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66화
166화. 새롭게 뜨는 별, 신성(新星)(1)
4회전.
지영은 8강을 막 끝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3회전은 무난했고, 4회전은 좀 힘들었다. 스타일이 굉장히 지저분해서 꽤 애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지저분한 스타일.
발, 발등을 밟는 건 예사고, 무릎으로 툭툭 찍기까지 하는 진짜, 솔직히 말하면 진짜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더러운 스타일이었다. 곽상은은 그냥 애교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영은 이런 스타일을 이미 많이 겪었다.
워낙 혼자 다 해 먹을 것처럼 체급을 제패하고 있다 보니 어떻게든 지영을 이겨보려고 반칙을 서슴없이 쓰는 선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욕을 하지 않고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시합 내용은 3분 만에 빗당겨치기 되치기 한판승. 시종일관 여유 있는 척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그것 때문에 애를 먹은 시합이었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금일 국가대표 3차 선발전 준결승, 결승전은 1시간 브레이크타임 뒤인 오후 1시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9시부터 시작된 경기.
벌써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경기장을 많이 써서 금방 4강만 남겨놓고 시합이 끝났지만 반대로 선수들이 쉬는 시간이 없어서 체력이 아주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는 지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연희고도 그렇고, 다른 선수들도 그랬다.
“가자.”
진행석에 가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온 임대성 코치가 딱딱한 얼굴로 나가자고 한 뒤 앞장서 걸었다. 지영은 체온 유지를 위해 도복을 벗고, 보온성이 좋은 티셔츠와 후드티를 입은 다음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밖으로 나오자 한여름의 쨍쨍한 햇빛이 반겼다.
하지만 시합장의 후끈한 열기보다는 나아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점심을 먹을 장소는 버스였다.
연희고 학교 버스.
무려, 리무진 버스다.
쾌적하고, 안락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리무진 버스를 재단 측은 오늘 연희고 유도부를 위해 지원해 줬고, 이미 에어컨을 틀어놔 버스 안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연희고가 들어오기 무섭게 부모님들이 도시락을 까서 건네줬다.
“아들 괜찮지?”
“그럼요.”
선발전이라서 가게 장사도 접으시고 올라오신 어머니의 질문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허벅지, 어깨, 등이 욱신거리긴 했다. 4회전 선수가 하도 찍어 눌러서 생긴 통증이었다. 하지만 지영은 당연히 그걸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유도를 하다 보면, 이 정도 통증은 뭐 달고 사는 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진짜였다. 이는 유도뿐만이 아니라 상대와 직접적으로 몸싸움을 하는 모든 경기에 해당된다.
테니스, 배구, 배드민턴 등, 네트를 두고 하는 운동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종목도 시합 후에 격렬한 후폭풍이 몰려오겠지만 밟히고 찍히고, 눌려서 생긴 통증과는 또 결이 다른 거니까.’
그러니 이런 통증은 선수들에겐 숙명과도 같았고, 지영은 그 숙명을 아주 온전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부류였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아니라서 당연히 싱긋, 빙긋 웃어야 했다.
“다행이다. 아까 그 선수 험악하게 해서 걱정이었는데. 아들, 얼른 먹고 쉬어.”
“네, 그럴게요.”
1시간의 브레이크타임.
선수들은 이 시간을 아주 잘 써야 했다. 속이 부대낄 수도 있다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건 완전한 하수다. 다 합쳐서 고작 20분 정도의 격렬한 시합이 전부가 아니었다. 20분 동안, 하루 간 쓸 수 있는 에너지 전체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예열하면서 쓴 체력도 있다. 게다가 시합에 집중하고, 긴장하면서 정신력 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식으로 떨어진 에너지 전체는 먹는 것과 쉬는 걸로밖에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니 열량 높고, 속에 부하를 주지 않는 음식을 딱 적당히 섭취하고 한숨 자는 게 가장 올바른 방법이었다.
죽을 포함한 도시락을 하나 먹고, 과일도 야무지게 먹었다.
그리곤 먼저 누운 황석처럼 의자를 젖히고, 수면안대를 꼈다. 그러자 주변의 목소리가 거의 줄어들었다.
쉬는데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중학교 때였나?
소체 때 이랬던 것 같다.
버스에서 밥을 먹고 쉬고 있는데 교장이 와 치하를 한답시고 쉬는 애들 다 세워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때 올라온 짜증은 진짜 어마어마했다. 조금이라도 더 쉬고 준결, 결승에 임해야 하는데 세워놓고 앞으로 어쩌구, 미래가 어쩌구, 연희중이 어쩌구 하면서 20분을 훈화랍시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걸 이사장님이 봐버렸다.
결과는?
미치도록 까였다.
쉬어야 하는 애들 잡아두고 뭐 하는 거냐고.
지영과 친구들, 학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교장을 박살을 내고 아예 쫓아버렸다. 그리곤 미안하다며 대신 사과를 하고는 바로 자리를 뜨셨다.
그랬던 기억이 떠오르자,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연희고.
지나치게 상식적이고, 이상적인 곳.
이상향.
아니, 환상향에 가까운 사립 재단.
그래서 이상하게도 학생들까지 지극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곳.
솔직히 지영은 연희초에서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이 정도까지 오지 못했을 거로 생각했다. 학생의 공부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지원하는 학교다. 딱 하나만 예를 들자면 학교 급식 수준이 진짜 어마어마한데, 그 급식이 무료다.
지영과 친구들이 쓰는 운동부 기숙사의 완전 건너편에 있는 학생 기숙사 또한 무료다.
오직 공부. 학업.
그러면서도 크게 조이지는 않는다.
지킬 것만 지켜주면, 상식적인 선에서 부탁하는 것만 지켜주면 그 어떠한 터치도 없었다.
단, 성적은 떨어지면 안 된다.
몇 계단은 괜찮지만, 아예 추락하는 것처럼 떨어지면 학교 측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학생을 버리는 일은 없지만, 간섭, 터치가 제대로 시작되는 거다.
그리고 그걸 위해 선생님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지원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했다. 대체 어떻게 이런 학교가 있을 수 있지? 고급 명문 사립학교는 있을 수 있다. 각종 특목고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연희 재단은 특목고도 아니면서, 정말 신기한 운영을 하는 곳이었다.
그런 연희 재단에 솔직히 도움을 받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런 연희고는 대학도 도움을 줄 생각인 것 같았다.
연희 재단은 원래 대학교는 없었다.
전부 초중고 학교만 있었다. 그런데 지영이 1학년 직후, 회귀한 이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온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재단의 넓은 땅 한곳에 대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연희 대학교.
얼마나 돈을 들였는지 벌써 대학교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 연희대에 연희고 황금세대는 이미 수시로 들어가는 게 결정이 난 상태였다. 이미 준비를 오래전부터 했는지 행정적인 문제도 거의 끝나 있어서, 다음 달에 원서를 쓰기로 했다.
인연이었다.
회귀 전에도 지영에게 아주 큰 도움을 주더니, 회귀 후에도 정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런 연희 재단과 지영은 언제나 함께 가야겠단 생각을 하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잠깐이지만, 꿈을 꾸었다.
아주, 기분 좋은 꿈을.
* * *
준결승부터는 경기장이 두 개로 줄어들었다.
2경기장에서 60부터 81까지, 3경기장에서 90부터 +100까지다. 1번과 4번은 선수 대기장이었다.
60부터 준결승에 들어가니 지영은 시간이 제법 남아서, 몸을 예열하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버지…….’
잠깐, 버스에서 한 20분 정도 자는 동안 꾼 꿈에서 지영은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를 뵀다. 이상한 옷을 입고, 양손과 양발에 이상한 줄이 묶여 있어 마치 죄인과도 같은 모습이셨지만 아버지는 지영을 향해 너무나도 환하게 웃어주셨다. 꿈인데도 따스함이 느껴질 정도로 꼭 끌어안아주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별말 안 하셨다.
잘 지내고 있니.
몸은 이제 아프지 않지?
등등, 그런 걸 물으셨다.
꿈속의 장소는 예전에 살던 집이었고, 어머니는 안타깝게 계시지 않았다. 하지만 지영은 꿈속에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위해 밥을 차려드렸다.
할 줄 아는 음식은 별로 없지만, 어머니가 냉장고에 넣어두셨던 반찬과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고깃국, 그리고 계란후라이와 고기를 구워서 상을 차렸다. 아버지는 홀쭉하셨다. 생전에도 일을 많이 하셔서 그런 기색이셨지만, 자신은 그걸 몰랐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시고 처음 만나 뵙게 되니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는 지영이 차려준 상을 잘 드시고 가셨다. 그게 마치…… 제사상 같았다. 기일도 아닌데,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꿈이라서 다 기억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느껴졌다.
기분 좋다는 것.
가슴이 먹먹하지만, 반대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어서 기분이 정말 좋다는 것.
답답하던 것들이 일시에 가셨다.
마지막에 아버지가 집을 나서며 한 말도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꼭 하고 싶은 걸 다 하라…… 어?’
갸웃.
지영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꿈이다.
“꿈.”
꿈이니까.
꿈이니까 그런 거겠지.
꿈은 보통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투영되는 거니까, 자신이 다쳤다는 걸 아버지는 원래 모르셨지만 그래도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 싶었다. 꿈이니까.
쿠웅!
준결승 첫 번째 경기가 시작한 지 1분 만에 한판으로 끝나는 순간 지영은 상념에서 깼다.
경기가 속행됐으니, 꿈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집중하자, 집중.’
그렇게 정신을 다잡고, 지영은 건너편 대기장을 확인했다.
지영의 이번 상대는 2차 선발전 2위를 기록한 현 73의 2선발 박병훈이었다. 이전의 2, 3선발들은 선수촌을 나갔고, 새롭게 등장한 강자 중 한 명이었다.
‘오른쪽, 왼쪽 다 쓰는 올라운더.’
업어치기, 허벅다리를 전부 수준급으로 차는 선수다.
올해 용인대를 졸업하고 하이원에 간 선수 중 하나고, 용인대에 갔을 때는 하계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해 지영과 잡지 않았던 선수였다.
용인대에서 기대주로 키웠지만, 대학 초반에는 포텐이 터지지 않았다.
심지어 큰 부상까지 입었었다.
그래서 쉬는 중에 체중이 불어 본래 66이던 체급을 73으로 올렸고, 그때부터 포텐이 터진 선수였다.
‘시합 영상은 있지만, 그것도 믿을 건 못 돼.’
변칙과 정석을 넘나들고, 업어치기에 허리기술 전부 수준급이다.
거기에 자세도 상대에 따라 바꿔가며 서는, 지영이 이전에 보였던 스타일을 구사하는 선수였다.
오늘 그의 경기는 전부 자세가 달랐다.
상대에 따라 오른쪽으로 섰다가, 왼쪽으로 섰다가를 반복했고 그랬는데도 전부 승리했다. 그러니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선수였다.
반대쪽 시드에서는 이우진과 장석호가 남았다.
저번 대회 2, 3, 4위가 전부 4강에 올라왔고, 안호진이 떨어진 대신 그 자리에 지영이 올라왔다.
이는,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였다.
모두가 박병훈이 올라올 거라 예상했을 정도이니 분명히 그는 실력자가 맞았다.
방심과 실수 한 번이, 경기를 패배로 이끌 수도 있을 만한, 그런 선수였다.
60경기가 끝났다.
대학부 선수들 둘이 올라갔지만, 현직 국가대표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60이 끝나자, 곧장 시작된 66.
이성진은 2경기라 아직 대기 중이었다.
이번 이성진의 상대는, 신지혁이었다.
66 국가대표를 노리는 선수다.
현재 66의 1선발은 안방현이다. 이번 아시안 게임은 부상으로 못 나갔지만, 이전 아시안 게임 금메달과 올림픽 두 개를 은메달을 딴 알아주는 실력자다. 본래는 그런 안방현과 신지혁 2파전이었는데, 이제는 3파전으로 변했다.
이성진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66 준결 1경기는 역시 안방현의 승리였다.
준결승 시작 2분 만에 주특기인 업어치기 한판으로 결승에 진출했고, 이어서 이성진이 들어갔다.
인사하고 시작하는 순간 지영은 스트레칭을 마치고 일어났다. 친구의 준결승인, 앉아서 봐도 될 만큼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처럼 경기는…… 지극히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기술을 걸고, 받고.
다시 기술을 걸고, 받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피 튀기는, 처음으로 준결승다운 경기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