데도, 그가 사과했다. 솔직히 시상식은 대회의 꽃 중 하나다. 완벽한 엔딩, 클라이막스를 담당하는 게 바로 시상식이었다. 가장 높은 단상에 올라가, 가장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고, 애국가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시상식이었다.
아주 유명한 짤이 있지 않나?
대한민국 피겨 여신이 한 대회에서, 양옆에 일장기를 두고 태극기에 예의를 표하는 뒷모습. 그런 게 다 시상식에서만 나오는 거였다.
그런 시상식을 생략한다?
그냥 메달과 상장만 건네준다?
지영은 그 의도가 너무 빤히 보여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건 굳이 지영만 겨냥한 문제는 아니었다. 오늘 한국팀의 성적은 아주 좋았다. 일본이 금 세 개와 은 하나, 동 하나 두 개로 더 좋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베스트였다.
그런 한국 선수들의 단상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일장기가 태극기의 옆으로 내려선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체육관에 대한민국 국가가 흘러나오는 게 싫었던 거다.
이런 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이유가 딱딱 나왔다.
잠시 기다리자, 미리 뽑아두었던 메달과 꽃다발을 박스에 담아 가져다줬다. 각자 선수 이름이 새겨진 박스에 담아 가져다줬는데, 그걸 빼서 본 지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아무것도 아냐. 짐 다 챙겼어?”
“다 챙겼지.”
대기실에 흘린 게 없나 확인한 지영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와, 진짜 너무하네.”
벌써 이쪽 대기실은 불까지 꺼버렸다.
아니, 이렇게까지 왜 그러나 싶을 정도로 치졸했다. 지영은 그냥 다 이해하기로 했다. 아니,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밖으로 나오자 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제 막 시합이 끝났으니 인터뷰를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전기정 감독이 앞으로 나서서 짧게 질문 몇 개만 받겠다고 말을 했다.
일본 기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 기자들도 있어서 인터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형식적인 인터뷰가 이어졌다.
일본의 야유가 가득한 경기였다. 기분이 어땠나. 금메달을 땄다. 기분이 어떤가. 현재 무패 행진 중이다. 기분이 어떤지 등등, 그런 질문만 이어졌다. 어쩐 일이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지영 선수! 이번 대회로 일본의 유도 강자 셋과 전부 시합했습니다. 그리고 전부 경기에 승리했는데요. 일본 73체급의 과거의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모두 격파한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감상이 어떤지 듣고 싶습니다!”
한 기자의 질문에 지영은 이걸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좀 고민됐다.
영어로 날아온 질문이었고, 아시아인이 한 질문이었다. 한국 기자일 수도 있고, 일본 기자일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면 중국이나 홍콩, 대만 쪽 기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런 질문은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뒤이어 엄습했다.
마치 미끼 같은……. 그리고 실제로 내용도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라니. 이건 아마도 과거는 오노 쇼헤이, 현재는 하시모토 소이치, 그리고 미래는 미야모토 신지를 말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지영이 전부 꺾긴 했다. 그러나 이걸 인터뷰에서 얘기하는 건 싸우자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시비를 이미 일본 협회가 먼저 걸긴 했지만, 기자의 이런 장난질에 넘어가 싸
지영은 그래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것보다는, 일본 협회에게 다른 할 말이 있습니다. 시상식을 안 하는 건 좋은데…… 이런 건 좀 신경 써줬으면 좋겠네요. 이번엔 정말 실망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지영은 박스를 열어, 불량품 메달을 꺼냈다.
촤자자작!
메달을 꺼내기 무섭게 카메라 불빛이 신나서 번쩍였다. 의도적으로 도금이 벗겨지고, 메달 한쪽이 뭉개진 불량품을 넣은 건지, 아니면 실수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영이 이런 걸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당연히 발뺌하겠지만 그래도 어차피 여론은 지영의 편일 수밖에 없었다.
지영에게 향하던 야유, 말도 안 되던 판정, 시상식 생략에 이런 불량품 메달 지급까지. 이걸 종합하면 뭔 변명을 대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거다. 그리고 다행히 이런 분위기를 전기정 감독의 지시로 한국에서 같이 온 스태프가 전부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팩트는 차다 못해, 넘쳤다.
그렇게 화제를 딴 곳으로 돌리고 지영은 슬그머니 빠졌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물러난 지영의 시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이쪽을 보고 있는 신지가 보였다. 신지는 정말 미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손으로 합장을 해 보인 뒤,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못난 어른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미야모토 신지. 다행이었다.
“하아…….”
그래도 양심이 있는 저 친구 때문에, 지영은 그나마 마지막에 작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줬다. 지영의 끄덕임을 본 신지가 떠나고, 지영도 곧 체육관을 벗어났다. 그렇게 하루째가 마무리된 가노컵.
이변은 없었고, 이틀째가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