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97화
197화. 나의 무사님(11)
드라마는 고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드라마 스케줄은 강행군으로 진행된다. 이는 나의 무사님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10월 초 방영 예정이기 때문에, 먹고 잠시 눈 붙이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이 촬영을 위해 쓰인다. 그래서 당연히 지영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런 스케줄 자체가 전에 없이 강행군이긴 하지만, 지영은 불만을 품지 않았다.
애초에 여유롭게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본인의 시합 스케줄 때문에 그 기회를 날려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누구보다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도 따로 얘기해서, 수업을 대부분 빼기까지 했다. 이런 쪽으로 협조가 빡빡한 연희 재단인데 수업을 빼는 게 가능한 이유는 대학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었다.
내년 문을 여는 연희 대학교.
초중고만 운영하던 연희 재단에서 드디어 연희 대학교를 설립했고,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수시와 정시로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영은 그럼? 연희 대학교에 입학이 예정되었다. 수능과는 상관없이 체육특기생이었고, 과는 사범대 체육교육과였다.
연희 재단은 감사하게도 황금세대에게 과 선택에 자유를 줬다.
지영은 익숙한 체교과를 선택했지만, 강한결과 같은 경우는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다.
임효중과 이성진은 예술대 쪽을 선택했고, 황석은 지영과 똑같이 체교과를 선택했다. 이렇게 대학 문제가 해결되면서, 수업에 크게 목을 메달 필요가 사라졌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고, 연희고가 정한 본분이 해제되는 순간이 바로 수능이 끝난 후였다.
그렇기에 지영은 그 같은 문제 때문에 선수촌 입촌도 거절하는 연희고로부터, 드라마 촬영하는 동안 자유로이 휴가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론 최소 출석 일수는 이미 해결하기도 한 지영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마음 놓고, 촬영에 임했다.
첫날부터 야외였던 촬영. 그러나 지금은 정말 오랜만에 스튜디오 촬영이었다. 작정하고 지은 거대한 세트장이다.
이족의 부락을 고스란히 재현한 곳이고, 오늘은 연이 이족의 부족장들을 모아 놓고, 그들을 설득해 하나로 묶는 신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그러곤 다시 야외 촬영이 있었다.
늦은 저녁 해가 떨어질 때 산에서 떠돌다가, 늪지대에서 늑대 떼를 만난 심수정이 맡을 ‘선고’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다. 늑대 몇 마리를 해치웠지만, 뒤에서 더 나타난 늑대를 보며 절망하는 선고. 그런 선고를 돕는 재와 연. 선고는 목숨을 ‘빚’을 두 사람에게 지고, 두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두 사람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다 이족들을 만나고 다녀야 하는 재와 연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런 선고를 처음 만나는 신을 오늘 찍는다.
오늘도 종일, 촬영에만 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영은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바라보다가, 잠시 밖으로 나왔다. 사람 많은 곳에 계속 있었더니 답답해서였다.
나와서 벤치에 앉은 지영은 폰을 꺼냈다.
양유진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오늘도 파이팅! 하면서 곰돌이가 엉덩이로 춤을 추고 있었다. 이제는 이런 이모티콘도 곧장 보내서, 볼 때마다 절로 미소가 났다.
시간을 봤더니 12시가 조금 넘어서 지영은 전화를 걸었다.
-연예인님?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양유진 특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저예요. 점심 먹었어요?”
-네! 지금 휴게실에서 쉬고 있어요! 연예인님은요?
“저는 잠깐 쉬는 중.”
-아! 점심은 먹었어요?
아직 못 먹었다.
먹어도 되는데, 아직 밥차가 준비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먹으려고요.”
-꼭 챙겨 먹어요!
언제나 높은 텐션.
언제나 낮은 텐션인 지영은 양유진과 시너지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어디 아픈 곳은 없죠? 요즘 자주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힝…… 오늘도 바빠요?
오늘?
“좀 늦게 끝나기는 해요. 왜요?”
-……보고 싶어요.
귀엽게 투정 부리는 목소리인데, 그 목소리 안에 서운함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지영은 정신이 정말 번쩍 들었다. 그리움, 외로움. 연인관계가 헤어지는 첫 번째 단계라고 했다. 이런 감정들은 나나 상대를 결국 지치게 만들고, 머릿속에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정도쯤은 연애 초보인 지영도 아는 사실이었다.
매일같이 연락하긴 했다.
하지만 지영은 촬영으로 바빠도 너무 바빴다. 예인을 찍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분량이 가장 많은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사실 지금처럼 시간도 잘 나지 않았다. 잠시 쉴 때도 다음 신 준비로 정신이 없었고. 그렇다 보니 솔직히 이전보다 양유진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바보네, 나.’
지영은 일을 하면서, 내 사람을 잃는 건 참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 하루에 짧게 통화 한두 번도 못 할 때가 있었다. 메시지는? 뒤늦게나 보고 답장하는 정도였다.
자기 촬영이 끝나고 나면 새벽이니,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하기도 그랬다.
그렇게 벌써 몇 주째 이어졌다.
충분히 양유진이 서운할 만한 시간이었다.
“……내일은 뭐 해요?”
다행히 내일은 시간이 좀 난다.
너무 강행군으로 달리고 있어서, 내일 하루는 오전만 촬영하고 쉬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 토요일이다.
-내일요? 저는 지원이 훈련하는 거 보러 가요!
“음, 그럼 내일 볼까요? 관중석에 있을게요. 훈련 끝날 때까지.”
-정말요? 진짜요?
좋아하는 티가 확 났다.
만난다는 말에 이렇게 순수하게 좋아하는 여자다. 그럼 반대로 만나지 못하고, 조금만 소홀한 것처럼 느껴져도 크게 실망하는 여자라는 말도 됐다. 지영은 정신이 든 만큼, 이제는 실수하지 않기로 했다.
“네, 정말요.”
-꺄아!
소리칠 정도로 좋았나 보다.
그렇게 좋아하는 양유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지영은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환호하는 양유진과 좀 더 통화를 하고 끊자, 옆자리에 누군가가 와서 털썩 앉았다. 이연이었다.
“여자친구?”
이미 다 들은 것 같았고, 원래도 알고 있어서 지영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반인이라고 했지?”
“네. 음, 양지원 선수라고 아세요? 피겨 선수인데.”
“알지, 그럼. 내 CF 가져간 분인데.”
“아.”
그랬던 일이 있었다.
올 초, 양지원이 세계 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스포트라이트를 크게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CF 제안도 꽤 많이 들어왔다. 그중에서 두 개만 찍었는데 하나가 음료, 하나가 화장품이었다. 그리고 그 화장품이…… 이연이 하던 제품이었다.
“뭐, 괜찮아. 더 화제성 있거나 제품에 어울리는 사람이 찍는 게 CF니까. 그런데 양지원 선수는 왜?”
“그 선수 언니예요.”
“아 진짜?”
“네.”
이연은 이런 걸 말한다고 어디 가서 얘기하고 다닐 사람이 절대 아니라서, 말하는 것도 편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연도 남자친구가 있고, 넌지시 얘기해 주기도 했다. 이연의 남자친구는 해외에서 활약 중인 스포츠 스타였다.
저번에 회식 겸 한번 술 마시면서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남자친구가 속을 썩인다고. 자신은 다 좋은데 남자 보는 눈만 없다고. 뭐, 그래서 이런 말을 해도 부담되지 않았다.
“난 양지원 선수 물어봐서 그 선수랑 만나는 줄 알았는데, 언니? 언니는…… 아, 지원 선수 외모 생각하면 그분도 한 외모 하시겠네. 유전자 어디 안 가니.”
비슷하지만, 다른 인상이다.
하지만 외모로만 따지자면 양지원은 차가운 냉미녀고, 양유진은 곰돌이 느낌이다. 그렇다고 예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에게 예쁜 사람이었다.
“누나.”
“응?”
“음…… 아니에요. 우리 순서는 언제래요?”
“뭐야, 싱겁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물어보긴 좀 그랬다.
그래서 지영은 말을 대충 얼버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스튜디오 촬영을 마치고, 지영은 야외로 이동했다. 그리고 시작되는 신.
심수정이 표독한 표정으로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동그란 동물 모양의 표적을 노려봤다.
화살은 진짜였다.
제대로 박히면 몸에 구멍이 훅 뚫릴.
초보자는 절대 다루면 안 되지만 심수정은 양궁 선수였고, 현대양궁에서 쓰는 보우와는 다른 나무 활이지만 대충 만든 것처럼 보여도 전문가가 밸런스까지 생각해 만든 진품이었다. 즉, 심수정 같은 경력자의 손에 들리면 아주 훌륭한 살상무기였다.
퉁!
퍼억!
표적에 화살이 꽂혀 들어가자 심수정이 옆으로 곧장 몸을 굴렸다. 정해놓은 액션이었다. 실제 방영분엔 그녀가 서 있던 자리로 흉측한 이를 드러낸 늑대가 슉! 지나갈 것이다. 일어난 심수정이 다시 화살을 꺼내 활에 먹였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안전을 고려해 전원 심수정의 뒤에 있었고, 그녀의 액션을 담는 건 무인 카메라였다. 세팅된 설정을 통해 심수정을 담았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바스트, 풀샷 등등, 각도와 거리에 따라 느낌 또한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수정은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선고’의 액션을 선보였다.
멋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실제 선출이라 그런지 시위를 당겨 입술이 살짝 비틀리는 그 모습을 본 몇몇 남자 스태프나 배우들이 와…… 하고 탄성을 흘렸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외모는 이족의 분장을 했어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선고가 먼저 1시간 가까이 같은 액션을 선보여 신을 끝냈고, 지영과 연이 투입됐다.
복장을 갖추고, 감정을 다잡으면 사라지는 지영. 그리고 등장하는 재. 이제는 이런 변화조차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건 이연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잡는 데 이골이 난 이연은 지영보다도 먼저 연이 되어 있었다.
레디, 액션!
재와 연은 수풀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컹! 커엉!
으르르……!
“이익!”
자신의 앞으로 자세를 한껏 낮추고 몰려오는 늑대 떼를 보며, 낯선 복장을 한 여인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스쳐 갔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형형했다. 늑대에게 물려 피가 철철 나는 발로 땅을 밀어 뒤로 물러나며, 기어이 화살을 꺼내 시위에 먹였다.
그러곤 가장 가까이 있는 늑대를 겨눴다.
늑대는 영리하다.
여인이 겨누자마자 저 화살에 맞아 죽은 동료가 생각났는지, 얼른 뒤로 물러나 피했다. 하지만 물러났을 뿐,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좌, 우로 천천히 돌면서 사냥감을 향해 입맛을 다셨다.
크르르…….
그런 늑대가 무려 일곱 마리.
적지 않은 수였다.
하지만 적지 않다뿐이지, 엄청 많은 숫자는 결코 아니었다. 저 여인도 언덕에서 다리를 물려 그렇지, 그렇지 않았으면 충분히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숫자였다.
그런 여인을 지켜보던 재는, 판단이 섰다.
스윽.
재가 움직이자 연이 잠시 그를 만류했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땅에 글자를 휘갈겼다.
[교전, 직후.]
전투가 시작되면 움직이라는 뜻.
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재는 기다렸다. 늑대는 어차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저 여인의 체력과 정신력이 다할 때까지 분명 기다릴 거였다. 그리고 움직이는 그 순간, 재도 곧장 움직일 예정이었다.
서산을 향해 가던 해가, 서산 끝에 걸렸고, 결국에는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쯤이 되자 기온이 내려갔고, 피를 흘린 여인의 체력과 정신력도 결국에는 한계에 도달했다.
끔뻑.
정신이 살짝 아득해져 눈을 잠시 감았던 순간, 그 순간 컹! 소리와 함께 늑대가 달려들었다. 동시에 번쩍 정신을 차린 여인이 시위에 먹였던 화살을 놨고, 다시 동시에 재가 뛰쳐나갔다.
커헝!
재는 언덕을 날 듯이 뛰어 내려갔다.
그러곤 곧장 가장 후미에 있던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늑대는 뒤로 물러나지 않고 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금원대마저 깨부수고 이곳까지 온 재였다.
그 과정에서 체력은 떨어졌어도, 지닌 무력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재는 달려든 늑대의 목을 가볍게 치고, 몸을 휘릭! 소리가 나게 회전시키며 품에서 비수를 꺼내 내던졌다.
푹!
좌측에서 여인에게 덤벼들던 늑대의 목에 정확히 명중했고, 그 순간 우측에서 덤벼든 늑대는 여인이 다시 급하게 먹인 화살로 미간을 뚫었다.
일련의 과정이 마치 잔상처럼 흘러갔고, 그게 끝나는 순간 어느새 재는 여인의 앞에 섰다.
늑대가 다시 덤벼들었다.
총 세 마리.
벌써 네 마리나 잡았다.
일곱 마리였던 네 마리 중 두 마리를 재가, 남은 두 마리를 여인이 화살로 잡았으니 남은 건 세 마리고. 재에게 달려들었던 두 마리도 선혈을 뿌리며 쓰러졌다.
후.
짧게 호흡을 다듬은 재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넣었고, 그 뒤에 재가 돌아서자 여인 ‘선고’는 픽, 바닥에 쓰러졌다.
컷!
그리고 그녀가 쓰러짐과 동시에 감독의 사인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