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84화
184화. 아시아 선수권(11)
“한판! 한판이다아!”
와아!
짝짝짝!
남자친구의 우승에 양유진은 양반다리를 한 채로 폴짝폴짝 뛰었다.
“으이구, 그렇게 좋아?”
손까지 번쩍 들고 덩실덩실 흔드는 언니를 보며 양지원이 놀리듯이 묻자, 양유진은 응! 하고 세상 맑게 웃었다. 그런 언니를 보다가 양지원도 피식 웃었다. 언니만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도 남자친구인 강한결이 금메달을 따며 저도 모르게 언니처럼 환호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잘됐다. 히잉.”
양유진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강지영의 우승을 축하. 아니, 감사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양지원도 마찬가지였다.
“지영 오빠도 마음고생 많이 했을 텐데, 다행이다…….”
“그러니까, 힝…….”
두 사람은 황금세대가, 연희고 아이돌이라 불리는 자신의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엄한 문제로 치이고 깨지고, 언론이 그 다섯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고, 거기에 동조해 네티즌들도 다들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을 욕하고.
그걸 가장 옆에서 모든 걸 알면서도 지켜본 사람이었다.
강한결이 두 사람에게 절대 후원에 관한 얘기는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참았던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먼저 밝혀도 벌써 밝혀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했을 거다. 그래서 지켜보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었다.
그 좋아하는 운동도 못 하고 해서 정신도 말이 아니었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어렵사리 볼 때마다 안 좋아지는 모습이 어쩔 수 없이 보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게 정말,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참고 참아서 오늘.
드디어 아시아 선수권이란 큰 대회에서 강지영이 먼저 우승했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강지영이라는 사람 특유의 서늘한 미소를 보고도 둘은 자주 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런 지영을 보는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언니 울어?”
“응? 아니야. 헤헤.”
“아니기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이! 이건 기뻐서!”
“그게 우는 거지.”
“힝, 왜 놀려? 너도 저번에 한결이 선발전 우승했을 때 울었으면서!”
화르르.
그 말에 새하얗던 양지원의 볼에 홍조가 빠르게 깃들었다. 화선지에 먹을 떨어뜨린 것처럼 그렇게 달아오르자 양지원은 그, 그거랑은 다르지! 하고 항변했지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티격태격.
시상식이 끝나고, 방송종료 안내가 나오고 나서야 두 자매는 티격태격하던 걸 멈췄다. 그러곤 멍하니, 갑자기 아이돌이 나와 춤을 보면서 양유진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또 저런 표정이다.
또.
불안하게.
“연예인님은, 연예인이니까 연예인도 많이 만나겠지?”
“……언니 질투?”
“아, 아니! 연예인님은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잘 알아. 근데 그냥…… 연예인은 예쁘잖아. 난 좀 그렇고.”
딸깍.
그 말에 양지원의 머릿속에 있던 스위치 하나가 켜졌다.
양지원에게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바로 언니의 자존감이었다. 언니는 꾸밀 줄을 몰랐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포기하고 살았다. 자신의 운동을 위해 헌신하느라, 그 흔한 나이키 신발 하나 없었다.
언제나 시장에서 산 옷과 신발, 속옷.
화장품도 스킨과 로션이 전부. 그 흔한 비비크림 하나 바르지 않는 게 언니였다. 왜? 자신의 뒷바라지 때문이었다.
양지원은 그게 불만이었다.
언니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게, 그게 불만이었다. 그녀는 왜 하필 자신의 재능이 피겨에서 나타났는지, 처음엔 그걸 원망했다. 피겨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었다. 차라리 육상이나, 축구나, 농구나 배구였으면 차라리 더 좋지 않았을까 하면서 자기 자신을 원망도 많이 했다.
몇 번이나 언니한테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언니도 옷 좀 사고, 신발도 좀 바꾸고, 머리도 좀 하라고 했지만, 언니는 헤헤, 웃고 알았어, 한 다음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그런 언니가 요즘은 좋아졌다.
이유는 당연히 언니의 남자친구 강지영과 자신의 남자친구 강한결 때문이었다. 운동적인 면에서 후원해주는 것도 모자라, 호감을 품어주고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언니는 요즘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씩 꾸미기도 했지만, 간혹 TV를 보면서 지금처럼 흔들렸다.
이유는 언니의 남자친구인 강지영이라는 사람이 진짜,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서였다. 공부도 잘하는데, 운동은 더 잘한다. 벌써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정도가 아니라 압도할 정도로 노력하는 재능형 천재였다.
그런데 잘생기기까지 했고, 그 외모로 드라마도 찍었다.
연기도 곧 잘했다.
아니, 잘했다.
드라마 예인에서 강지영은 연기력으로 욕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의 재능. 진짜 천재. 그런 사람이 남자친구이다 보니, 불안감을 종종 느끼고 있었다. 특히 TV에 예쁜 여자 연예인들이 나올 때면 그런 감정이 불쑥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이해는 했다.
자신의 남자친구도 만만치 않으니까. 이번 대회가 끝나면 영화도 찍는다고 했으니까. 곧 영화계 데뷔를 앞둔 사람이 자신의 남자친구였다.
너무 대단한 사람들.
나이는 고작 자기보다 한 살 더 많지만, 갖춘 것은 자신보다 몇 배나 되는 사람들.
그 마음이 이해돼서, 화를 내려던 양지원은 언니를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으며 물었다.
“언니, 힘들어?”
“응?”
“불안해?”
“아니? 안 불안해. 안 불안한데…….”
거짓말.
말이 떨렸다.
어깨가 스스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떨렸다. 언니는 불안했다. 너무 대단한 남자친구 때문에. 그리고 사실 자신도 좀 불안했다. 너무 대단한 남자친구 때문에. 그러니 이런 불안감을, 날려야 했다.
“언니!”
“응?”
“우리 쇼핑 가자!”
“어? 갑자기?”
“응! 갑자기! 머리도 하고, 옷도 사고! 나 용돈 모아둔 거 있으니까 우리 나가자!”
“어, 그…….”
“에잇! 빨리!”
양지원은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언니를 TV에서부터, 그리고 나쁜 마음으로부터 대피시키기로 했다. 억지로 손을 잡아 일으켜서, 방으로 끌고 들어가 옷을 갈아입히며 부산을 떠는 순간, 이 일의 원흉인 TV 화면 하단에, 강지영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이라는 자막이 지나갔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속보로 황금세대. 혹은 연희고 아이돌이란 타이틀로 올라오는 기사로 도배되고 있었다.
지영이 금메달을 따고 딱, 30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우승.
목에 건 금메달은 언제나 사람의 기분을 좋게 했다.
아주 작은 대회도, 금메달은 언제나 옳은 법이었다. 지영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시상식이 끝나고 선수들과 사진을 찍고, 대표팀과도 사진을 찍고 시상식을 마무리했다. 그런 다음 도복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는데.
꺄아아!
웬걸.
일본 팬들이 돌아가지 않고 지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
“어떻게 할래?”
전기정 감독의 물음에 지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한국이었으면 팬들에게 사인이라도 해주겠는데, 여긴 일본이었다. 경기장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 때문에 대표팀 일정에 지장을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팬들이 마음에 걸렸다.
비록 다른 나라 팬이지만, 팬은 팬이다.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외면하고자 했으면 연예인이라는 직업 자체를 병행하면 안 된다는 게 지영의 생각이고, 임은진의 생각이었다.
임은진의 마음가짐을 이식받은 지영은…….
“저, 감독님? 안녕하세요. 지영이랑 여기 연희고 아이돌 애들 전담 매니저팀 팀장 임은진입니다.”
“어, 누나?”
“지영이 우승 축하해! 감독님 잠깐 얘기 좀 하실 수 있으세요?”
그러고 보니, 일본에 따로 와서 지켜본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았다. 다만 바빠서 자신은 까먹고 있었고.
“네, 그럽시다. 그전에, 음. 장 코치? 내일 시합 있는 친구들 인솔해서 숙소로 먼저 가게.”
“네, 감독님.”
장필재 수석코치가 고개를 끄덕이곤 내일 시합이 있는 선수들을 인솔해 체육관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 시합을 한 선수들도 전부 따라갔다. 남은 건 지영과 코치 셋이었다.
“그러니까, 시합이 끝났으니 짧게 사인회를 열자, 이 말이시죠?”
“네, 제가 아까 일본유도협회 측에 문의해봤는데, 방해되지 않는 선이라면 충분히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흠.”
“지영이랑 성진이. 그리고 내일도 애들 응원해 주러 올 팬들이에요. 아무리 일본이고, 일본 팬들이라지만 이건 무시하면 아이들의 평판에도 좋지 않거든요. 저는 이런 일본 팬들의 분위기를 읽고 넘어온 거고요.”
“허허, 참.”
전기정 감독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게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지영이 가진 특수성 때문이었다. 운동선수이면서, 연예인. 지영이 찍은 예인으로 살어리랏다가 일본에 수출되면서, 돌풍까진 아니어도 젊은 층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문학이나 예술 쪽엔 광적인 집착이 있는 일본이라서, 현실을 담아낸 예인은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받았다.
노력으로는 재능을 이길 수 없다.
이 지극히 불편한 진실이 오히려 일본 예술인들의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평이 일반인을 끌어들였고, 그 결과 지영은 모르지만, 지영은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몰랐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팬들 덕분에 알게 됐으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영이랑 성진이 이리 와봐라.”
전기정 감독이 둘을 불렀고, 지영이 다가가자 곧장 의견을 물어왔다.
“여기 팀장님께서는 너희 둘이 사인회를 했으면 싶으시다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피곤하면 돌아가고. 괜찮으면 여기 팬분들 사인해 드릴 시간 주고.”
감독님의 말에 지영은 이성진을 바라봤다.
그러자 친구는 대번에 난 찬성. 하고 의견을 냈다.
그에 지영은 다시 감독님을 바라봤다.
“많이 오신 건 아니니까, 금방 해드리고 갈게요.”
“그래? 그러자, 그럼. 나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끝나면 같이 돌아가자.”
“네.”
숙소가 그리 멀지도 않았다.
무도관 앞의 호텔인데,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니까 모인 팬은 전부 해봐야 200명 안팎이다. 이 정도면 금방 사인해 주고, 숙소로 갈 수 있었다. 거기에 또 하나. 시합이 그리 힘든 것도 아니었다. 1회전부터 결승까지 지영은 여유가 있었다. 최선을 다한 건 맞지만 미야모토 신지랑 했을 때처럼 빡빡하게 한 것도 아니라서 체력적으로, 컨디션 면으로도 큰 문제는 없었다.
준비는 금방 끝났다.
무도관의 좌측 입구 주차장 처마 아래에 의자와 테이블을 두고 사인회를 하면 됐기 때문이었다.
임은진이 능숙한 일본어로 줄을 세우고, 사인회가 시작됐다.
통역은 임은진이 맡아줬다. 지영은 영어로는 대화가 되는데, 일본어는 거의 몰랐다.
나라를 떠나, 팬에 열광하는 소녀의 마음은 다 대동소이한 것 같았다.
손편지와 작은 선물.
그런 수고를 더해 정성을 준비해놓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과 사인 하나로 만족하는 모습. 사실 지영은 이런 걸 이해하진 못했다. 지영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열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 마음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지영은 성의껏 사진도 찍고, 짧게 대화도 나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찾아왔다.
“음?”
유도복이다.
가지런히, 곱게 개어 빛바랜 띠로 묶은 백색 도복.
“유도 해?”
임은진이 통역해 준 지영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지영은 소녀의 끄덕임에 지영도 같이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유도를 할 스타일은 아니었다. 일본 특유의 느낌이 물씬 나는 검은색 교복, 그리고 단정한 단발머리. 도복을 올린 손을 보니까 희고 곱다.
일본의 문학소녀 느낌이지, 유도소녀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 문학소녀가, 말문을 뗐다.
“언니가 해요. 언니가 오빠 팬인데 오늘 못 와서, 제가 대신 왔어요.”
임은진이 통역해 준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왜 못 왔는데?”
“오늘 저녁에 수술해요. 훈련하다가 십자인대 끊어졌거든요.”
“아, 이런.”
유도선수가 가장 피해야 하는 부상이다.
한번 끊어지면 재활도 오래 걸리고, 다시 유도를 한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기량 하락은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부상 부위가 선수의 심리를 언제나 자극한다. 무리하다가 또 끊어지는 거 아닌가? 이렇게 훈련해도 되나? 쉬어야 하나? 이런 식으로.
그래서 십자인대 부상은 정말 피해야 하는 부상이었다.
‘그런데 신기하네. 일본에도 잘하는 선수가 많은데 내 팬이라니.’
그것도 심지어 유도선수가.
이것도 드라마의 힘인가? 아니, 한국 문화예술의 힘인가?
뭐가 됐든 간에 신기했다.
그래서 좀 더, 팬서비스를 해주기로 했다.
“언니 수술 들어갔어?”
“아니요. 이따가 저녁에 들어가요.”
“그럼 언니한테 전화 걸어볼래? 얼굴 나오게. 아, 의사 물어보고.”
“……감사합니다.”
꾸벅.
문학소녀답게 차분한 어조로 감사함을 입에 담는 아이. 제 딴에는 어른스럽다고 생각하겠지만, 지영의 눈엔 어른스럽게 꾸미고 있음이 보여 그냥 귀여웠다. 문학소녀는 곧장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잠시 뒤 짧은 영상통화가 시작됐다. 지영은 그렇게 특별한 팬서비스를 해줬다.
그런데 이게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상상도 못 한, 지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