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81화
181화. 아시아 선수권(8)
큰 산은 다 넘었다.
이성진도 아베 히후미를 잡았고, 지영도 오노 쇼헤이를 잡았다.
체급의 최고 강자를 잡았기 때문에 남은 산은 동네 뒷산 정도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할 수 있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도 운동 삼아 오를 수 있는 그런 뒷산이었다.
하지만 지영은 일말의 방심도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 경기만 해도 방심으로 진 선수들이 제법 많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오노 쇼헤이였다. 오노 쇼헤이의 그 거만한 유도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얕잡아 보는 성향에서 시작된다. 거기에 자기 경기력이 더 해지면 오히려 경기력이 올라가고.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게임에 임하다가 지영에게 허벅다리 후리기 절반을 빼앗기고, 결국에는 반칙패라는 수치를 당했다.
지영은 그 전철을 밟고 싶은 생각이 정말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준결승이 끝나고, 패자전이 진행되는 동안 최대한 체력을 비축했다.
“더 안 먹을래?”
황석의 우렁우렁한 말에 지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충분히 먹었어. 그보다 올라가서 너희도 좀 쉬어. 내일 시합인데.”
대기실까지 내려온 친구들.
지영은 그게 좀 미안했다. 오늘 경량급 시합이고, 내일은 남자 중량급, 여자 경량급 시합이 있다. 그런데 친구들은 쉬는 것보단 내려와서 이렇게 지영과 이성진의 케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석은 오히려 서운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게 지금 내 컨디션 관리야.”
“야, 이게 어떻게 컨디션 관리야?”
“나한텐 이게 컨디션 관리하는 거야. 지영이 네가 제대로 쉬지 못해서 결승전에서 지면, 그게 컨디션 난조로 이어지는 거고.”
“……알았다, 알았어.”
졌다. 졌어.
평소에도 항상 본인의 시선에 자신을 넣어둔다는 걸 아는 지영이라서, 친구의 호의를 그냥 군말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좀 더 먹자. 너 평소 먹던 것보다 좀 덜 먹었어.”
“……그래.”
어떻게 알았지?
평소보다 조금 먹긴 했다. 이유는? 옆에서 메이드처럼 수발을 드는 황석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빨리 먹고, 자신이 쉬어야 황석도 쉴 수 있어서 덜 먹었는데 이 친구는 그걸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지영은 한국에서 공수해 온 점심으로 에너지를 좀 더 보충했다.
딱, 평소 대회 루틴대로 먹을 만큼만 먹어서 포만감이 느껴지되, 속이 더부룩하지 않은 상태까지 먹었다.
그러자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일어난 황석.
“지영아, 결승전 잘해.”
“그래, 알았으니까 얼른 올라가서 너도 쉬어.”
“그래.”
소처럼 순둥순둥한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인 황석이 가고, 지영은 바로 헤드셋을 차고 수면안대를 눈에 찼다. 패자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니 지금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쉬어주는 게 좋았다.
이성진도 마찬가지로 지영의 옆에 누워, 수면안대와 이어폰을 차고 누워있는 상태였다.
푹 자는 게 아닌 짧은 쪽잠.
이때 에너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회복된다. 그렇게 잠시 자고 일어나자, 에너지가 충분하게 올라왔다.
아직 잠들어 있는 이성진을 힐끔 본 지영은 김재정 코치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어요?”
“어, 깼어? 아직 좀 남았어. 1시간쯤 여유 있거든. 아까 시합 잠깐 브레이크 걸려서.”
“왜요?”
“애매한 판정으로 중국 선수단이 엄청나게 항의했거든. 그것 때문에 30분 잡아먹었다.”
“아하.”
30분.
몸을 풀 시간이 30분 더 여유가 있다는 뜻이니 나쁜 건 아니었다.
지영은 이성진은 좀 더 자게 두고, 김재정 코치의 옆으로 갔다.
“코치님, 아브라함 영상 좀 보여주세요.”
“어, 여기.”
아브라함.
풀네임은 이것보다 훨씬 더 길었다. 본인, 아버지, 할아버지에 가문 이름까지 붙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다. 그러니 줄여서 아브라함. 아랍에미리트 선수로, 이번 결승전 상대였다. 지영처럼 전 경기 한판승으로 올라온 백전노장이다.
나이는 서른 중반인데, 여전한 피지컬을 유지 중인 선수로 세계 대회 성적도 매우 준수했다.
세계 선수권 은메달 하나, 리우 올림픽 동메달에, 각종 세계 대회에서 금메달도 여럿 딴, 절대 경시할 수 없는 선수였다.
그런 아브라함은 전형적인 힘 유도였다.
바우르잔 쿠아트도 힘 유도였지만, 이 선수는 그런 쿠아트의 상위 버전이었다. 즉, 한두 단계쯤 쿠아트가 레벨업을 하면 딱 아브라함이 된다는 거다.
“힘을 진짜 잘 써. 보이지? 틈 딱 주면 바로 허리 껴서 뽑는 거. 이거 진짜 조심해야 한다.”
“……네.”
보고 있다.
거의 엎어진 상대를 끙차! 해서 들어 옆구리에 껴 그대로 허리껴치기를 날리는걸. 상대가 작정하고 엎어져 있는데 그걸 뽑는다? 진짜 엔간히 힘이 좋지 않은 이상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했다.
딱, 이것만 봐도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힘은 최소 나보다 두 레벨은 위겠네.’
오노 쇼헤이의 힘도 상당했지만, 이 선수는 그런 오노 쇼헤이보다도 윗줄이다. 그래서 지영은 아마 여태껏 자신이 만나본 적이 없던 힘을 느껴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더욱 조심하잔 생각에 경각심이 빠르게 피어났다.
“그런데 약점도 있어. 봐, 기술이 굉장히 단조로워. 잡히지만 않으면 크게 경계할 기술이 없어.”
“그러네요. 업어치기도 엉성하고, 허리기술도 그렇고.”
“허리만 안 잡히면 돼. 지영이 너 좋아하는 자세가 딱 승부 보기 좋아. 결승전은 네 스타일대로 가자.”
“네.”
내 스타일.
특유의 방어 유도. 거기에 곁들인 카운터.
그리고 그 전체를 아우르는 경기 운용.
김재정 코치의 조언대로 지영은 결승전 전략을 세웠다.
전기정 감독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이성진도 일어나서 결승전 상대 영상을 보며 전략을 짜고 있었다. 이성진의 결승전 상대는 중국 선수였다. 중국 선수답지 않게 기술 유도를 구사하는 슌웨이란 선수인데, 지영은 걱정하지 않았다.
똑같이 기술로 붙는다면, 이성진은 아직 고3이라도 세계급 스페셜리스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영은 대기실에서 경기장으로 이동해 몸을 풀었다. 패자전이 끝나고 막 결승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여자부 경기는 오늘 세 게임이다.
-70의 안승희 선배가 결승전에 올라갔는데, 상대가 일본 선수라 오늘 결승전에서는 유일한 한일전이었다.
패자결승 두 게임 뒤, 금메달 결정전이 진행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면 시간이 너무 걸리니, 네 경기장에서 금메달 결정전을 동시에 했다. 그리고 다시 두 개의 결승전이 진행되고. 이렇게 여자 두 번, 남자 두 번씩 하면 딱 네 타임으로 나눠서 패자결승, 결승이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오늘도 마지막 게임이었다.
“또 주인공이네?”
도복 상의를 입으며 한 이성진의 말에 지영은 피식 웃었다.
“바꿔 달라고 할까?”
“됐거든요. 나는 지영이 네 조연이 좋아.”
“야, 뭔 조연이야. 이상한 소리 하고 있어.”
“내가 그렇다는데, 왜 네가 열을 내냐?”
음?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데 그게 좀 부자연스러웠다.
“너 긴장했지.”
“어? 아닌데? 나 긴장 안 했는데?”
어깨 스트레칭을 하며 대답하는 이성진은 딱 봐도 긴장했다. 티는 잘 안 나지만 지영이니까 알 수 있었다. 항상 같이 부대끼고 사니까, 가족보다도 더 자주 보니까 알 수 있었다.
“뭘 긴장하고 그래. 너 최고야. 오늘 경기도 최고였고. 그러니까 하던 대로만 해. 야, 그리고 아베 히후미도 잡아 놓고 왜 중국 선수랑 하는데 긴장을 해? 해도 아베 히후미랑 했을 때 긴장해야지.”
“……귀신같은 놈.”
“하하, 석이도 그러더라. 내가 평소보다 조금 덜 먹었는데 귀신같이 알더라고.”
“진짜?”
“응. 못 속여. 너나 나나, 우린 서로는 못 속이는 거야.”
“그건 그렇지. 아, 이제 괜찮아졌다. 그래도 메이저 대회라서 그런지 긴장했나 보다. 진짜 이제 괜찮음.”
“그래. 몸 풀자.”
“응.”
지영은 이성진을 다독이고, 빠르게 몸을 풀었다.
부딪치기로 몸을 풀고 열을 제대로 올렸다. 그리고 다시 잠시 휴식으로 막힌 숨을 뚫었다. 이 과정이 진짜 힘들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라 절대 생략해서는 안 됐다.
그렇게 몸을 푸는 와중에 여자부 경기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쿵!
한일전은 승리했다.
안승희 선배가 누르기로 한판을 거두고 좋아서 폴짝폴짝 뛰는 걸 보면서, 지영은 경기 준비를 마쳤다.
일본어와 영어로 경기 안내방송이 나오고 잠시 뒤 이성진이 60 패자결승, 66 패자결승, 네 경기가 시작됐다.
다행히 정수원 선배는 패자결승에서 업어치기 한판승을 거뒀다.
이어서 이성진이 들어갔고, 긴장이 풀린 이성진은 업어치기 한판승으로 그랜드 슬램의 첫 관문을 훌륭하게 통과했다.
그리고 이어진 73 패자결승.
패자결승은 아주 오래 걸렸다. 한 게임은 금방 끝났는데, 다른 한 게임이 연장전 5분이 넘도록 승부가 나질 않았다. 지영에게 준결승에서 드릭 사몬 선수와 반대쪽 시드에서 올라온 선수의 대결이었는데, 진짜 피 튀기는 경기가 계속 이어졌다.
실제로 피도 터졌다.
드릭 사몬 선수의 이마에 커팅이 나며 피가 철철 흘렀지만, 지영처럼 붕대를 감고 끝까지 시합에 임했다.
그리고, 힘이 빠져 결국 반칙패로 패배했다.
누워서 울분을 터트리는 드릭 사몬을 보면서 지영은 모든 스포츠가 영화나 만화 같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저 정도면 승리를 줘도 될 법한데…… 그러지 않지. 운명의 여신께서는…….’
노력의 여하에 응답하지도 않으시고, 투지를 보며 응답하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지극히도 냉정한 세계다.
이 세계는.
그래서 지영은 이 세계에 좋은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재능과 노력으로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세계.
그렇기에 다른 세계보다는 지극히 공평한 세계.
‘운으로 승부 보는, 돈으로 승부 보는 세계가 아니라서 더더욱.’
좋은 거라고 지영은 생각했다.
마침내 시간이 됐다.
안내방송이 지영의 순서를 알렸고,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경기장에 입성했다. 쇼맨십이 가미된 결승전이었다.
지영이 등장하자 다시 꺅꺅거리는 환호성이 들렸다.
K-드라마의 팬들의 환호성이 오히려 시합장에 불편한 기운을 잔뜩 일으켰다. 자국에서 벌어지는 대회인데 한국 선수를 향해 환호하니 다른 관중들의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아서 일어난 기운이었다.
하지만 지영은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팬들의 환호는 감사하다.
시합이 잘 끝나면, 사인회를 열어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시합이 잘 끝났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시합에 온전히 집중해야 할 때였다.
지영이 루틴을 거쳐 입장하고, 상대인 아브라함도 입장했다.
확실히 덩치가 좋았다.
신장은 170 초중반인데 몸이 정말 단단한 느낌이었다.
마블 히어로 중 헐크를 축소하면 딱 저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표정에서 느껴지는 다부진 느낌까지 더해지니 훨씬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모습에 겁을 먹기에는 지영이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뭐, 얼굴로 시합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자 심판이 입장했다.
심판은 오노 쇼헤이에게 반칙패를 줬던 심판이었다.
아시아 선수권 결승전.
심판이 자신의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장난질을 치는 심판은 아니라는 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주심이 입장했으니, 다음은 당연히 선수 입장 차례였다.
인사, 입장, 인사, 한 발자국 앞으로.
하지메!
하지메 소리와 함께 성큼성큼 덤벼드는 아브라함. 그가 다가오자 가슴에 잔뜩 난 남성미의 상징이 기이하게도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손을 뻗는 순간,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악취.
이게 대체 뭔 냄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브라함이 다가오는 순간 땀 냄새가 뒤섞인, 아주 애매모호한 냄새가 지영의 코로 훅 들어왔다. 그에 지영은 고개를 옆으로 젖히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