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17화
217화. 가노컵(11)
하시모토 소이치.
세계 선수권만 몇 차례, 올림픽을 빼고는 거의 모든 대회를 석권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수준의 강자였다.
오노 쇼헤이가 올림픽 2연패로 이름이 높다면, 하시모토는 그 외의 모든 대회를 거의 쓸다시피 한 선수였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은 노장 축에 속하는데도 여전히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전 대회들을 보면서 지영은 솔직히 하시모토 소이치의 폼이,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것에 좀 놀라긴 했다.
서른셋인가, 넷인가.
일본 나이는 한국과는 달라서 좀 헷갈리지만 어쨌든 하시모토 소이치는 유도계에선 충분히 노장 소리를 들을 나이였다.
그런데도 아직 그는 정정하다 못해, 에너지가 넘쳤다.
이 정도로 몸 관리가 잘 됐으면 노장이라고 얕볼 수도 없었다.
그런 하시모토 소이치가, 거만한 눈빛으로 지영을 바라봤다. 지영은 그 시선을 차분히 맞받았다. 우우! 우우! 뭐라고 떠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놈의 조센징 소리는 빠지지 않았다.
금일 마지막 경기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 뒤, 심판이 입장했다.
“지영아!”
김재정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그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해 내리누르는 신호를 보냈다.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미 진정하고 있었다. 머리에 스위치가 올라오긴 했지만, 그 스위치가 시합을 망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로 흥분하기는 해도, 시합을 망칠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후.”
짧게 숨을 내쉬자 심판이 들어오라는 사인을 신호를 줬다.
인사. 입장. 인사. 한 걸음 앞으로.
하지메!
악! 핫!
짧게 기합을 지름과 동시에 시작된 결승전.
하시모토 소이치는, 오노 쇼헤이와 비슷한 유도였다. 비슷하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그만큼 건방진 도사 유도를 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는 세계 최강이기 때문에 건방진 도사 유도를 한다고 해도 하나의 스타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오히려 그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걸 들고나와서 시합에 쓰면 그건 하나의 스타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오노 쇼헤이만큼이나 이름값이 높은 하시모토 소이치의 무게였다.
턱을 척! 추어올리고.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은 채.
자세는 오른쪽도, 왼쪽도 아닌 기본 자연체에 가까운 자세.
솔직히 말하면…… 진짜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자세였다.
이런 자세는 메치기 본을 할 때나 쓰는 자세다.
양발이 오른쪽도, 왼쪽도 아닌 정면을 본 채 손을 들어 올린 건 못하는 후배를 가르칠 때나 쓰는 자세였다.
본래 이런 자세 아니냐고?
설마. 절대로 아니었다. 지영이 10일간 다른 선배들의 상대 경기 영상을 분석해 준 시간이 많았다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시합을 등한시 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연히 자신의 시합이 제일 중요하기에 하시모토 소이치의 영상을 가장 많이 봤다.
지영이 봤던 영상 속의 소이치에겐 자세가 당연히 있었다.
오른쪽.
오른쪽으로 잡고 빗당겨치기랑 업어치기 위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선수였다. 푹 파고드는 엇박자 빗당겨치기가 인상적이란 느낌도 받았다. 그런 선수인데 이런 자세라고. 기가 막혔다. 이건 지영을 무시해도, 정말 무시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영은 혀로 입술을 살짝 핥으며 오히려 웃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아마 최대한 자신을 가지고 놀면서 이 게임을 이기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물먹은 일본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시모토 소이치는 근본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었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반드시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그게 뭐냐고?
실력이다.
자신의 실력이 상대보다 압도적이어야 가지고 노는 것도 가능한 법이었다. 애초에 이기는 것조차도 실력이 더 위에 있어야 가능한 건데, 가지고 놀 정도로 시합을 풀어나가려면 최소 몇 수는 실력 차이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하시모토 소이치가 지영보다 그 정도 잘하기는 할까?
‘너, 오노 쇼헤이보다 잘해? 신지는 잡냐?’
둘 다 힘들어서 올림픽은 오노 쇼헤이에게 밀렸고, 아시안 게임은 신지에게 밀렸다. 아시아 권 선수에게 제일 영광스러운 대회가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이란 걸 생각하면 결국 하시모토 소이치는 결국엔 3순위다.
세계 랭킹이 전부는 아니다.
메달의 존재가 전부도 아니다.
상대성이라는 게 있어서, 하시모토 소이치가 강지영이란 선수에게 어마어마하게 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턱, 잡아본 결과, 지영은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울 거로 생각했다.
묵직하긴 했다.
170 정도의 신장과 단단한 육체를 보면 역시 힘이 베이스다.
기술을 거는 걸 보면 이게 기술인지 뭔지 헷갈릴 정도로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실력은 확실했다. 특히 잡기 쪽은 지영과 비슷했다. 굳이 잡기 싸움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란 뜻이었다. 상대가 가슴 깃을 잡으면 조금 뒤에 가슴 깃을 잡고, 소매 깃을 잡으면 조금 늦게 깃을 잡고 경기를 풀어가는 스타일이었다.
지영과 흡사한 스타일.
애초에 일본 선수들은 잡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 73 선수들은 신지부터 시작해 오노 쇼헤이, 하시모토 소이치, 에비누마까지 전부 잡기를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게 풀어가는 편이 아니었다.
소이치는 지영의 가슴 깃을 잡고, 턱 아래에 바짝 댔다.
힘이 상대의 전진을 막는 방법으로는 목 근처 경동맥 부근에 그냥 그냥 툭 대고, 단단히 받치는 게 최고였다. 이렇게 받치고 있으면 힘이 월등한 장사가 아니라면, 힘으로 좁히기 힘들었다.
하지만 소이치는 이번에도 실수했다.
그 자신의 리치와 지영의 리치 계산을 잘못한 거다. 지영은 길었다. 이성진만큼이나.
툭.
퍽!
어깨 깃을 잡으면서 툭 친 모두걸기.
그런데 반사적으로 친 모두걸기에 중심이 흔들리네? 그것도 제대로? 지영은 볼 것도 없이 쭉 들어가며 그대로 한 번 더 쓸었다. 퍽! 소리가 날 만큼 발바닥으로 소이치의 뒤꿈치를 제대로 때렸다. 방심한 것 같진 않은데, 원래 유도는 이런 생각 없이 던진 기술에도 넘어가기도 하고 그런 종목이었다. 복싱으로 따지면 럭키 펀치고, 배드민턴이나 탁구로 따지면 네트인이라고 할까? 이것도 좀 비슷했다. 진짜 가볍게 툭 친 건데, 설마 한 방에 중심이 뜰 줄은 몰랐다.
쿵!
붕 떠서 뚝 떨어진 소이치.
그가 급히 심판을 올려다봤다.
와자리!
고민도 없이 나온 절반 사인.
지영도 절반으로 봤다. 애초에 제대로 등짝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 한판은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절반이다.
지영이 가장 좋아하는, 절반 선점 후 게임이 시작이다.
맛테!
하지메!
어, 거드름 피우던 소이치 어딨니? 갔니? 느긋하게 시작했었던 소이치는 자세를 바로잡고 적극적으로 나왔다. 아마 그도 지영이 시합을 연구했을 것이다. 따라서 지영이 절반을 딴 경기가 어떻게 됐는지는 전부 머릿속에 있기도 할 거다.
애초에 지영은 세계대회에 나와서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무패.
3번의 세계대회에서 전부 금메달을 땄고, 그러니 단 한 차례도 진 적이 없었다. 그런 지영의 경기를 보면 절반을 땄을 때는 진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상대를 철저하게 말려 죽이다가, 막판에 카운터로 쾅! 상대의 숨통을 끊는다.
지영은 잘 모르지만, 이런 지영의 스타일을 본 선수들은 그를 사냥꾼이라 불렀다.
레인저.
천천히 상대의 숨통을 물어뜯을 때도 있고, 초반에 일격을 가한 뒤 끝을 낼 때도 있는. 철저한 아웃 파이트 스타일. 길쭉한 팔다리와 타고난 경기 운용으로 상대를 말리는데 진짜 이골이 난 선수.
세계 유도의 변화로 사장된 방어 유도를 끄집어내서, 기가 막히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부활시킨 선수.
그러니 이런 선수에게 먼저 점수를 빼앗겼다는 게 얼마나 승패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지, 이 시합을 보는 선수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아, 힘들겠네.
일본팀 선수들의 표정에도 그런 기색이 스쳐 갔다. 시합은 하시모토 소이치의 시합을 보는 일본 팀의 동료들 얼굴에, 패색이 깃들었다. 그들이 냉정하게 봤을 때도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스쳐 간 게 분명했다.
지영은 느긋해졌다.
결승전이라고 심판이 장난질 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분명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절반을 따고 나면 지영이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많아진다.
툭, 툭.
잡고, 끊어내고,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걸 밖으로 돌면서 발목 받치기. 붕 뜨다가 겨우 버틴 하시모토 소이치. 그는 자세를 더 낮추고 밀고 왔다. 지영을 밀어서 수세로 보이게 한 다음, 반칙을 주려는 의도 같았다. 하지만 반칙 관리는 지영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장르다.
뒤로 밀리던 몸을 하체에 힘을 바짝 줘 딱 버텼다. 그러면서 역으로 하시모토를 밀자, 예상했던 대로 빗당겨치기가 쭉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지영은 소매를 뜯었다. 몸이 회전하는 순간을 노려 뜯어내니, 훨씬 수월하게 뜯겼다.
툭!
홰액!
자기 혼자 빙글 돌아 매트에 철퍼덕! 절하듯 엎드렸던 하시모토가 얼른 일어나 지영을 향해 다시 다가왔다. 땀이 나서인지, 기술 같지도 않은 기술 때문에 그런 건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맛테!
막 붉어진 하시모토를 잡기 직전에 심판은 그쳐를 선언했다.
왜 이 타이밍에?
시도!
으잉?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위장 공격으로 하시모토 소이치에게 지도가 들어갔다. 이 정도 위장 공격쯤은 그냥 넘어갈 거로 생각했는데, 제대로 반칙이 들어가 지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막판에 왜?
지영은 저도 모르게 밖을 봤는데, 한동안 안 보이던 심판 부회장의 모습에 판정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메!
심판의 시작 신호에 지영은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하시모토 소이치는 아직 그렇게까지 급한 건 아니었다. 당장 남은 시간이 2분 이상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는 언제든지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단 자신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 표정은 얼마 가지 못했다.
툭.
지영의 시합 운용은 이 바닥에서는 가히 최고 수준이다.
반칙 관리 능력은 최정상이고, 기술과 체력 또한 최정상이다. 하시모토의 건방진 도사 유도는 3분이 지났을 때쯤엔 완전히 사라졌다.
멋지고 화려하게?
그렇게 이겨도 되지.
하지만 지영은 그러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붙여준 별명답게, 지영은 절대 무리하지 않고 하시모토를 벼랑 끝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이익!”
억지로 틈을 만들려는 하시모토의 하체를 지영은 집중 공략했다.
가볍게 툭, 툭툭. 안다리에 안뒤축 연계 정도만으로도 하시모토는 들어오려다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특기는 빗당겨치기다. 빗당겨치기는 필연적으로 상대의 옆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지영은 그 틈을 주지 않았다.
거리가 상당해서 빗당겨치기를 넣었다간 뒤로 그대로 되치기당할 게 빤해 보였고, 그렇다고 파고 들어가서 아주 근접해 잡자니 긴 팔로 그걸 아예 봉쇄하고 있었다. 힘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조금 더 센 자신이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해도 이 친구는 뒤로 밀리지 않고 옆으로 돌면서 자신의 힘을 상쇄하고, 이용하고 있었다.
어느새 1분.
하시모토! 하시모토!
간바레! 하시모토! 간바레! 하시모토!
관중의 연호에 하시모토는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된 기술 한 번 걸지 못했다. 시작과 동시에 당한 일격 때문에 지금까지 그는 질질 끌려만 다니고 있었다.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하앗!”
간신히 제대로 잡고, 모션을 넣어 손밭다리를 찍었다.
그런데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서 2차로 힘을 넣으려는 순간, 몸이 뒤로 홱 뒤집히는 게 느껴졌다. 힘 차이. 상체 힘은 자신이 나으나, 하체는 아니었다. 애초에 자세도 지영이 더 유리했다.
쿵!
간신이 피해서 앞으로 엎드렸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심판을 올려다보는 하시모토.
다행히 더 점수는 없었다.
하시모토는 얼른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 끝에서 짝다리를 선 채 서 있는 강지영을 보곤 이를 악물었다.
피식.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냐?’
‘이게 끝이야?’
그걸 어떻게 아냐고?
알 수 있었다.
하시모토 소이치 본인이, 시합이 끝나면 상대를 볼 때 항상 하던 눈빛이었다.
우월감.
세계 랭킹 1위지만,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 입상이 없는 그가 자존심을 챙기는 방법이 바로 지금 강지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