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68화
168화. 새롭게 뜨는 별, 신성(新星)(3)
떠올랐던 몸이, 조용히 다시 그 자리에 내려앉았다.
완벽한 타이밍에 허벅다리를 찬 박병훈이지만, 타이밍만 완벽했지, 당기기와 기울이기는 전혀 완벽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지영이 완벽함을 지워버렸다.
제대로 잡기에 당한 순간이었지만 쭉 들어와서 상체를 회전시키고, 허벅다리를 차는 순간 지영은 자신의 목깃을 잡은 팔을 역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공간이 벌어졌고, 다리만 제대로 들어와 차올렸다.
즉, 상체가 전혀 끌려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지영의 몸은 마치 비행기를 태우는 것처럼 붕 뜨긴 했지만, 그대로 안전하게 착륙했다. 기술이 실패하자 박병훈은 곧바로 상체를 자세를 원상태로 돌렸지만, 그 사이 이미 지영은 포지션을 회복했다.
아니, 단순히 회복한 정도가 아니라 소매 깃까지 먼저 잡았다.
네 손가락으로 꽉 말아 쥐면, 웬만하면 선수도 이걸 뿌리치긴 쉽지 않았다. 유도선수들이 기본적으로 단련하는 악력은 이때 쓰라고 있는 거기 때문이었다.
박병훈은 역시 정석대로 소매를 거칠게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지영은 뿌리치는 방향으로 슬그머니 따라가 힘을 상쇄시켰다.
물론 완벽한 건 없어서 이렇게 잡혀도 뿌리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영은 그걸 그대로 받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잡은 소매를 그대로 쭉 찍어 눌렀다. 힘은 비슷하지만, 위에 찍어 누르는 게,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것보다 당연히 더 유리했다. 그러곤 정신을 못 차리게 가슴 깃으로 쭉 손을 뻗었다.
소매를 뿌리치려다가 가슴 깃을 내주게 되면 손해 보는 건 박병훈이었다.
소매 하나만 잡으면 걸 기술이 마땅치 않지만, 가슴을 잡으면 발기술부터 손, 허리, 변칙기술까지 전부 다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도계에서 보는 강지영이란 선수는, 기술에서만큼은 딱히 주특기란 게 없는 선수였다.
왜 주특기가 없냐고?
다 찰 줄 알고, 다 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나만 판 선수들처럼 아주 수준급으로 말이다.
그걸 지영을 철저히 연구하고 나왔을 박병훈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영이 가슴 깃을 잡으려고 하자 소매 깃 뜯는 걸 멈추고 더 중요한 것부터 방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지영이 노린 바였다.
한군데만 방어하는 것과 양쪽 다 방어하는 것. 어느 게 더 정신이 없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지 않을까? 당연히 후자다.
기계처럼 대처하던 박병훈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욕이 떠올랐다. 게다가 지영은 가슴 깃은 가슴 깃이지만 그보다 한참 아래, 복부 쪽의 깃을 잡았다. 여길 잡으면 당기는 게 배는 힘들어져서 웬만하면 잡지 않지만 그래도 아예 잡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지영은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잡기를 이어나갔다.
먼저 잡았으니, 비록 가슴 깃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고 해도 이제부턴 지영의 시간이었다. 툭, 툭툭. 지영은 잡은 깃을 가볍게 털었다. 한 번, 두 번씩 나눠서 털자 박병훈은 가슴 깃을 쭉 밀어내서 털어냈다.
지영은 손이 뜯기는 순간 바로 위로 뻗어서 이번엔 제대로 가슴 깃을 잡았고, 잡는 순간 업어치기 모션을 취했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움찔하는 박병훈에게 지영은 그대로 다리를 슥, 쓸어 넣었다.
업어치기 모션에서 안다리.
업어치기 선수들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숨 쉬는 것보다 쉬운 페인팅에 이은 발기술이다. 유도 경기에서 아주 많이 나오는 전형적인 페인팅이고, 연결 기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박병훈은 이 연결기술에 제대로 걸렸다.
안다리가 걸린 순간 다리를 들려고 했지만 이미 그땐 지영이 바짝 달라붙은 뒤였다. 다리를 들면 당연히 중심이 붕 뜰 수밖에 없었고, 중심이 떴다는 건 중심이 무너지기도 쉽다는 소리고 거기다가 안다리에 걸린 상태라 뒤는 빤했다.
그래서 박병훈은 그냥 버텼다. 그런데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며 버티는 순간, 그 순간을 지영은 기다렸다.
안다리를 걸었던 다리를 그대로 매트에 강하게 찍고, 허리를 안으로 틀어 집어넣으며 축이 되던 발을 강하게 찍으며 그대로 허벅다리를 차올렸다. 몸을 틀면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낭패한 표정을 지은 박병훈의 눈빛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당했다.
딱 그 표정이었다.
홰액!
박병훈의 몸이 붕 떠서, 그대로 빙글 돌았다. 지읏기까지 완벽하게 들어간 찍어 안다리에서 연결한 찍어 허벅다리가 그대로 박병훈을 돌렸다.
파앙!
낙법 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잇폰!
그리고 심판의 다부진 한판 사인에 지영은 후우, 한숨을 내쉬곤 도복을 놓고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마주친 박병훈의 눈빛. 그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패자가 되었으니, 그런 감정을 당연히 느낄 수 있어야 했다. 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선수는, 선수도 아니라는 게 지영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자리로 돌아가는 도중, 쿠웅!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더니 황석이 자신과 엇비슷하게 한판을 던지고는 주먹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지영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친구도 이겼으니, 더없이 기분이 좋아서였다.
와아아!
연희고! 연희고!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승자 선언 뒤, 거의 동시에 나온 지영과 황석.
지영은 황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짝, 소리가 나도록 쳐준 황석이 세상 순한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어. 지영아.”
“응, 너도. 잘했어. 진짜.”
나란히 걸어가는 둘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도 있었다. 대기장으로 가면서 지영은 팬분들의 응원이 오늘 경기력에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돌이나 배우에 비하면 그 수가 적긴 하지만, 그래도 거의 일방적인 응원이었다.
이런 일방적인 응원은 상대의 기를 죽이는 역할을 했다.
‘멘탈 강한 박병훈은 괜찮겠지만 이런 경험이 거의 없는 다른 선수들은 기존의 정신력을 유지하긴 힘들겠지.’
한일전을 하는데, 일본에서 시합하는 기분이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경기할 때 각 팀이 각각 느끼는 감정일 거다. 적진에 들어온 기분. 이주 극소수의 팬들만 자신을 응원해 주고, 나머지는 전부 상대 팀만 연호하고, 환호해 주는 기분.
그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구기 종목에서 나오는 홈과 원정의 이점과 약점을 갑작스럽게 아무런 경험도 없이 체감하게 되다 보니, 확실히 전체적인 경기력이 다들 약해진 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지영은 이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이는 지영이나 친구들이 노력해서 얻은 성과였다.
공부와 운동만으로도 쉴 시간이 없는데 거기에 연기에 예능까지 나가며 팬을 만들었다. 솔직히 정말 힘들었다. 한평생 운동만 하다가, 공부만 하다가 갑자기 예능을 찍고, 드라마를 찍고, 영화를 찍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지영이나 친구들은 해냈다. 그러니 오늘 팬들의 응원은 황금세대의 능력이고, 실력이었다.
지영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고생했어. 좀 고생하던데?”
“잘하시더라고.”
거짓말이 아니었다.
박병훈은 좋은 선수였다. 육체적, 정신적 밸런스가 아주 좋은 선수였다. 지영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 우승했을지도 모를 정도의 실력자였다.
“이우진 시작한다.”
이성진의 말에 지영은 그가 챙겨 준 수건으로 땀을 닦고,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우진과 장석호.
둘 중 이기는 선수와 결승을 치르게 된다.
시합이 시작됐다.
장석호와는 태릉에서 붙어봤다.
‘이우진이랑 실력이나 스타일이 정말 비슷해.’
일단은 업어치기에 베이스를 둔 선수지만, 상황에 따라 허벅다리도 수준급으로 차는 선수. 하지만 힘과 기교 면에서 엄청 강하다 싶은 선수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됐다. 물론 그때는 연습이었으니 그걸 실력 자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다른 스포츠에도 있는 말이지만 유도에도 연습용 선수가 있고, 시합용 선수가 있었다.
연습 때는 그저 그런데, 시합만 나가면 훨훨 날아다니는 선수들이 있었다. 장석호는 딱 봐도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누가 이길 것 같아?”
강한결의 물음에 지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 선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우진.”
“우진이?”
“응. 석호 선배님 실력은 무시 못 하는데, 그래도 피지컬은 이제 많이 떨어지셨으니까.”
“아하.”
강한결은 지영의 말에 이해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도에서 피지컬은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말해 입 아플 정도로 말이다.
장석호는 이제 유도선수로는 황혼이었다.
나이 서른셋. 황혼에 마지막 힘을 불태워 선수촌에 입촌했지만, 입촌해서 기량이 올라가기보단, 내리막길을 서서히 걷는 중이었다. 경험, 연륜으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피지컬이 이제 하락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반대로 이우진은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으로, 강지영이란 선수를 목표로 잡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피지컬은 이미 완성 시켰다.
절정의 기량.
지영은 이우진의 기량이 거의 최고조에 올라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치, 자신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번 경기의 승자는 이우진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런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경기 시작하고 1분이 지났을 무렵, 장석호의 업어치기를 받아 그대로 찍어 눌러 되치기 한판승을 거뒀다.
예상했던 것처럼 역시, 이우진이 결승에 올라왔다.
73 결승전이 고3 선수들만 올라왔다. 그게, 기존의 선수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와 호진 형이랑 병훈이, 석호 형 다 떨어졌네.”
“우진이랑 강지영 결승. 둘 다 고3이지?”
“어, 미쳤네, 진짜. 고3한테 다 깨진 거야, 지금?”
“어, 다 깨졌다. 지금 연희고 애들 전부 결승이다. 와, 미치겠네, 진짜. 고삐리 새끼들한테 이렇게 다 털린다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진짜 고3인데?”
선수들의 허탈함 가득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이전처럼 욕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말도 안 되는 성적에 다들 그냥 허탈한 것 같았다.
아직 임효중이 결승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나머지는 확실히 다 올라갔다.
강한결이 부전으로 결승에, 이성진과 황석, 그리고 지영이 결승에 안착했다. 그들이 경기 전에 그렇게 험담하던 연희고 황금세대가 아직 준결을 치르지 않은 임효중만 빼고 전원 결승에 올라간 거다.
험담?
연희고가 마음에 안 들어서 험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전에 연희고를 깔보는 마음에 기저에 깔려 있었다. 아무리 연희고가 날고 기어도, 천재 소리를 들어도 그건 고등부, 유소년 대회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던 거다. 그런 마음 때문에 성인부에서는 먹히지 않을 거라고 다들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고등학생, 대학생, 성인 할 것 없이 전부 깨졌다.
그들이 했던 생각이, 확실하게 빗나가는 결과가 나왔고 그 때문에 어이가 없고, 허탈한 심정들이 됐다.
지영은 그게 웃기고, 참 어리석다 느껴졌다.
인성 문제를 제외하면 스포츠 세계에선 실력이 전부다. 그 실력이 몸값을 결정하고, 인기를 결정한다.
‘나이 말고, 실력을 봐야지.’
시합장에 들어섰으면, 대회라면 더더욱 실력만 봤어야지.
그러나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언론을 탄다고 욕하고,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고, 험담하고, 그러기만 했다. 그리고 이제야 저런 말들을 한다.
지금은 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고, 깨닫는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지영은 그들의 대화를 더 이상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친구, 임효중이 경기장에 들어갔다. 지영은 그쪽에 신경을 집중했다.
임효중의 상대도 실업팀 선수였다.
그리고 그 선수는 현 국가대표 1선발, 이희건이었다.
아시안 게임에서 거의 시작과 동시에 한 바퀴 날아가며, 일본전 전패의 마침표를 찍은 선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가장 많은 욕을 먹은 선수이기도 했다. 특히 임효중이 잡았던 일본 선수였어서, 욕을 더 많이 먹었다.
그래서 선수촌에 갔을 때도, 임효중을 한 번도 안 잡아준 속 좁은 선배님이기도 했다.
그런 선배님은, 좁은 속만큼 경기력도 크게 뛰어나지 않았다.
경기 시작 1분 30초.
아시안 게임 때처럼 방어적으로 나오다가 칼 타이밍에 들어가 찬 임효중의 허벅다리에, 그대로 한판이 나왔다.
“나이스.”
지영은 변함없는 경기력으로 결승에 진출한 임효중을 보며 환하게 웃었고, 짐을 챙겼다.
승자는 이제 잠시 쉰다.
왜?
지금부터는…… 패자의 시간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