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80화
180화. 아시아 선수권(7)
심판은 고민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이내, 와자리! 하고 절반을 선언했다. 절반 선언에 바로 굳히기로 연결해 가는 이성진을 보며 지영은 진짜 내 친구지만, 업어치기 하나만큼은 끝내준다고 생각했다.
말아업어치기.
이성진이 양 깃보다도 더 잘하는 업어치기였다. 그런데 사실 이성진은 말아업어치기에 더 신경을 써서 훈련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성진의 키가 너무 컸다.
이성진은 66에서는 거의 제일 큰 178 정도인데 심지어 주특기 기술이 업어치기였다. 허리기술을 아예 못 차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처음 유도를 시작했을 때부터 중점을 두고 훈련한 업어치기보다 정교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성진은 왜 업어치기를 선택했을까?
단순히 업어치기가 재밌어서? 멋있어서? 아니었다. 이는 이성진의 불우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유도를 처음 시작했을 때, 체구가 정말 작았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신장은 지영보다 10㎝ 이상이나 작았고, 팔다리도 바짝 마른 장작을 연상시킬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래서 작은 선수들에게 유리한 업어치기를 훈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도를 시작하고, 백곰 체육관의 관장님이 이성진의 재능을 확인한 뒤 따로 지원을 시작하면서 이성진은 가히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학교에서 먹는 급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던 부족한 양양분 공급이 시작되자, 몸이 그간의 설움을 폭발시키듯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지영을 포함한 친구들이 제대로 잘 먹고, 잘 크는 걸 딱 3년 만에 따라잡았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오히려 이성진이 지영보다 크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이성진은 주특기를 바꾸지 않았다.
왜?
이때도 이미 동 체급에 이성진의 업어치기를 막을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굳이 고쳐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이성진은 정석인 양 깃 업어치기, 한팔 업어치기 말고 말아 업어치기나 외깃 업어치기를 더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동 체급 선수들이 작으니 업어치기를 파고 들어갈 각도가 당연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아업어치기는 상대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가는 것보단, 옆으로 파고들어 상대를 내 등이나 어깨 쪽에 붙인 다음 그대로 꽂는 기술이라, 이성진은 어느 순간부터 이쪽에 더 중점을 뒀다.
이성진이 목표로 잡은 건 베이징에서 전 경기 한판승을 따냈던 선배처럼, 알면서도 못 막는 업어치기 선수가 목표였다.
그리고 이번 훈련 기간 동안, 모든 기술 연구 시간에 말아업어치기와 안방현을 한방에 돌린 외깃 업어치기를 연습했다.
그런 연습이, 지금 빛을 발했다.
제대로 옆에다가 걸어서, 제대로 메다꽂았다. 그 결과 절반을 먼저 선점했다.
“자세 낮추고! 차분하게! 차분하게!”
전기정 감독의 외침에 이성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금 아베 히후미와 맞섰다. 아베 히후미는 애초에 방심하지 않았다. 이 선수의 가장 큰 장점이, 어떤 시합도 진심으로 나선다는 점이었다.
이성진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찾아봤던 일본 선수들의 시합 중 아베 히후미는 가장 열정적인 선수였다. 오노 쇼헤이와는 달리 겉멋도 없고, 언제나 경기 중에 진심인 사람. 그 부분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지영이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 아베 히후미는 다부진 표정으로 친구를 향해 달려들었다.
4분.
여유가 철철 넘칠 것 같은 시간이지만 절반이 하나 나오고, 그쳐를 한 지금 30초가 넘게 지나 있었다. 그러니 남은 시간은 3분 30초. 절반을 딴 선수는 아예 이기고 있단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하는 시간이지만, 반대로 절반을 빼앗긴 선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가짐으로 덤벼들어야 하는 시간대였다.
그런데 아베 히후미는 딱 그런 마음가짐으로 덤벼들었다.
지영은 절대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베 히후미는 깔끔하게 한판승을 따내면서 시합에 올라가는 선수였다. 특히 하체와 허릿심이 엄청났다. 그 힘을 바탕으로 몸을 거의 기역 자로 꺾어 업어치기를 거는 선수였다.
안방현과 했던 경기 중에도, 양 가슴 깃을 잡고 허리를 거의 기역 자로 꺾어 업어치기를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었다.
그런 선수니, 언제고 절반을 만회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역시.
쿵!
자세를 낮춘 이성진을 잡기 위해, 갑작스러운 안다리로 아베 히후미가 절반을 땄다. 이성진은 안다리에 걸리는 순간 곧장 몸을 피했지만, 아베 히후미는 도망가려는 이성진에게 연결로 안뒤축을 쳐 자세를 제대로 무너뜨렸다.
그 상태에서도 허리를 완전히 비틀어 피하긴 피했는데, 절반을 뺏기는 건 막지 못했다.
지영은 이 판정에 불만이 생기진 않았다. 무도관이라서 한판을 주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심판은 제대로 된 판정을 내렸다.
‘자신감이 과한 거지.’
그게 신기할 수도 있지만, 지영은 이를 오만과 만용으로 봤다. 일본은 자신이 있던 거다. 그래서 따로 판정에 로비나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었던 거다. 자신들이 내보낸 화려한 선수의 면면에. 이 정도면 가장 한국의 에이스들을 전부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한 거다.
혹시 지는 거 아냐?
이런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게 분명했다.
‘정신 못 차렸으니, 그건 우리한테는 오히려 좋은 거지.’
내일 경기에 나갈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이성진에게는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지영이야 뭐, 이미 오노 쇼헤이를 잡았기 때문에 딱히 영향은 없었고.
다시 시작되는 경기.
두 선수의 승부는 다시 원점이었다.
유불리 자체가 없는 상황.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란 마인드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지영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성진은 분명 들어가기 전에 패배는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으로 족하다고 했다. 평소에 활발하다고 해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막 내뱉는 성격은 절대 아니니, 자신이 한 말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
쿵!
넘어갔다.
아베 히후미가 걸었던 안다리를 제대로 걸어서 넘겼다.
하지만 아까 이성진처럼 허리를 비틀어서 떨어졌는데, 점수가 나올지 안 나올지는 애매했다. 그래서 지영은 반사적으로 심판을 바라봤다. 심판은 두 선수의 시선에 관중석 전체의 시선까지 받으며 신중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상체를 세우며 점수 선언을 하지 않았다.
그에 지영은 눈매를 찌푸렸다.
분명 넘어갔다.
이성진과 거의 똑같이.
그런데 아베 히후미는 절반을 주고, 이성진이 넘긴 건 안 준다? 이건 문제가 있었다. 이런 경우는 높은 확률로 심판이 친일본 성향 심판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경기는 연장전까지 갔을 땐 무조건 위험했다.
“에이! 에이!”
판정에 전기정 감독이 격렬하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경고를 받고는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성진아!
“이성진!”
그때 관중석에서 크게 울리는 목소리. 이성진은 물론 지영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한결이었다. 강한결이 난간을 붙잡고, 다시 크게 소리쳤다.
“승부 봐! 연장전 갈 생각하지 말고!”
역시 강한결.
지영이 생각한 것처럼 강한결도 이번 판정으로 심판이 친일 성향이 강하다는 걸 바로 깨달은 것 같았다. 그래서 거리가 상당한 데도 목이 터져라 외쳐 상황을 주지시켰다. 이성진의 눈빛은 강한결의 목소리를 들은 직후 대번에 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한결이었다.
연희고 황금세대의 리더.
그냥 말이 필요 없는, 우리들의 리더다.
그래서 이성진도 그렇고, 지영도 그렇고 강한결의 말엔 의심 없이 따른다. 차분하던 기색의 이성진이, 굉장히 호전적인 눈빛으로 변한 것도 당연히 강한결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본인도 아마 눈치챘을 거고.
하지메!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이성진은 허리를 바짝 숙이며 이번엔 먼저 다가갔다. 그러곤 벼락처럼 손을 뻗어 가슴 깃을 잡고는, 강하게 털기 시작했다. 아베 히후미는 당황하지 않고 물러나면서 이성진의 손을 강하게 뜯었다.
그런데 이성진은 그 힘을 이용 그냥 몸만 들어와서 안뒤축을 그냥 툭 댔다. 그러곤 어깨로 강하게 밀었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밀치기였다. 아베가 이걸 예측했다면, 아마 바로 되치기를 걸 수 있었을 거다. 그는 그런 실력이 충분히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심이 무너지며 몸이 뒤로 강하게 밀려 나갔다.
하지만 지영도, 이 기술을 건 이성진도 고작 이걸로 아베 히후미가 발라당 넘어질 거라는 예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는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미끼다.
‘지영아. 아베 말이야. 갑자기 공세로 나가면 어떻게 반응할까? 밀릴까? 아니면 역으로 밀고 나오려고 할까?’
얼마 전 이성진이 기술 연구 시간에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궁금해하기보다는, 지영은 그냥 답을 해줬다.
‘맞서겠지. 밀리면 반칙 받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렇겠지?’
‘나라도 그렇게 하지. 반칙 관리하려면 민다고 밀리면 안 돼. 그러면 그냥 망해. 야, 그런데 이건 상식 아니냐?’
‘상식이지. 그래서 그 상식 좀 이용해 보게.’
‘어떻게?’
‘딱 한 번 공격적으로 밀어버린 다음, 밀리지 않으려고 역으로 밀고 나오는 거 받아서 업으려고.’
‘잘못하면 위장이다.’
‘소매만 잡으면 돼. 소매만.’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이성진을 보며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잡기만 하면 무조건 업을 수 있는 게 너지.”
거창하게 표현하면, 업어치기의 스페셜리스트.
그게 이성진이었다.
이성진의 예상대로 아베 히후미는 한 번 유효 공격을 당하자, 그대로 쭉 앞으로 밀고 나왔다. 그러면서 뻗은 손의 아래 소매를 잡은 뒤, 이번에도 벼락처럼 돌아서 앉았다. 안방현을 한 바퀴 돌린 외깃 소매들어 업어치기다. 다만, 그냥 외깃과 다른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속도였다.
소매 끝을 툭 채서 그 안으로 파고들어 가 상대의 겨드랑이를 어깨에 걸어, 아무것도 잡지 않고 오직 허릿심과 회전속도만으로 상대를 내던지는 기술이다. 웬만큼 빠르지 않고는, 그리고 웬만큼 하체와 허릿심이 좋지 않고는, 정말 웬만큼 한순간의 타이밍을 노리는 게 아니고서는 가만히 서 있는 상대도 넘기기 힘든 기술이다.
그러나.
이성진은 해냈다.
빙글 돌려서 뒤로 업혔던 아베 히후미가, 그냥 뚝! 뒤통수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이성진의 등이 마치 돌부리 역할을 해 거기에 걸려 그대로 그냥 뒤로 넘어지듯이 쿵! 처박힌 거다.
한판!
한파안!
전기정 감독이 벌떡 일어나 외친 것처럼 심판은 자세를 바로잡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걸 한판을 안 주는 것도 우습다. 이렇게 대자로 뻗어서 떨어졌는데 절반? 그건 심판 자질 자체가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번쩍!
심판의 한판 선언에 이성진은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우와!
그리고 그런 이성진을 향해 관중석 한구석에서 커다란 함성이 나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봤더니,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일단의 관중이 보였다. 교포분들이었다. 특히 나이 드신 교포분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이 이성진의 승리에 손을 들어 환호해 주고 계셨다.
이성진은 용케 그쪽을 보고는 손을 같이 흔들었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다.
이성진은 그렇게 손을 흔들지만, 반대로 아베 히후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전형적인 패자의 모습으로 도복을 고쳐 입고 있었다. 심판의 주의를 받은 이성진도 도복을 고쳐 입었다.
승자 선언 후 아베 히후미와 악수를 한 이성진이 밖으로 나와 지영을 찾아왔다.
땀에 흠뻑 젖었지만, 웃는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그리고 그렇게 빛나는 미소로 처음 지영에게 했던 말을 또 했다.
“지면 죽는다?”
피식.
“알았다고.”
“진짜 죽는다고.”
“알았다니까?”
그제야 씩 웃고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가는 이성진. 전기정 감독은 지영을 향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곤 이성진과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둘이 빠지자, 진행요원이 지영을 안내했다. 나란히 선 드릭 사몬. 이번에 처음 아시아 선수권에 나온 뉴질랜드의 선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지영!
서건 상! 꺄아아!
입장하는데 들리는 서건이란 이름에 지영은 아주 짧게나마 K-드라마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 직전. 그런 감상은 바로 접고 시합에 집중했다. 짝짝! 뺨을 강하게 때려 정신을 일깨우고는 경기장에 입성한 지영.
주심은 이번에도 다무라 료코 심판이었다.
지영은 심판의 입장 사인에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사, 다시 한 걸음 앞으로.
악!
이제, 지영의 준결승이 시작됐다.
쿵!
그리고 시합 시작 30초 만에 허리껴치기로 한판을 돌려버렸다.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결승에 진출한 지영은, 이제 그랜드 슬램의 첫 단추까지 한 발자국 남았다는 사실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