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92화
192화. 나의 무사님(6)
어디로, 어디로 피하란 말이냐.
“이 불타는 궁전에서…….”
도입부의 연은, 불타는 궁전을 보며 넋을 놓은 채였다.
갑작스러운 반란으로 시녀와 호위무장을 모두 잃고, 항상 그녀가 숨어서 사색을 지내던 비밀의 공간에서 시작되는 대화다. 이 공간은 그녀의 스승인 백선 선생과 호위대장인 재만이 알고 있었다.
“백선 선생이 공주님을 모시고 제국을 벗어나라 하셨습니다.”
“이 불길을 뚫고, 저 수천 역도를 뚫고 말이냐?”
“네, 공주마마.”
“누가? 그대 혼자? 재. 너의 무력은 잘 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야.”
“백적파가 곧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같이 피하면 될 겁니다.”
“그대는, 그대의 친우들을 지옥으로 불렀구나.”
“…….”
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극 중 백적파라 불리는 집단은 단어 하나씩 뜯으면 이해가 되는 재의 동료이자, 친우들을 일컬음이다.
백 개의 적[百敵]도 파(破)하는 집단.
재와 어린 시절부터 무예를 갈고 닦은 제국의 최정예 무사 집단이다.
연은 안도하면서도, 갈팡질팡하는 눈빛을 내보였다. 역도는 수천이고, 백적파는 고작 서른 남짓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아무리 강하다지만, 수천을 뚫기엔 무리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호위무사인 재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지옥은 아닐 겁니다. 그 친구들과 저, 그리고 공주님에게 지옥은 이곳이 아닐 테니까요.”
“자신만만하구나.”
“그래야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테니.”
“후후, 그래. 꼼짝없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굶어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좋다. 그렇게 하자. 부디, 나를 이곳에서 구해다오.”
강렬하게 빛나는 연의 눈빛.
재는 그 눈빛에서 그녀가 포기하지 않았음을 읽었다. 애초에 약한 소리를 했었던 것도 본래 속내가 아닌 모양이었고.
재는 그런 강한 공주를 보며 차분한 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안심할 수 있는 자신만만함이 느껴지는 웃음이기도 했다.
“비적이 울릴 겁니다. 그때…….”
삐이이익!
“가시지요.”
끝.
대사는 여기까지였다.
연의 첫 등장이고, 재는 이 앞에 역도를 제압하는 장면과 그에 앞서 백선 선생을 만나는 장면이 있으니 첫 등장은 아니었고.
후.
지영은 대사를 마치고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감정을 컨트롤하는 건 여전히 힘들었다. 이번 대사에는 따로 폭발적인 감정 분출은 없지만, 재라는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인지 시청자들이 딱 알 수 있게 감정을 세밀하게 컨트롤 해 대사를 치는 게 핵심이었다.
당연히 이는 스킬의 영역이었고, 지영은 언제나 이런 연습도 꾸준히, 빼놓지 않고 했다.
발성과 감정 컨트롤.
사실상 이 두 가지가 연기를 함에 있어 지영이 하는 연습 전부였다.
그리고 이 연습은 지영이 가장 잘하는 연습이기도 해서, 리딩인데도 빛을 발했다.
짝짝짝!
첫 대사를 치는 부담을 안고도 이제 두 번째 작품이고, 주연은 처음인 신인배우가 아주 안정적으로 대사를 치니, 유심히 지켜보던 배우들이 만족한 미소로 박수를 보냈다. 그에 지영은 배우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박수를 받았다.
“우리 지영 배우님은 첫 주연인데도, 떨지도 않네요?”
“감사합니다.”
씩 웃으며 이상익이 한 말에 지영은 그냥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기를 살려주기 위함일 테니, 지영은 이런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했다.
“자, 그럼 다음은 강서훈 배우님.”
이상익이 다음 타자를 지명하며, 리딩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된 리딩은 한 시간이 지나고 막을 내렸고, 대다수가 후련한 얼굴로 리딩장을 벗어났다. 하지만 아주 소수의 몇몇은 울상을 지으며 퇴장했다. 정은정이, 이상익이 원하는 수준의 연기력을 선보이지 못했던 배우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좀 어렸다. 스물 초반에서, 십 대 후반. 아직 연기력이 여물지 못한 배우들.
“쟤 봐라. 너 노려본다. 푸핫!”
오늘 연, 그 자체였던 이연이 한 남자배우가 나가면서 지영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걸 보고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지영은 그 배우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했다. 장현. 멋들어진 예명이지만 연기력은 그 멋을 따라가지 못했다.
국어책 읽기보다 조금 나은 정도.
긴장해서 그렇다며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해서, 시간을 좀 주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쟤 연기 왜 저렇게 못하는지 알아?”
“네? 왜요?”
“꽂혀서 그래. 꽂혀서. 위에서 아래로 빡!”
“아아, 낙하산?”
“응. 아마 투자자 연줄 타고 내려온 애일걸? 제작사도 투자자 쪽은 거절하기 힘들거든. 그래서 아직도 저런 청탁 가끔 받고 그래.”
“이상익 감독님은 그런 거 받는 성격이었어요?”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연은 지영의 질문에 고개를 바로 저었다.
“에이, 아니지. 일부로 그런 거야. 일부로. 일단 바로 거절하지 못하니까 받아준 다음, 리딩 때 쪽 주는 거지. 주제를 알라! 이런 식으로.”
“아아…, 근데 연기를 잘하면…… 아, 그건 상관없겠네요. 연기를 잘하면 그냥 캐스팅하면 되니까.”
“빙고! 연기 잘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지! 투자도 받고! 좋은 배우도 얻고!”
역시, 이 바닥은 거절도 참 힘들게 한다.
투자자의 입김이 강하니, 거절하긴 뭐해서 일단 테스트 보고 받아준 다음, 리딩 때 실력을 온 천하에 보이게 만들어 공개적으로 처형한다. 이렇게 되면 불만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리고 거절하고도, 명분도 확실한 셈이고.
이상익 감독.
역시 생각보다 능구렁이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단하단 생각도 들었다. 이런 바닥에서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우리도 슬슬 가자. 회식 갈 거지?”
“가야죠.”
안 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유도 대회는 흥분감, 고양감이 있긴 해도 크게 긴장하진 않는데, 연기는 역시 달랐다. 자신이 잘하는 주 종목이 아니다 보니 확실히 긴장됐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까진 아니어도, 좀 답답한 느낌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리딩이 끝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새벽에 제대로 몸을 풀어서 오늘 하루는 제대로 먹어도 되니, 회식은 꼭 가서 양껏 먹을 생각이었다.
이연과 함께 일어나 회식 장소로 이동한 지영은 많이 먹는다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줬다.
* * *
검.
혹은.
도.
지영은 태어나서 처음 잡아본 이 무기가 참 낯설었다. 모조품이지만 예리한 빛을 반사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감도 그랬다. 하지만 시대극, 혹은 사극에서 검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소품이고, 액션이었다.
호위무사 재는 당연히 칼을 쓰는 무사였다.
화살도 쓰고, 비수도 던지지만, 기본적으로 재가 쓰는 무기는 칼이었다. 그것도 긴 장도였다.
날렵한 외형이지만, 생각보다 길어서 다루기가 좀 어려웠다.
“여기서 이렇게, 막고, 비틀어서 검면을 타고 쭉 들어간다고 생각해 봐.”
“네.”
액션 스쿨의 관장 왕주형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세를 잡았다. 합을 맞출 액션 배우가 검을 내려쳤다. 지영은 그걸 칼을 들어서 막은 다음, 그대로 손목을 틀어 검날을 타고 쭉 앞으로 들어갔다.
카가가각!
모조 검이지만 그래도 쇠는 쇠다.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어서 지영은 어느 순간 제동을 걸곤 멈췄다.
“아니지!”
그러자 대번에 호통이 날아들었다.
지영이 물러나자 왕주형 스쿨 관장이 다가와 엄한 목소리로 지영을 다그쳤다.
“내가 몇 번 말해? 지영이 네가 그렇게 쫓아 들어가도 쟤 검도 주특기였던 애라 뒤로 알아서 빠진다니까?”
“……죄송합니다.”
미리 사전에 들었던 사항이긴 했다.
상대 배우 김진우는 용인대 검도부 출신으로, 액션 스쿨에 들어왔다고. 그러니 아무리 날뛰어도 검으로 쟤는 못 다치게 한다고. 분명 그렇게 듣긴 했다. 하지만 지영은 그게 쉽지가 않았다.
유도랑 검도.
앞에 한 글자만 다른 투기 종목이다.
하지만 안에 내용물은 천지 차이였다.
유도는 부드러움을 다루고, 검도는 검을 다룬다.
유도는 부드러움의 도를 닦고, 검도는 검의 도를 닦는다.
뭐 따지고 본다면 이 정도 차이긴 하지만 유도와 검도는 너무 다른 무술이었다.
유도는 복싱이나 태권도처럼 신체만을 이용해서 하지만, 검도는 말 그대로 검을 든다. 이 자체만으로 둘은 완전히 다른 운동으로 변했다.
검을 들었을 때, 지영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절대 이걸 들었을 땐 무리하진 말아야겠단 점이었다. 생각보다 무거워서, 잘못 맞으면 무조건 큰 부상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마치 트라우마처럼 가슴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도복을 입었으면 지영이 절대 이러진 않았을 테지만, 이건 아예 생전 처음 다뤄보는 거라서 지영은 절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 다시 한번. 마음 준비하고 한 번에 가보자. 알지? 지영이 네가 목까지 가야 신이 살아. 그리고 뒤에 또 따로 찍을 거야. 피가 촤악! 튀는 장면처럼. 그러니까 머뭇거리지 말고 들어가. 진우 믿고. 알았지?”
“……네.”
왕주형이 그렇게 말하고 뒤로 빠지자, 검을 든 상대 배우 김진우가 잔잔히 웃었다.
김진우.
이곳 스쿨에 와서 알게 된 사람인데 이 사람은 그냥, 그 자체로 흉기였다. 검도 특기생이었지만 태권도만 해도 4단, 유도도 4단, 합기도에 무에타이, 특공무술까지 배웠다고 했다. 손에 뭐가 들리든, 아무것도 없든 사람 상하게 하는 쪽으로는 완벽하게 갖춰진 사람이었다. 그렇게 많은 무술을 배워서 그런가? 사람이 호수처럼 평온했다.
“걱정하지 말고, 한 번에 들어와. 다칠 것 같으면 알아서 내가 검을 쳐내거나 피하거나 할 테니까.”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김진우가 자세를 잡았다.
자세부터 역시 엉성한 지영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런 그를 보며 지영은 마음을 다잡았다.
‘검의 고수야. 어차피 내가 뭔 짓을 해도 못 이겨.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한 번에 해보자.’
후우.
홰액.
지영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세를 잡는 순간, 김진우가 검을 내려쳤다.
까앙!
지영은 그 검을 막고, 연습했던 대로 손목을 틀어 검면을 타고 전진했다. 멈칫! 서자!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지영은 애써 그 마음을 무시하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그그극! 소리가 나면서 1초 만에 김진우의 코앞까지 도달하는 지영.
‘지금!’
그리고 어깨를 틀면서, 그대로 육체에 제동을 걸었다. 지영의 몸이 멈추려는 직전, 검도 전진을 멈췄다. 김진우가 검을 내려 세워, 옆으로 살짝 밀었기 때문이었다.
“오케이! 그래, 할 수 있네!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쫄아? 어? 잘했다. 잘했으니까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 더해보자!”
왕주형 관장의 말에 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하긴 했는데, 역시 아직도 떨렸다. 내가 다칠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내가 남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조만간 정신과를 한 번 가긴 가야겠네…….’
빌어먹을 트라우마.
지영은 여전히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에 자신이 꽁꽁 붙잡혀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이상익을 처음 만난 날 액션 연기를 그냥 연기보다 더 자신 있다고 했던 과거 자기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하자, 연습만 잘하면 돼.’
그리고 연습밖에 없고.
부족한 기술을 메울 수 있는 건 오직, 연습밖에 없다는 간단하지만 완벽한 진리를 다행히 지영은 잘 알고 있었다. 오전 내내 지영은 검 막고, 검면을 타는 하나의 동작을 수십 번을 연습했다.
나중에 김진우가 이 정도면 됐다. 할 때까지 지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스쿨의 배우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강지영이란 유도 선수가 천재라 불리는지, 독한 연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그렇게 여름이 다 지나갈 때까지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과 저녁엔 선선한 바람이 부는 9월의 첫날. 나의 무사님 첫 촬영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