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90화
190화. 나의 무사님(4)
“선영 선배님.”
한창 기사를 쓰는 중이던 이선영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바라봤다. 장승지. 얼마 전 대구 지사에서 올라온 후배였다.
“어, 승지야. 끄응!”
몇 시지?
대답하면서 장승지의 뒤편에 보이는 시계를 봤더니 벌써 11시였다. 아침 11시가 아니라, 저녁 11시. 기사 쓰느라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도 몰랐던 이선영이었다.
“선배, 연희고 애들이랑 친하다고 하셨죠?”
“연희고? 지영이?”
“네.”
“응, 친하지. 왜?”
아니라고 하기엔, 언론계 전체가 자신과 강지영이 친한 걸 다 안다.
그래서 왜? 라고 물었지만 사실 자기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 장승지가 왜 은근한 눈빛과 어조로 강지영과 친하죠? 하고 물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게, 이런 질문을 오늘만 두 번이나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단독으로 낸 어린 독지가 기사가 나간 이후부터 일주일에 최소 서너 번은 이런 질문을 들어왔다.
장승지.
얼마 전 대구 지사에서 올라온 이 후배는 아무래도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질문을 받고, 거절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선배, 저 연결 좀 시켜주면 안 돼요?”
“지영이랑?”
“네. 선배, 저 한 번만 연결해 주세요. 네?”
“하아, 승지야. 너, 걔들 인터뷰 안 하는 거 몰라? 이번에 공항에서도 조용히 뒤로 빠져나갔어.”
“에이. 그래도 선배 부탁이면 다를 거 아니에요. 네?”
“아니? 나도 이미 까였는데?”
“네?”
“하아.”
이선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이 영악한 친구는, 그 영악한 정도만큼 정보력이 따라가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지. 이건 나랑 지영이랑 친하다고 말해준 사람이 그 뒤만 쏙 빼먹고 얘기해 주지 않은 거네.’
왜?
나 귀찮으라고.
그리고 그랬을 사람이 누군지 딱 예상이 갔다.
‘아 김 또라이 진짜.’
김상진.
바로 하나 위의 선배.
예전에 충주로 좌천당하기 전에도 그렇게 자기를 못마땅해했던 인간이고,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인간이다. 얼마 전엔 어처구니없게 사귀자고 고백까지 했다. 어제는 자기 집에서 와인 한잔하자고 했고. 미친 인간이다.
‘고백해서 혼내주자도 아니고 뭐야, 진짜?’
하여간 진짜, 인생이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다.
아니, 도움이 안 되는 정도를 넘어 조만간 뚝배기를 콱! 깨버리고 싶은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요즘 쓰는 게, 지금처럼 이렇게 사람 귀찮게 하는 일이었다.
“에이, 선배. 그러지 말고요. 네? 저 애들이랑 한 번만 소개해 주세요! 저 이번 달 꼭 기사 잘 쓰고 싶어요. 네?”
아이고, 이 어리석은 중생아.
그런다고 될 문제가 아니란다.
“걔들 정말 인터뷰 안 한다니까? 내가 얼마 전에 연락했는데도 까였어.”
“아앙, 선배. 선배님. 일단 소개만 해주세요. 그럼 제가 잘 구슬려서 인터뷰 하나 따볼게요. 잘 안되더라도! 제가 근사한 곳에서 밥 살게요! 네?”
“하아…….”
이선영의 한숨을 고민의 한숨으로 생각했는지, 장승지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선배님. 아직 애들이잖아요? 저 애들 진짜 잘 구슬려요. 애기들은 조금만 관심 주고 은근히 스킨십하면 그냥 넘어온다니까요? 배우로도 생짜 신인이고, 운동선수로 따져도 고작 고3이잖아요? 그런 애들은 제가 잘 얘기해서 인터뷰 딸 수 있어요! 저 한 번만 밀어주세요! 네?”
“……미쳤냐?”
“네?”
“아 이게 성질 나오게 하네, 또.”
빠직.
이선영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장승지가 네? 하고 눈빛 가득 물음표를 머금었다.
“뭐? 스킨십? 꼬셔? 관심을 줘? 어처구니가 없네, 진짜?”
아끼고, 또 아끼면서 애정하는 동생에게 뭘 하겠다고?
김상진 그 인간이 그냥 친분이 있다고만 얘기한 것 같은데, 이선영은 강지영이란 선수와 그들이 아는 것 이상 친밀한 사이였다. 어린 독지가가 그 아이들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선영이 발품 팔아 아이들을 찾아다니지 않았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다.
그게 끝인가?
얘들이 연예계로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자신이었다. 자신과 인맥이 있던 친구를 통해 임스테이에 나가게 해줬고, 그게 아이들 방송 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외에도 이선영은 강지영과 친분을 맺었다.
그래서 지금은 의남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뭐? 스킨십? 꼬셔?
“야, 네가 꽃뱀이야?”
“네?”
“고작 고3인 애를 뭐? 스킨십으로 꼬셔? 너 정신 나갔냐?”
“네? 언니, 그게 아니라…….”
“선배라고 불러. 나 너 같은 꽃뱀 동생 둔 적 없으니까!”
“…….”
쩌렁!
고요한 사무실을 울리는 이선영의 외침에, 장승지의 목이 확 움츠러들었다. 장승지 연차가 벌써 5년 차다. 그럼 아무것도 모를 새내기 시절은 이미 애저녁에 지났다.
“너, 대구에서 이렇게 실적 쌓았어? 인터뷰 거절하면 몸으로 꼬셔서 따냈어?”
“아, 안 그랬어요!”
“근데 왜 그딴 소리가 그렇게 쉽게 나와!”
화가 났다.
동생을 꼬시겠다고 한 말도 화가 나지만, 이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후배의 정신이 정말 화가 났다. 이선영은 후배를 한참을 혼냈다. 그렇게 한참을 혼내고 나자, 장승지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야, 후배야.”
“네…….”
“어디 가서, 절대 그딴 소리 하고 다니지 마. 너 하나가 그런 소리 하면 기자들 전부가 그런 줄 알아.”
“네…….”
“가, 가고. 너 이용해 처먹은 김상진한테 가서 실컷 욕해.”
“……네?”
“쯔쯔. 5년이나 구른 게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일할 마음도 다 사라져서 이선영은 가방을 챙겨,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는데도 화가 풀리지 않아 그녀는 곧장 강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아직 동생이 잘 시간은 아니라는 걸 알아서였다.
-네, 누나.
“너 어디야?”
-저요? 서울이요.
“서울? 평일 이 시간에 서울은 왜?”
-액션 스쿨에서 훈련받고 있어요.
“평일인데?”
-네. 첫 촬영 얼마 남지 않아서 시간 없거든요.
“그럼 서울에서 자는 거야?”
-아니요. 12시나 1시쯤 끝나면 내려가야죠. 내일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와…….
이선영은 엘리베이터에 타 지하 5층을 누르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12시까지 훈련하고, 다시 청주로 내려가 내일 수업을 받는단다.
“그럼 내일 또 올라오고?”
-앞으로 한…… 2주는 그럴 것 같아요. 주말은 서울에 있을 거고요.
“대단하다, 진짜…….”
이제 시합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렇게 강행군을 시작한 동생이 기특하고, 대단하고, 그리고 안쓰러웠다.
-해야죠. 이미 다 약속한 건데.
“그래, 그래그래. 대견한 내 동생. 스쿨 어디야? 누나가 야식 사줄게.”
-어, 여기 하남 쪽이요.
“금방 가겠네. 거기 스쿨 분들 얼마나 계시고?”
-서른 명이요.
음, 돈 좀 깨지겠다.
하지만 동생 덕분에 작년 코인 판에서 크게 벌어서, 그녀는 부자였다. 고작 서른 명 치킨 피자 돌리는 돈은 며칠이면 복구될 정도로. 기자 일 안 해도 평생 먹고살 정도로 그녀는 부자였다.
-그런데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아, 기분 꿀꿀 해. 동생 얼굴 보고 힐링 좀 해야겠어. 어디 가지 말고 딱 기다려라?”
-하하, 알겠어요. 음, 여기 주소 보내드릴게요.
“알았어. 출발하면서 바로 시켜야겠다. 거기 대표님한테 말해주고.”
-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그녀는 미국에서 어렵게 수입한 ‘아주 튼튼한’ 삼각별 SUV에 올라탔다. 폰을 꺼내 주소를 확인하고, 배달 어플로 음식을 주문한 뒤 차를 출발시키자 업체에서 확인 전화가 왔다.
액션 스쿨에 사는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안심시켜 준 후, 주문이 완료됐다. 근데 참 웃긴다. 선금으로 결제했는데 확인 전화까지 하다니. 그런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운전에 집중했다.
시간이 벌써 12시다. 뻥 뚫린 밤길을 좀 달리자 동생이 보낸 주소로 차를 몰았다. 30분쯤 달리자 도착했다. 밤임에도 고즈넉하단 느낌이 드는 카페의 주차장에 차를 댄 이선영은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저 끝에 동생이 전담 매니저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큼성큼 걸어 둘의 앞에 털썩 앉은 이선영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영이 아는 누나 이선영이에요.”
“지영이 매니저 임은진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도요. 호호. 실례지만 나이가?”
“동갑으로 알고 있어요.”
“아하, 술 좋아하세요?”
“휴무 날만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저는 저쪽에 있을게요.”
어째,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철저히 사생활을 지켜준다는 점이 더욱 그랬다.
“벌써 친구 된 느낌인데요?”
동생의 말에 이선영은 피식 웃었다.
“그러게. 아, 힘들다. 힘들어.”
“왜요? 요새 무슨 일 있어요?”
“있지. 있고말고. 너 때문에 죽겠다, 아주.”
“저요? 저 왜요?”
“너랑 연희고 아이돌이 인터뷰를 안 하니 주변에서 날 아주 들들 볶잖아!”
“아…….”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시달리고 있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정신 나간 후배의 말을 듣고, 열을 와르르 쏟아내고 오지 않았나. 그것만 해도 정말 스트레스였다.
“죄송해요. 그런데 이건 애들이 다 같이 정한 거라, 어쩔 수 없어요.”
“알아, 나도. 그리고 나도 너한테 인터뷰하자고 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거 부탁하자고 보자고 한 것도 아니고.”
이선영은 답답했다.
요즘 들어서 특히, 서울에 있으면서 더더욱 그런 느낌이 강해졌다.
인터뷰 청탁도 청탁이지만, 그냥 사람 문제로 지쳐갔다.
“누나답지 않게 되게 힘든 얼굴이네요?”
“나다……. 아니다. 연습은 어때? 할만해?”
나다운 게 뭔데?
라고 물으려다가 지영이 이제 고3이라는 걸 알고, 그리고 그런 말은 화풀이라는 걸 바로 깨달은 이선영은 바로 대화를 돌렸다.
“괜찮아요. 버틸 만해요.”
“참 대단하다. 대단해. 안 힘들어?”
“힘들죠. 안 힘들다고 하면 그건 정말 거짓말이죠. 근데 힘들어도 해야 하는 거니까요. 천년만년 유도만 하고 살 순 없잖아요. 안 그래도 은퇴가 빠른 스포츠인데.”
“그래도 그렇지. 너무 이른 나이에 몸을 혹사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는 혹사도 아니에요. 그때에…….”
“그때?”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나 저녁은요? 야식 사준다면서요?”
“아 맞다. 그것 때문에 왔지?”
말을 돌린 게 신경이 쓰였지만, 이선영은 더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찰나 간 스쳐 간 눈빛,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곧 강지영이 가진 개인적인 상처, 아픔에서 비롯됐을 테니 먼저 말해주기 전까진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나았다.
“어디 보자……. 오, 여기 음식도 파네? 여기서 시켜 먹을까?”
“네. 그러려고 여기로 왔어요. 저도 어제 먹어봤는데, 맛있었거든요.”
“그래? 잘됐네. 자 그럼, 나는 가볍게 카레밥. 그리고 수제버거 세트.”
“하하, 그게 가벼워요?”
“스트레스받을 때 먹으면 영 칼로리. 몰라?”
“……네네.”
전혀 수긍하는 표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자기도 민망해서 던진 말이었으니까. 가볍게 먹겠다는 임은진 매니저의 샌드위치, 자기와 똑같이 고른 지영의 메뉴를 시켜 배불리 먹고 나자 몸이 나른해졌다. 그런데 어딜 나른해지려고? 하는 것처럼 지영이 뭔가를 내밀었다.
서류 봉투.
“이게 뭐야? 돈은 아닐 거고.”
“하하, 누난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요? 그냥 열어봐요. 열어보면 알아요.”
“그래? 흠…….”
열어보면 안다고?
청탁은 아니겠지?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생각을 하며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낸 이선영은 잠시 상단에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의 사진에 시선이 머물렀다. 귀여운데, 굉장히 고집스럽게 생긴 아이였다. 귀까지 똑 떨어지는 단발에, 귀는…… 부었다? 통통하다? 마치 만두처럼?
만두귀다.
일반인들도 귀가 이렇게 되려면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안다. 유도 아니면 레슬링. 이 두 종목만이 귀를 이렇게 망가뜨린다. 만두귀를 본 이선영은 옆에 이름을 확인했다. 근데 이름도 의외였다.
“이시카와 사오리? 누군데 얘는?”
일본 애네?
고개를 들으며 묻자, 지영의 미안함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