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07화
207화. 가노컵(1)
훅! 훅!
떨어지는 눈은 머리에 뒤집어쓴 모자에 닿자마자 녹아서, 하얀 증기로 변했다. 사실 몸에 지방이 많이 낀 건 아니었다. 인바디 체크로 보면 한 2에서 3% 정도? 그 정도 올랐다. 하지만 고작 2, 3%가 지영은 너무 신경 쓰였다.
실제로 도복을 입고 몸을 풀어보니 그런 티가 확 났다.
전체적으로 무거워진 느낌이다. 미세하게 기술을 걸 때, 브레이크가 걸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심각한 건 아니고 미세하지만, 이런 미세함이 나중에 승패를 결정지을 거라는 걸 지영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휴가를 한 10일 갔다 왔을 때나 받는 느낌인데, 지금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났다. 그러니 빼야 했다. 이걸 빼지 않고는 이전의 폼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훅! 후욱!”
이는 황금세대 전체가 그랬다.
그래서 선수촌에 입촌하자마자, 황금세대 전체가 각자의 방식으로 지방을 빼기 위해 이 악물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영과 같이 뛰는 걸 선택한 건, 황석이었다. 지영은 감량이나 커팅엔 유산소를 즐겨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뛰는 걸 즐겼다.
리드미컬하게, 박자에 맞춰 뛰다 보면 정신 무장이 새롭게 되는 기분이 드는데, 지금 지영은 딱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연예인은 이제 당분간 끝난 거야.’
훅, 후욱.
나중에 대회 스케줄을 다시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이제 당분간 연예인으로서의 강지영은 안녕이었다. 적어도 내년 8월에 열리는 올림픽과 스케줄이 조정되어 내년 6월에 열리는 세계 선수권까지는 죽었다고 훈련만 해야 했다.
세계선수권은 티켓이 많이 걸린 대회다.
지영이나 황금세대는 전부 체급별 티켓을 확보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대회를 건너뛸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드시 나가야 하는 대회였다. 왜? 그랜드 슬램에 필요한 대회이기 때문이었다.
아시아 선수권, 세계 선수권, 아시안 게임. 올림픽.
이게 그랜드 슬램에 필요한 네 개의 대회고, 지금 지영은 아시아 선수권을 제외하면 아직 금메달을 확보한 대회가 없었다. 그러니 세계 선수권도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영은 그 대회를 나가다 보면 미야모토 신지와 만나게 될 거로 생각했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일본이 그 대회에 또 신지 대신, 오노 쇼헤이나 하시모토 소이치, 혹은 에비누마를 내보내는 건데, 이것도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었다. 만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분명 만나게 되겠지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때를 위해 지금 당장은 떨어진 폼을 올리는 게 급선무였다.
눈이 오지만 선수촌의 트랙은 역시 좋았다.
20분 정도를 뛰고 나자, 몸에서 열이 후끈 피어올랐다. 30분이 넘어가자 숨이 막히기 시작했고, 1시간 정도 뛰고 나자 오히려 호흡이 터져서 정신이 날카롭게 섰다. 하지만 지영은 더 무리하지 않았다.
선발전을 끝내고, 선수촌에 들어온 지 이제 3일째다.
폼을 억지로 끌어올리다가, 오히려 역으로 부상당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었다. 그래서 러닝을 끝내고, 체육관으로 들어가서 후끈한 열기를 배출하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끄응……. 아, 씨…….”
역시 많이 굳은 몸 때문에 절로 짜증이 담긴 욕지기가 나오자, 황석이 워워, 릴렉스하자며 지영을 달랬다.
“몸 많이 굳었지?”
“응? 틈틈이 촬영 중에 스트레칭도 하고 몸도 풀었는데, 역시 많이 굳었네.”
아니나 다를까 진짜 열심히 풀긴 했다.
촬영에 방해가 되는 선이 아니라면, 눈치가 좀 보일 정도로 현장에서 몸을 풀었던 지영이었다. 하지만 역시 현장에서 몸을 푸는 것과 직접 도복을 입고 매일 운동하는 것과의 차이는 극명했다.
몸에 체지방만 낀 게 아니라, 관절도 확실히 많이 굳었다.
이런 관절을 푸는 가장 효과적인 건 필라테스를 병행하는 스트레칭이지만, 당장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최대한 몸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땀이 식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다시 스트레칭에 매진하는 지영. 그런 지영에게 전기정 감독이 찾아왔다.
“컨디션 아직도 별로야?”
“네? 아니요. 안 좋은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전이랑 비교하면 몸이 좀 무겁긴 해서요.”
“그게 별로지, 인석아. 연예인 활동까지 하려니 확실히 힘들지?”
“하하, 네.”
“그래도 잘하고 있다. 덕분에 요즘 유도계 은퇴선수 찾는 방송도 많아지고, 선배들이 네 덕분에 활로를 여러 곳에서 찾고 있고 좋다. 아, 체육관도 요즘 엄청 인기란다. 하하.”
“잘됐네요.”
순기능이었다.
지영을 포함한 황금세대가 연희고 아이돌로 불리며 인기를 얻자, 덩달아 방송계에서 다른 은퇴선수들을 찾는 것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바로 체육관이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회원 수를 보유한 종목은 태권도다.
태권도는 이길 수 없는, 정말이지 넘사벽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합기도였다. 이 두 체육관은 지역의 헬스장보다도 훨씬 더 많았고, 많다는 건 많아도 관원이 그만큼 유지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럼 유도는? 헬스장보다 당연히 적었고, 관원 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요즘 연희고 아이돌의 인기에 힘입어, 유도체육관을 찾는 일반인이 정말 많이 늘었다. 특히 어릴 적에 다니는 체육관은 보통 아빠가 왕년에 좀 놀았던 곳 아니면, 엄마의 결정으로 정해지는데 요즘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엄마! 나 유도체육관 보내줘! 하는 경우가 많이 늘고 있는 추세였다.
이것만 해도 지영과 친구들은 유도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 셈이었다.
사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영이지만, 그걸 굳이 생색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는 지영이었다.
“컨디션 올라오는데, 며칠이나 걸릴 것 같아?”
“한 일주일? 일주일에서 이 주 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오래 걸리네. 야, 그 폼으로 용케 선발전 1등 했다?”
전기정 감독의 말에 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힘들었다.
이번 선발전 역시 결승전에서 이우진과 붙었는데, 지영의 폼이 떨어져 있는 만큼 이우진의 실력은 반대로 위로 올라와서 연장전까지 가 겨우 승리했다. 이것 때문에 역시 연예인 활동 때문에 기량이 하락했네, 안 했네 하는 말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솔직히 지영은 인정했다.
이번 대회는 정말 힘들었다. 체중을 빼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제대로 도복도 입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확실히 시합 때 경기력으로 나왔다. 인간의 몸은 참 정직하다. 특히 훈련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겨우겨우, 이우진을 연장 접전 끝에 절반 승으로 누르고, 지영은 1차 선발전 1위를 사수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황석만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아 이전 대회와 비슷한 경기력으로 1위를 사수했다.
나머지는?
지영의 드라마 나의 무사님과 거의 동시기에 활동한 프로젝트 아이돌 활동을 병행한 임효중도 이번에는 힘겨워했다. 영화 촬영으로 바빴던 강한결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2주에 한 번 더 런닝에만 나가는 이성진은 황석과 비슷한 경기력을 유지했다.
이는 누굴 탓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고, 그 결과는 스스로 부담해야 할 일이었고 지영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과 친구들의 선택을 존중해서, 시간적 여유를 주는 스태프와 코치진이 고마운 지영이었다.
그러니 이런 여유를 주고 기다려주는 만큼, 지영은 최대한 빨리 컨디션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게 좀 조급해 보였는지, 전기정 감독이 웃으며 지영을 달랬다.
“아직 대회 많이 남았다.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올려. 천천히. 괜히 급하게 오다가 넘어지면 진짜 손해가 얼만지 알지?”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석이도 천천히 하고.”
“네!”
단단한 황석의 대답까지 듣고 난 전기정 감독이 스태프와 함께 자리를 떠나자, 지영은 천천히 스트레칭을 이어갔다. 시간과 공을 들여 스트레칭을 끝내고, 지영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 식단은 정말이지, 밥맛이 뚝 떨어지는 식단이었다.
풀밭에, 하얀 고기.
하얀 고기가 어디 있냐고? 있다. 닭가슴살……. 진짜 고역이지만, 지영은 그래도 끈덕지게 식사를 끝마쳤다. 이렇게라도 먹지 않으면 훈련을 버틸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야간은 프리했다. 대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거의 보통 개인 훈련이 주를 이뤘다. 지영은 야간도 뛸 생각이었다.
다만 아주 천천히.
안 그래도 오후에 제법 많이 뛰어서 허벅지가 좀 올라온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가볍게 걸으면서 몸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좀 더 하드한 트레이닝을 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몸이 퍼질 가능성이 100%라 지금은 몸을 조정하는 게 먼저였다.
야간엔 다 같이 나왔다.
운동복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온 황금세대. 그리고 그런 황금세대에게 쭉 들어오는 시선들. 저 끝에, 또 익숙한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야! 지영아! 강지영!”
훠이! 훠이!
가뜩이나 키도 큰 사람이 점프까지 뛰며 저러고 있으니, 이건 안 보인다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눈을 반짝이는 여자 배구 대표팀 선수들과 한유진이 보였다.
“누나, 안녕하세요. 누나. 근데 누나는 여기서 살아요? 막 들어와도 돼요, 여기?”
“뭐래! 나 이번에 코칭 스태프로 정식 합류한 거거든!”
“오, 진짜요?”
“그래! 넌? 넌 언제 들어왔어?”
“전 며칠 안 됐어요. 저번 선발전 끝나고 들어왔으니까. 누나는요?”
“나도 며칠 안 됐어. 애들 아직 리그 중이고, 며칠 뒤에 평가전 때문에 모인 거거든.”
“아하. 누나는 야간?”
“응. 근데 지영아. 애들 사인 좀 해주면 안 되나? 너 사인 받고 싶다고 발 동동 구르는데 보는 내가 너무 안쓰럽더라…….”
아아!
언니이!
코치님!
그걸 왜 말해요오!
파닥파닥!
부끄러운지 몸을 파닥이는 여자 배구 대표팀.
지영은 휴대폰 케이스, 노트북, 티셔츠 등에 사인을 해주면서, 친구들도 불렀다. 얘들이 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갑작스럽게 사인회가 열렸지만, 추가로 오는 인원은 한유진이 카리스마로 막아줘서 8시 훈련 전에는 풀려날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사인회는, 요즘은 거의 일상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선수촌이라지만, 정말 훈련만 하는 곳은 맞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목적이 확실한 장소라는 걸 빼면, 생활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인을 다 해주고, 천천히 몸을 푼 지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8시 10분.
슬슬 운동을 시작할 시간이다.
천천히 뛰는 러닝. 오후에 많이 뛰어서인지 역시 허벅지가 좀 올라온 느낌이 확실히 났다. 이럴 때 무리하게 뛰면 제대로 부상으로 이어지니, 지영은 아예 뛰는 걸 멈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을 훈련에 적합한 몸으로 바꾸는 조정을 며칠에 걸쳐 끝내고,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진천 선수촌.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오직 운동만을 위해 조성한 운동단지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택배를 받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이곳에서 무슨 낙을 찾냐고 했다. 시합, 대회 스케줄을 따라가면서, 크리스마스고 명절이고 전부 무시하며 흘러가는 곳이 선수촌이란 공간이었다.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유도회에서 갑작스럽게 선수촌으로 토스 된 공문은, 한 대회의 참가서류였다.
가노컵.
유도 종주국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로, 그래도 전통과 역사가 있는 대회였다. 그런 가노컵을 일본은 크리스마스를 지나, 연말 바로 코앞인 12월 29일, 30일 일정으로 열겠다는 공문이 날아들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이었다.
“아니, 29, 30일 대회를 어떻게 나갑니까! 벌써 20일이에요! 고작 9일 만에 애들 폼을 어떻게 올립니까? 네? 그래도 참가는 해야 한다고? 허, 누가요? 이번에 올라온 회장님? 아니, 회장님은 대체 왜 그러신답니까!”
저 멀리서 공문을 보자마자 뚜껑이 열려 노발대발하는 전기정 감독을 보면서, 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수작이겠지?”
임효중의 질문에 지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한국의 상황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가노컵은 아시아 선수권이나, 세계 선수권처럼 메이저 대회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종주국에서 유일하게 여는, 그래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대회였다.
그래서 이 대회는 웬만해서는 불참하는 법이 없었고, 각 나라의 1선발 선수들이 전부 출전하는 메이저급 대회였다. 그런데 그런 가노컵을 고작 9일 전에 공문을 날린다고? 미친 짓이었다. 일본이 종주국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짓이었다.
‘그리고 지들은 준비 철저히 했겠지.’
이미 사전에 언질이 있었을 테니 그쪽 선수들은 시합 폼을 확실히 올려놨을 게 분명했다. 진짜 치졸하기 이를 데 없는 수작이지만, 지영은 오히려 그래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수작은 또…… 깨는 맛이 있지.’
철저하게 깨부숴서.
또다시 부도칸의 악몽을 재현시켜 주는 건?
지영은 어째 드라마는 끝났지만, 재의 성향이 전부 빠져나가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 흠칫했다.
뿌득!
이를 간 전기정 감독이 선수들을 모았다.
그러곤 긴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다, 9일밖에 안 남았는데 위에서 출전하란다.”
지영은,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 수작이, 이제 막 드라마를 끝낸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안자이 히카리가 전화해 주기 전까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