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16화
216화. 가노컵(10)
지영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결승전이 시작되자 심장이 좀 더 격렬하게 날뛰려 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대회 통틀어 정말 기분이 좋지 않은 대회다.
우우!
아시아 선수권에 이어 이번에도 결승에 올라간 안승희의 등장에, 일본 관중들이 또 우우! 야유를 보냈다. 대기실에 있는데도 어찌나 크게 야유를 한 건지, 안까지 그 소리가 미세하게나마 들어올 정도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안승희의 굳은 표정은 그녀가 지금 정말 긴장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시아 선수권 때는 오히려 지영을 응원하는 팬이 많아서 한국팀이 버프를 같이 받았다. 그러나 오늘은 극우 단체라도 몰려온 건지, 한국팀만 나오면 선을 넘은 야유가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준결승전부터 그게 심해졌는데, 지금은 아예 경기장이 떠나가라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홈팀의 이점과 원정팀의 약점?
축구나 야구를 하다 보면 느낄 수 있는 이런 차이를 지금 어처구니없게 먼 나라 일본에서, 그것도 유도 경기에서 보이고 있었다.
사실, 원래는 어느 나라를 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하는 종목도 아니었다.
안승희 파이팅!
파이팅!
관중석 한 모퉁이에 앉아 계신 교민들의 응원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래도 안승희는 훌륭하게 승부를 이어갔다.
한일전도 아닌데 야유를 보내는 일본 관중의 비매너를 이겨내고, 영국 선수를 상대로 절반승을 거두며 이번에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다른 선배는 아깝게 지면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부 경기가 끝났다.
한국은 금 1, 은 1, 동 1.
금은동을 나란히 하나씩 따내며 정말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첫날 여자 경기를 끝냈다.
이 정도면 정말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감량은 남자팀이나 여자팀이나 똑같이 힘들었다. 그 미친 감량 스케줄을 이겨내고, 정상도 아닌 컨디션으로 낸 성과이니 더욱 빛난다 할 수 있었다.
적진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 거둔 성과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여자부가 끝나고, 남자팀 경기가 시작됐다.
당연히 시작은 60㎏부터였다.
패자전 두 경기가 동시에 시작됐다.
그리고 패자전엔 정수원이 참전했고, 다행히 절반승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이어진 결승전에선 이변 없이 나오히사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진 66. 일본 선수는 패자전에서 업어치기 되치기 한판으로 떨어졌다.
이어서 이성진이 결승전에 들어갔다.
결승전 상대는 아쉬빌리 바그라티. 그루지야의 에이스였다.
그루지야.
런던이었나?
2010년대에 들어 갑자기 뜨기 시작한 나라였다.
런던 올림픽에서 두각을 나타내더니, 지금은 거의 전 체급에 랭커들이 포진했다. 60도, 66도, 그리고 73도 이제는 일본이나 한국만큼 강한 나라가 그루지야였다. 그러니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특히 바그라티는 이제 스물 중반으로, 절정의 기량을 내보일 나이였다.
게다가 그는 세계대회를 뛰면서 이제는 경험도 쌓일 만큼 쌓였고, 경험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연륜이 되고 있었다. 그 연륜도 이제는 제법 쌓여가고 있었다.
대기하면서 그의 시합을 보면서 지영은 분명 그렇게 느꼈다.
충분히 쌓인 경험. 그 경험에 이제 실력, 그리고 아주 미세하지만, 연륜이 확실히 느껴졌다. 지영은 그 부분이 걱정됐다.
이성진에게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바그라티가 위였다.
이성진이 패기와 기술 쪽은 압도적으로 위라는 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걸 상쇄하는 국제무대 경험과 연륜도 절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황금세대는 세계대회가 고작 세 번째다.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세계 청소년 선수권, 아시아 선수권. 이렇게 세 번이 전부였다. 하지만 바그라티는 근 4년간, 거의 모든 세계대회를 다 참전했다. 적어도 지영과 황금세대보다 몇 배는 많았다.
‘잘해라.’
지영은 이성진의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드는 게 좀 과하겠지만 이성진은 황금세대의 선봉장이었다. 전국체전처럼 첫날에 전 체급이 전부 하는 대회가 아니고, 이렇게 나눠서 하는 대회면 이성진은 항상 제일 빨리 경기에 들어간다.
그래서 이성진은, 일종의 선봉장이었다.
가장 먼저 들어가서 분위기를 확 끌고 오는, 그런 역할을 저도 모르게 맡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진은 시작부터 화끈한 한판으로 분위기를 올렸다. 다른 선배들은 몰라도, 황금세대인 지영은 이성진의 경기력을 보면서 각오를 다지는 경우도 많았다.
성진이도 잘하니까, 나도 잘해야지.
이런 느낌이었다.
그러니 결승전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결승전이 더욱 중요했다. 가장 먼저 들어가는 이성진이 지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에서 이성진이 졌을 때, 그때 솔직히 좀 그랬었는데 다행히 그 대회는 신지가 나왔기 때문에 제대로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이성진은 이번 경기에서, 선봉장의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했다. 아니,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메!
경기가 시작됐다.
여유, 느긋.
아쉬빌리 바그라티의 자세와 표정을 보면 딱 보이는 게 바로 이 여유와 느긋함이었다. 그러나 이성진을 깔보는 건 아니었다. 자세도 제대로인 걸 보면 저 여유는 관록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신중한 잡기 싸움.
신장은 이성진의 압도적인 위였다. 66을 통틀어 이성진의 신장은 가장 큰 축에 속했다. 170만 넘어도 큰 키인데, 이성진은 거기서 무려 7㎝쯤이나 더 크다. 그런 만큼 근력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밀릴 수밖에 없지만, 반대로 잡기 싸움에서는 확실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툭!
투둑!
길쭉한 이성진의 팔이 바그라티의 도복을 계속해서 먼저 잡았다.
그리고 바그라티는 자세를 뒤틀어 심판을 등진 뒤 도복을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지영은 바그라티가 기본적으로 심판을 등지는 걸 선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시합 스타일은 그렇게 깔끔하진 못했다. 가슴 깃에 손을 올려두고, 은근히 막기까지 하는 걸 보면 잡기 자체가 그냥 지저분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로 심판에게 일일이 어필하는 건 더욱 말도 안 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방법을 찾긴 찾아야 했다. 이전에 도쿄 올림픽에서 아론 울프의 이런 비신사적인 잡기 싸움을 심판들은 딱 한 번만 지도를 줬다.
저 잡기를 문제 삼아 지도를 줬으면 아론은 벌써 지도 세 개를 꾹꾹 눌러 담았을 거다. 그것도 연장전까지 가지도 않고 말이다.
그걸 바그라티는 똑같이 하고 있었다.
이성진의 눈빛에 순간 짜증이 슥 스쳐 가는 걸 지영은 놓치지 않았다. 지영은 이성진의 흥분을 다독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맛테!
심판이 그쳐를 한 사이, 전기정 감독을 보자 역시 안목이 좋은 감독님은 감정을 다운시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에 이성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경기에 임했다. 다행이었다. 시합의 흐름을 확실히 꿰뚫고 있는 전기정 감독이 직접 사이드를 봐주고 있어서.
시도! 시도!
서로 나란히 지도를 받았다.
이게 문제였다.
바그라티는 분명 가슴 깃을 자신의 손으로 덮는 반칙을 했다. 그런데 반칙은 같이 받았다. 이러면 이성진이 억울해지는 상황이 된 거다. 그래서 실제로 이성진은 짜증이 나기도 했다.
지영은 그래도 이성진이 흔들…….
“어!”
쿠웅!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바그라티가 상체를 감아오면서 그대로 모두걸기를 쓸었다. 그리고 그걸 예상하지 못했던 이성진의 신형이 붕 떴고.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어떻게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그에 지영이 반사적으로 심판을 보자, 심판이 고민하는 게 보였다.
이러면 무조건 둘 중 하나였다.
한판인가 절반인가.
그걸 고민하거나.
절반인가.
아니면 점수가 아닌가.
이걸 고민하거나.
지영은 제발 후자이길 바랐다.
절반이나 한판 경계선이면, 일본에 찍혀도 제대로 찍힌 자신 때문에 그냥 한판을 줘버려 게임이 끝나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무조건 후자여야 했다. 바그라티에게 가려져서 어떻게 넘어갔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속이 답답하단 생각을 하는 찰나, 심판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아…….”
점수를 안 준다는 뜻은, 앞으로 떨어져도 너무 앞으로 떨어졌다는 거였다. 조금이라도 어깨 쪽이 닿았으면 절반을 줬겠지만, 아예 전방 낙법처럼 앞으로 떨어졌으니 점수를 주지 않은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진짜로, 정말로 다행이었다.
바그라티는 양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들어 올리며 판정에 불만을 표했다. 판정에 불만을 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칙을 써가면서 시합하는 주제에 저러니, 괜히 얄미워졌다.
맛테!
그쳐 사인이 다시 나오자, 전기정 감독이 얼른 코칭을 했다.
“성진아! 자세 낮추고! 괜찮으니까 지금처럼 잡기 싸움 해. 한 번! 한 번만 잡으면 된다!”
“네!”
한 번.
전기정 감독의 코칭대로 이성진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잡은 딱 한 번의 기회였다. 기술적인 부분이 어마어마한 이성진이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번만 제대로 잡으면 승패가 갈릴 것 같았다.
“이성진 파이팅!”
지영은 친구를 큰 목소리로 응원했다.
우우우!
지영의 응원을 들었는지, 관중석에서 대번에 야유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응원했다. 지영도 지영이지만 이성진도 한 성깔 하는 친구라 이런 야유는 오히려 그의 경기력에 도움을 될 터였다.
우우우!
조센징! 죽어라!
빠득!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저 조센징이라는 단어는 정말 너무 거슬렸다. 21세기에, 그것도 국제대회에서 이 정도 수준을 보여주는 일본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하지메!
재개된 시합.
이성진은 자세를 낮추고, 빠르게 접근했다.
유효기술을 한번 빼앗겼기 때문에 여기서 머뭇거리거나 조금만 밀려도 곧장 지도가 자신에게 들어올 거라는 걸 이성진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지금은 공세로 전환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바그라티는 경험이 역시 풍부했다.
지금 자신이 조금만 더 밀어 붙으면 이성진이 지도를 받게 될 거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공세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지영은 지금이 승부처라는 걸 깨달았다.
지도 하나 먹이겠다고 저렇게 공격적인 모습으로 나오는 지금.
‘받아서 업으면 딱 아닐까, 성진아?’
이런 타이밍, 이런 기회는 흔하게 오는 게 아니다.
지영은 부디 이성진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랐…….
“어!”
쿠웅!
바랐는데! 역시 이성진은 놓치지 않았다.
상대가 앞으로 중심이 쏠리며 뻗어온 손의 소매깃만 살짝 말아 쥐고, 그대로 파고드는 업어치기다. 예전에 아베 히후미를 시작과 동시에 시원하게 한 바퀴를 날려버렸던 업어치기와 매우 흡사한 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대로 쓸렸다.
마치 좀 전에 자기가 당한 모두걸기처럼, 그냥 몸 전체로 바그라티의 하체를 무릎 뒤쪽에서 제대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중심이 무너진 바그라티를 제대로 등 뒤로 감아서, 뒤로 꽂았다.
“설마, 진짜 설마…….”
이걸 절반을 주진 않겠지?
설마, 진짜 설마…….
잇폰!
심판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너무 제대로 떨어져서 결국 한판을 선언했다. 후우, 다행이다.
“아자!”
짧게 포효한 이성진이 지영을 보더니 씩 웃었다.
마치 나는 제대로 했다? 이렇게 말하는 눈빛이라 지영도 그냥 마주 웃었다. 지영이 엄지를 척 내밀자 이성진은 똑같이 엄지를 내밀고는 도복을 고쳐 입었다.
우우!
우우우!
조센징!
그놈에 조센징 소리는 진짜.
저들은 아마 모를 거다. 자신들이 하는 저 행동이, 자기가 나고 자란 나라의 이름을 얼마나 떨어트리는지.
‘하긴. 그걸 고민해 볼 지성이 있었다면 저기서 저러고 있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오히려 지금은 좋다.
73 패자전이 시작됐고, 끝난 뒤 경기장에 입장하면서 지영은 우레와 같은 야유를 다시 들었지만, 그들은 아마 모를 거다. 자신들이 보내는 야유가, 지금 지영에게는 오히려 버프를 걸어주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지영의 앞으로, 하시모토 소이치가 와서 섰다.
세계 랭킹 1위.
오노 쇼헤이와 함께 세계에서 73체급에서 유도를 제일 잘한다는 사나이 중, 한 사람과 드디어…… 마주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