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93화
193화. 나의 무사님(7)
대본 리딩.
배우들의 연기를 점검하는 날이다.
이 배우가 캐릭터 분석을 제대로 했는지, 촬영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관리는 됐는지 등등을 알아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리딩은 캐스팅의 최종관문으로도 불렸다.
리딩을 제대로 준비해 가서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지 못하면 여기서 튕겨 나가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요즘엔 리딩 자체를 드라마 마케팅의 한 장르로 사용하기 때문에, 엉성한 모습은 절대 보여줘선 안 됐다.
지영은 일찍 도착했다.
보통 드라마 주연은 거의 마지막에 들어오지만, 지영은 그런 건 별로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합장에도 일찍 도착해 몸을 제대로 풀고, 시합을 준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일찌감치 리딩장에 도착해 위로 올라갔다.
이번 작품도 tvM이지만, 오늘은 본사가 아니라 한 호텔의 컨벤션홀을 빌려 리딩을 진행하기로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분주히 준비 중인 스태프들이 보였다.
“어, 벌써 왔어요?”
이미 두어 번 만나서 안면을 익혔던 이상익 감독이 가장 앞에 서서 진두지휘하고 있어서 내리자마자 바로 마주쳤다. 지영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늘은 훈련도 없어서 일찍 왔어요.”
“이야, 보통 주연은 이렇게 일찍 안 오는데. 다른 배우들 민망하겠네요.”
“하하, 설마요. 그럼 어디 대기실에서 좀 기다릴까요?”
“오, 그것도 좋겠네요. 성준아! 일찍 온 우리 주연 배우님 1번 대기실로 안내해 드려라!”
네!
박성준.
이틀 전인가, 점검 차 이상익, 정은정 작가와 밥을 먹을 때 안면을 익힌 조연출이었다. 이상익 감독이 아주 오랫동안 데리고 다닌 제자 같은 사람으로, 이번 작품 뒤에는 정은정 작가와 연출을 함께 하기로 결정이 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한테 잘 부탁한다며, 사람 좋게 미소와 함께 통성명을 나눴다.
지영이 봤을 때, 괜찮은 사람 같아서 저도 잘 부탁해요, 하고 마주 인사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하하, 응, 반갑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오늘 훈련이 없어서요. 일찍 와서 목도 좀 풀고 하려고 했죠.”
“크, 역시. 다르긴 다르다. 기자에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라도 주인공은 늦게 오는 게 관습화됐는데. 너는 그런 게 하나도 없구나?”
“에이, 그런 걸 해서 뭐 해요?”
일종의 기 싸움이기도 하고, 조연이 주연보다 늦게 오면 건방지다, 주연이 조연보다 일찍 오면 없어 보인다. 뭐 이런 느낌 때문인 것 같았다.
일명, 주인공은 가장 늦게 등장한다! 의 법칙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영은 그런 관습 자체가 머릿속에 없었다.
임은진도 굳이 그런 걸 문제 삼지 않은 걸 보니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하는 지영이었다.
4평 남짓의 작은 대기실.
지영은 소파에 앉아 바로 가방에서 대본을 꺼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대본이었다.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대본은 이미 10화까지 나온 상태였다. 이 작품은 기획되고도 한참이나 딜레이가 됐다. 주인공인 지영이 선발전과 아시아 선수권으로 제작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영이 그때 오케이 했어도 시간이 걸렸을 거고, 지영이 시합을 준비하는 중에도 준비는 착실히 되긴 했지만, 그래도 여유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런 시간적 여유로, 대본은 이미 10화까지 나왔다.
지영은 하루에 한 번은 그걸 전부 읽었다. 머릿속에 아예 전체 장면을 새겨넣기 위해서였다. 자신은 연기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연기를 하려면 이렇게 하는 게 필수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특히 1, 2화를 집중적으로 봤다.
가장 먼저 촬영에 들어갈 화고, 그리고 대본 리딩도 당연히 1, 2화에 중점을 두고 진행될 거라는 얘기를 들어서였다. 그래서 대본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새로운 대본을 가져다줄까? 하는 임은진의 말에도 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보면, 자신이 노력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이 좀 붙었다.
그래서 지영은 굳이 대본을 바꾸지 않고, 헌 대본을 고집했다.
그런 대본을 다시 펴보는 지영.
이미 익숙하다 못해서 너무 눈에 잘 들어오는 내용이다. 머릿속에 전부 있는 내용이다 보니 눈에 담기는 순간 드라마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재생됐다.
도입부.
불타는 제국이다.
제국에 반란이 일었다.
상장군 강소와 근위대장군 이염의 반란으로 시작된다. 그 반란의 시작은 제국의 황제 시해부터다. 황제가 시해되는 순간, 같이 잡혀 온 왕자들이 줄줄이 죽는다. 제국의 충실한 신하인 백선이 제국의 유일한 황제 계승 혈통인, 연을 호위무사 재와 함께 탈출시켰다.
이들이 탈출하자, 상장군과 근위대장군을 꿰어 역모를 일으킨 승상 후는 직접 군을 이끌고 둘을 추격했다.
지독한 추격전.
연과 재는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재의 친우이자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길을 열었고, 추격로를 봉쇄했다. 일당백의 무력. 그러나 그 숫자 앞에서는 결국 지는 낙엽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재의 동료가 연 길로, 연과 재는 제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로운 땅.
새로운 대기에서 지쳐 풀썩 쓰러지는 두 사람.
그런 둘의 뒤로, 동이 텄다.
이게 1화 전체의 내용이다.
보통 시작은 좀 잔잔한 편인데, 나의 무사님은 부드러운 제목과는 달리 시작부터 매우 강렬했다.
그리고 강렬한 만큼, 배우들에게 부담이 많이 되는 1화였다.
이상익 감독이 괜히 지영에게 액션은 좀 하냐고 질문을 한 것도, 지영이 빠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액션 스쿨에 나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2화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국을 벗어난 둘은 여러 부락을 돌면서 전투와 설득을 계속했다.
제국의 야욕이 있을 거고, 하나로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재는 그럴 때마다 연을 지켜야 했다.
1화가 몰락과 탈출이면, 2화는 기회와 시작이었다.
연은 강한 인간이었고, 빼앗긴 제국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은 게 2화였다. 그런 연의 옆을 묵묵히 지키는 게 재의 역할이고 말이다.
이런 1, 2화를 지영은 질리도록 봤다.
그리고 하루에 몇 번씩 머릿속에 그렸다.
상상하고 또 상상하는 것.
‘남들보다 연기를 배운 것도 한참 늦었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야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미지 트레이닝을 남들보다 훨씬 더 구체화하는 게 가능한 재능을 가지고 있단 점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화된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지영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만 잘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어차피 정통파 연기는 자신에겐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저, 감각이 이끄는 대로 연기를 할 생각이었다.
“지영아.”
“네, 누나.”
임은진의 부름에 상념에서 깬 지영은 그녀의 손짓에 바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메이크업. 사실 지영은 별로 하고 싶진 않은데, 웬만한 건 지영에게 맞춰주고, 이해해 주는 임은진이 절대 양보하지 않는 게 의상과 메이크업이란 걸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군말 없이 조용히, 거울 앞 의자에 가서 앉았다.
물론 메이크업은 그녀가 직접 하진 않았다. 연희고 아이돌이 본격적인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장세리 선배님은 메이크업 담당 아티스트를 채용했고, 지영이나 친구들의 스케줄을 전담으로 맡아줬다.
오늘은 당연히 지영이 리딩 스케줄이 있어 호텔까지 함께 왔다.
“지영아. 너 저번에 보내준 거 쓰고 있어?”
“네, 매일 쓰는데요?”
“그래? 근데 피부가 왜 이렇게 안 좋지?”
“감량 때문에 그럴 거예요.”
“어? 그거 아직도 해?”
메이크업 담당, 이지윤의 물음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죠. 1, 2화부터 복근 노출신이 제법 있던데.”
“그래도. 시합 끝나면 좀 먹지 않아? 내 동생 격투기 선수인데, 시합 끝나면 엄청 먹던데?”
“보통은 먹죠. 그런데 저는 감량이 끝난 직후라, 뭘 먹으면 장난 아니게 부어요. 그래서 아직 유지 중이고요.”
“아…… 힘들겠네, 진짜.”
힘들다.
솔직히 먹고 싶은 걸 참는 게, 진짜 힘들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시합이 끝나서 웬만한 건 다 먹고 있었다. 다만 양만 여전히 줄인 상태였다. 현 상태 유지가 목표라서 지영은 매일 자기 전에 체중계에 올라가 체중을 체크하고, 75 이상 넘어가지 않게 신경 쓰고 있었다.
이지윤은 더는 말을 걸지 않고 메이크업 수정을 곧장 끝냈다.
그리고 잠시 뒤, 지영은 리딩장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고작 30분 정도가 지나 있을 뿐이었는데 벌써 배우들로 자리가 거의 다 차 있었다. 이연과 중견, 원로 배우 몇 분을 빼고는 전원 참석한 상태였다.
지영은 익숙한 몇 분과 인사하고, 처음 보는 분들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자리에 가서 앉았다.
정면에는 후 역을 맡은 강서훈과 이족의 부족장 딸 역할로 연과 재를 도와줄 심수정이 있었다. 심수정은 지영이 자리에 앉자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음, 딱 알맞은 표현으로는 연예인을 바라보는 연예인?
그런 느낌이었다.
일주일간 캐스팅된 배우들의 정보는 이미 임은진을 통해 전달받아 전부 외웠다.
심수정.
지영처럼 아직 필모가 거의 없는 상태의 신인이지만, 이전 두 작품에서 탄탄한 연기력을 선보여 작가의 눈에까지 들어 출연이 늘어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연기력보다 더 눈에 들어왔던 건 그녀의 이력이었다.
‘양궁 선수 출신이랬지?’
외모로 한 번 유명세를 탔고, 그리고 배우로 전향한 케이스였다.
아쉽게도 실력은 빛나는 외모에 비해 떨어졌고, 그래서 배우 전향할 때 큰 고민 없이 넘어왔단 인터뷰 내용까지 지영은 알고 있었다.
‘최고의 캐스팅 중 하나…….’
그런 심수정의 캐스팅은, 이족 부족장 딸이면서 활을 기가 막히게 다루는 ‘선고’ 역할에 딱 맞았다. 선출이다. 아무리 실력이 부족해 배우로 전향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 이상은 충분히 할 줄 아는 실력자일 게 분명했다.
국대 급은 안 되지만, 지방 대표급은 되는 선수.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한국에서 대표로 선발되는 게 더 힘들다는 양궁을 생각하면 과녁 원에다가 10발을 싸서 대부분 8점 안에 꽂아 넣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캐스팅 면으로는 정말 최고 중 한 명이었다.
그 옆의 강서훈은, 차갑고 냉혹한 귀공자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 전문 배우였다.
서늘한 마스크도 마스크인데, 목소리 톤과 연기 스탯 자체가 그쪽으로 몰빵된 배우라고 들었다.
나이는 이제 서른 초반인데 연기 변신 없이 한길만 파는 장인 정신 연기파 배우였다.
그런 강서훈은 역시 분위기가 남달랐다.
귀공자 스타일이다. 복장은 편한 캐주얼 차림인데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이연과 원로 배우 두 분, 그리고 차 사고가 나서 늦게 도착한 같은 소속사 중견 배우 두 분이 도착하면서, 리딩이 시작됐다.
짧은 자기소개와 함께 시작된 리딩의 첫 번째 대사를 읽을 사람은 지영이었다.
모두가 지영을 바라봤다.
기대와 걱정, 그리고 의심이 섞인 눈초리들이었다.
예인에서 서건 역을 맡아서 준수한 실력을 보여줬지만, 애초에 서건 역은 대사가 얼마 없었다.
하지만 재 역은 대사가 많았다.
애초에 극 중 연이 속내를 터놓고 대소사를 의논하는 유일한 인물이 재다.
재는 전형적인 문무겸비 캐릭터이고, 때로는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상황을 뚫어보고, 때로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을 섬멸하는 캐릭터였다.
그런 캐릭터인 만큼 액션도 많고, 대사도 많았다.
그래서 다들 기대와 의심이 섞인 눈초리로 지영을 바라봤다. 지영은 그런 시선을 익숙하게 받으면서, 리딩의 문을 열었다.
“공주님, 피하셔야 합니다.”
차분한 척하지만, 그 안엔 숨길 수 없는 당황과 다급함이 담겨 있는 그런 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