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75화
175화. 아시아 선수권(2)
지영은 리시신과 서로 깃을 잡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얕잡아보네.’
가볍게 잡았다.
거기에 껄렁한 자세에, 눈빛을 보면 리시신은 강지영이란 선수를 그다지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왜? 지영은 솔직히 말해 이게 좀 궁금했다. 아시아 선수권이면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메이저 대회였다.
그런 대회에 나왔다는 건, 최소한 그 나라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가 나왔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런데 심지어 한국은 유도 강국이었다.
근래 올림픽에서 힘을 못 쓴다고는 하지만 세계 선수권, 아시안 게임 등에서는 적어도 중국보다는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둔 나라였다. 그런데 왜 자신을 이렇게 얕잡아볼까?
자신의 나이가 어려서?
그럴 수 있겠다. 지영의 나이는 이제 고작 19살이니까.
아니면 지영이 연예인처럼 머리를 기르고 나와서?
그것도 그럴 수도 있겠다.
지금 지영의 머리는 드라마 배역 때문에 상당히 길었으니까. 거기에 외모까지 더해지니 유도 선수라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외형으로만 봤을 땐 무시할 법도 하긴 했다.
정말 그런 것 때문에 무시하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합 중엔 상대의 실력만 봐야지. 실력만…….’
그런데 왜 실력은 안 보고, 대충 설렁설렁하는 걸까?
지영은 솔직히 기대했다.
그래도 세계다.
아시아 선수권이지만 그래도 각 나라의 최정상급 선수들만 나오는 메이저 대회였다. 2선발, 3선발이 아니라 주전들이 나오는 대회였다. 올림픽에 나가는 강자들. 그런 선수들이면 응당 그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지영의 기대와는 달리, 중국의 리시신은 시작부터 지영을 얕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영은 지도 하나씩을 받고, 건성으로 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지영의 오른쪽 소매 깃을 잡는 리시신, 동시에 잡았다, 요놈! 하는 표정으로 반대 손이 쭉 들어왔다.
미끼를 너무 훌륭하게 물어줘서 이건 뭐…….
툭, 툭툭.
홰액!
가볍게 한 번, 강하게 두 번 끊어서 소매를 뿌리치던 지영의 몸이 빛살처럼 회전했다. 그리고 빗당겨치기. 리시신은 그대로 끌려와서, 바닥에 처박혔다.
쿵!
잇폰!
“후…….”
미끼를 문 리시신을 돌린 지영은 자세를 풀고 일어났다. 그런데 리시신은 그때까지 어? 이게 뭐지? 하는 표정이었다. 워낙 순식간에 돌아가 버려 자신이 넘어갔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리시신에게서 소매를 뜯어낸 지영은 자리로 가서 섰다.
리시신은 지영이 도복을 고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패배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붉어지더니, 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을 보고 지영은 어쩌면 이 선수는 앞으로 국제대회에서 마주칠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다.
한국도 한국이지만, 스포츠에 진심이다 못해 처절한 중국이 이런 선수를 계속해서 인민을 대표하는 국가대표로 유지시킬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야 지영이 굳이 생각해 줄 필요는 없었다.
밖으로 나온 지영에게 붙는 스태프 둘. 힘은 거의 쓰지 않았지만 이런 케어는 받는 게 좋았다.
“몸 좀 더 풀지 그랬어?”
전기정 감독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했는데, 상대 선수가 너무 좀…….”
“얕봤지?”
“네. 그러더라고요. 좀 놀랐어요. 그래도 세계 대횐데.”
“그런 선수도 있고, 아닌 선수도 있지. 쇼헤이 경기만 보고 가자.”
“네.”
지영은 한쪽에 서서 이제 막 매트에 올라선 오노 쇼헤이를 바라봤다.
오노의 상대는 대만 선수였다.
같은 아시아권이고, 옛날과는 달리 대만도 유도 경기력은 많이 끌어올린 상태였다. 일종의 평준화를 거치며 옛날처럼 독주하는 국가들이 없었고, 선수들 실력은 유도를 최근 시작한 나라가 아니면 거의 비슷하게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대만이라고 얕봐서는 안 되지만, 오노의 눈빛에는 귀찮음이 있었다. 그 눈빛은 신지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신지는 오만함이 있다. 그 오만함은 천재성에서 비롯된 오만함이다. 그러나 오노의 눈빛에 있는 건, 귀찮음이었다.
그 귀찮음은, 자신이 쌓아 올린 금자탑에 앉은 제왕의 위치에서 나오는 감정이었다.
‘그럴 만하지. 무려 올림픽 2연패 신데.’
전 세계를 통틀어 따진다면 제법 나오겠지만, 오노 쇼헤이 정도의 업적을 쌓은 선수는 정말 보기 드물었다. 한국에서 이 정도 업적을 갖춘 선수를 찾으라면, 이번 대회 감독직을 맡은 전기정이 유일할 것이다.
그러니 저런 건방짐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만한 실력이 역시…… 있었다.
쿵!
고작 1분.
고작 1분 만에 거의 악에 받쳐 덤벼들던 대만 선수를 허리껴치기 한판으로 날려버리고, 다시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잘하네요.”
“정말 자신 있지?”
“네.”
“하하, 그래. 가자.”
고개를 끄덕인 지영은 대기실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열렬히 해설 중인 일본 방송의 캐스터가 눈에 보였다. 오늘 경기는 두 나라에서 같이 중계한다. 일본은 1회전부터 중계하고, 한국의 MBS는 8강전부터 중계를 한다고 얘기를 들었다.
아시아 선수권.
사실 축구 정도가 아니면 중계해 주는 일은 거의 없지만 워낙에 황금세대가 뜨거운 감자라 당연히 방송사들이 나섰고, 일본유도협회는 MBS 방송사만 와서 중계하게 해줬다. 유도가 전에 없이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더니 없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이번 중계에도 일본의 노림수가 있었다.
일본은 아주 확실하게 한국 유도를 이곳 무도관에서 침몰시키길 원했고, 그걸 두 나라에 고스란히 내보내서 광고할 작정이었다.
인터넷에선, 이걸 두고 공개처형이라고 했다.
물론 이런 얘기는 지영은 모르고 있었다. 시합 준비를 하면서 인터넷은 끊었고, 오직 훈련에만 임했다. 오죽했으면 연인 양유진과도 거의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통화했을 정도였다.
선발전 이후 한국 유도의 영상을 본 지영은 정말 그만큼 칼을 갈고 나왔다.
대기실로 돌아간 지영은 스트레칭과 함께 다시 마음을 차분히 다듬었다. 그러면서 이성진을 찾았는데 친구는 다시 경기를 준비하러 나가고 없었다. 찾아가 볼까 하다가, 지영은 다시 도로 앉았다.
‘믿는다.’
이성진은 1회전을 훌륭하게 돌파했다.
특기인 업어치기가 아닌 허리채기로 손쉽게 돌파했다. 상대는 카자흐스탄 선수였는데, 힘이 좋은 선수를 상대의, 힘을 역이용한 한판이었다.
오늘 경기력 최상.
이성진은 분명 그런 느낌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친구들이 들어왔다.
내일 시합 뛰는 임효중과 강한결, 그리고 황석이었다.
“컨디션 좋아 보이던데?”
“어? 어. 좋아.”
“다행이네, 어제 너무 예민해서 혹시 컨디션 조절 실패한 건 아닐까 걱정 많이 했는데.”
강한결의 말에 지영은 피식 웃었다.
“내가?”
“어, 너. 너 어제 완전 예민 보스. 지영의 그날인 줄 알았다.”
“하하.”
지영은 그냥 웃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을 것 같긴 했다. 회귀 이후 바로 치른 체전 말고, 이렇게까지 시합이 기다려지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간상으로 따져도 거의 2년 만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제는 확실히 예민하게 보였을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안 가던지. 만약 생각이 많아 잠을 못 자는 스타일이었다면 컨디션 조절에 대 실패했을 정도로 어제는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모습이 친구들에게는 당연히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웃는 거 보니까 이제 마음 놓이네. 준비 잘하고. 우린 성진이 응원하러 간다.”
“응. 고맙다.”
“고맙기는.”
친구들이 떠나고 나자 지영은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지금까지 여유가 없던 건 아니지만, 이번 대회는 확고한 목표가 있어서 뭔가 쫓기는 것처럼 굴었던 것을 깨달았고, 깨닫자마자 반성하고, 마음이 편해졌다.
복수.
그게 이번에 정한 명확한 콘셉트이다 보니까 확실히 날이 서고 예민해졌던 것 같았다.
“후우…….”
지영은 그런 마음을 심호흡과 함께 다듬었다.
‘첫판이야 리시신이 워낙 크게 방심해줬으니 망정이지, 다른 선수들이었음 낭패를 봤을 수도 있겠어.’
리시신은 방심했다면, 지금 자신은 너무 예민해져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이런 감정은 둘 다 최상의 컨디션은 아닌 만큼 마음을 좀 평온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역시 친구가 좋네. 나는 괜히 집중 깰까 봐 말도 못 걸었는데. 하하.”
전담으로 붙은 김재정 코치의 말에 지영은 그냥 웃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무슨. 정신 차렸으면 됐지. 대신 부탁 하나만 하자.”
“네, 말씀하세요.”
“어제 네가 한 장담. 꼭 지켜줘라. 그것만 지켜줘도 난 소원이 없겠다.”
김재정 코치의 말에 지영은 이번에도 좀 전처럼 웃었다.
“꼭 지킬게요.”
“그래, 고맙다. 어디 불편한 덴 없지? 쑤시거나 한 곳은?”
“지금은 괜찮아요.”
“오케이. 아픈데 생기면 바로바로 말하고. 알았지?”
“네.”
꼿꼿이 서 있던 날을 옆으로 눕히자 자연스럽게 많은 것들이 보였다. 코치 말고도 함께 온 스태프 두 사람. 각각 스포츠 심리학과 재활을 전공한 20대 후반의 여성 두 사람 다 정말 이제야 숨 좀 쉬겠다는 것처럼 안도한 표정이었다.
지영이 뿜어내는 예민한 기운 때문에 선수의 집중을 깨지 않기 위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표정이기도 했다. 지영은 그게 미안해서 꾸벅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러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젓는 게, 확실히 기에 짓눌리긴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30분쯤이 지났을 무렵, 벌컥 문이 열렸다.
이성진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이성진의 표정에 지영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지면 죽는다?”
“…….”
이성진의 말에 지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씩 웃은 이성진이 방 안에 있던 두 명의 스태프와 함께 다른 대기실로 향했다. 잠시 뒤 진행요원이 와서 지영을 호출했다.
밖으로 나가니 이미 오노 쇼헤이는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힐끔.
지영을 보는 눈빛은 호전적이지도 않았고, 깔보는 느낌도 없었다. 그냥 나는 생각이 없다…… 이런 느낌이었다. 아예 지영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느낌도 팍팍 묻어나서, 지영도 그냥 신경 쓰지 않았다.
시합에 들어가기 전 신경전을 벌이는 건 애초에 지영의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상대가 도발해 와도 무시하는 게 오히려 지영의 스타일이었다.
나란히 선 두 선수.
잠시 뒤, 앞 경기가 끝났다.
‘역시, 긴장되긴 하네.’
경기가 끝나는 순간부터 긴장감이 피어나는 걸 지영은 느꼈다. 오노 쇼헤이란 선수는 단순히 복수심만으로 어떻게 해볼 선수가 아니라는 걸, 옆에 서보니까 알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위축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지영은 아주 객관적으로 오노 쇼헤이와 자신의 차이를 철저하게 분석했고, 그 분석 결과는 자신에게 매우 높은 승산을 점쳐주었다.
게다가 오노 쇼헤이는 이제 기량이 하락해가는, 유도 선수로서는 황혼에 들어선 나이다.
기량은 여전할 수 있어도 폼 자체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나이. 오랫동안 유도를 하면서 얻은 부상들이 육체에 부하를 줘, 제동을 걸 나이다.
반대로 지영은?
파릇파릇하다.
이제 고작 고3.
한국 나이로 열아홉.
경험이란 것을 빼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이 경험도…… 지영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비참했던 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유도에 관한 과거는 아니지만, 그 자체로 지영에게는 인생 경험이었다.
회귀 전이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게 도움이 안 되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실제로 지영은 그 기억을 바탕으로 어떤 순간에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입장.
진행요원의 손짓에 지영은 상념을 멈추고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지영아.”
“네.”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던 대로만 하면 네가 이겨. 알았지?”
김재정 코치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곤 매트 위로 올라섰다.
슥, 스윽. 평소 루틴대로 발바닥에 묻은 땀을 닦아 낸 지영은 제자리 점프로 관절을 풀었다. 그러곤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채 자신을 같잖다는 듯이 바라보는 오노 쇼헤이와 시선을 맞췄다.
피식.
그런 시선에 지영은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잘하는 건 알아. 아는데…….’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딴 눈빛은 좀 아니지?
그리고 그 눈빛,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심판이 입장했다.
인사하고, 입장, 다시 인사하고, 한 걸음.
하지메!
스윽 뻗어오는 손을 내버려 두고 어깨 깃을 잡은 지영은, 턱을 치켜든 채 소매 깃을 바라보는 오노 쇼헤이의 사이로, 벼락처럼 파고 들어갔다.
파앙!
허벅다리를 참과 동시에 공중으로 붕 뜬 오노 쇼헤이의 신형이 정점에서, 빙글 돌았다. 하지만 한 바퀴를 아예 돌아서 바닥에 철퍼덕 엎드리는 자세로 떨어졌다.
피식.
운 좋네?
그 한 방에 놀란 표정을 짓는 오노 쇼헤이에게 지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내리깔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