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65화
165화. 추락한 에이스(6)
AI 심판을 도입하자.
이 얘기는 아주 예전부터 있었다.
비단 유도뿐만이 아니라 축구부터 야구, 농구 등, 심판의 판정이 중요한 종목일수록 더욱 그랬다.
배드민턴이나 테니스처럼, 온전히 실력으로 점수를 내는 경기를 제외하면 심판은 언제나 선수들의 적이었다.
“아니, 기술을 거는데 그쳐를 선언하는 게 어딨습니까!”
임대성 코치의 외침에 쪽 째진 눈의 심판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고집스러운 눈매. 나이도 지긋해서 곧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심판은 임대성 코치에게 경고를 주고는, 시합을 속행시켰다.
지영은 그런 심판을 잠시 보고는, 곽상은과 다시금 맞붙었다.
의도는 알았다.
‘시합의 흐름을 끊는 방법이라, 신박하네.’
유도에서 심판이 특정 선수를 편들어 주는 방법으로는 보통 지도 주기와 점수를 인색하게 주는 방법과 점수를 후하게 주는 방법이 있었다.
A란 선수를 밀어주기 위해서 B라는 선수가 조금만 수비적으로 나와도 지도를 주고, B가 A를 넘기면 점수를 인색하게 주고, 반대로 나오면 점수를 후하게 줘서 서포트하는 거다. 이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눈에 띄니까, 방법을 바꾼 것 같았다.
기술 거는 타이밍에 그쳐를 선언해 시합의 흐름을 망쳐놓는 방법.
이건 지영도 처음 겪는 방법이었다.
유도를 볼 줄 아는 사람에게나 문제가 보이지, 지금 시합장의 99%를 차지하는 관객들은 지금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거다.
그만큼 교묘한 지원이었다.
쭉 뻗어오는 손을 툭 쳐낸 지영은 아예 왼쪽 자세로 잡았다.
잡아보니까 별거 없어서, 시합을 가능한 빠르게 끝낼 생각이었다. 겪어보지 않았던 심판의 판정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시합을 빠르게 끝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게, 지영의 생각이었다.
몇 번의 교환 끝에 홱! 돌면서 서로 맞잡았다. 자세를 안정시키기 전에 지영은 빠르게 안뒤축을 쳤다.
힘, 기술, 생각보다 실력이 별로라서 지영의 기술은 가볍게 쳤음에도 곽상은에게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움찔하는 곽상은.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고 해서 지영은 쫓아가 안다리를 걸었다. 아무리 심판이 매수됐다고 해도 서로 맞잡음과 동시에 기술을 거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게 되면 100% 경기 진행 위원회에서 이사가 개입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은밀하게, 은근하게, 교묘하게.
그렇게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번엔 그쳐를 선언하지 않았고, 지영은 기술을 끝까지 걸었다.
안뒤축에 이은 안다리.
정석에 가까운 연결 기술이다.
보통 선수들이 연결 기술 연습을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당연히 여기엔 지영도 포함됐다.
안뒤축, 허리후리기.
안다리, 허벅다리 걸기나 후리기 등을 주로 연습하지만 그렇다고 업어치기 선수들 방식은 안뒤축, 안다리를 못 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카운터를 치려면 그에 맞는 기술을 철저하게 연습해 놓을 필요가 있으니 이는 당연했다.
쿵!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엉덩방아를 쿵! 소리가 나게 찧는 곽상은. 지영은 그런 곽상은을 밀어서 그대로 뒤로 발라당 눕게 만들었다. 심판에 따라서 한판과 절반이 나눠질 정도의 메치기였다.
과연 점수를 줄까?
와, 와자리!
결국 심판은 절반을 선언했다.
‘이걸 안주고는 못 배기겠지.’
아무리 돈을 받아 처먹었다고 해도, 자기가 권위 높은 심판이라고 해도 유도 룰 자체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유도는 등이 닿으면 점수가 되는 경기고, 등이 닿게 메쳤는데 점수를 안 주면 그때부터 그건 유도가 아니었다.
어떤 종목에도 끼지 못하는 괴상한 투기일 뿐이지.
그러니 심판도 유도 룰을 따라야 했다.
절반을 뺏은 지영은 곧장 굳히기에 돌입했다.
굳히기는 잡기 싸움만큼이나 선호하지 않는 지영이지만 이런 상황에 시간을 끄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은 굳히기에 후한 편이라 적어도 20초는 버틸 수…….
맛테!
있을 줄 알았는데, 막 굳히기에 돌입하는 순간 그쳐 선언이 났다.
“하.”
일어서는 지영에게서 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돈을 받은 만큼 일을 하겠다는 뜻이니 이걸 잘한다고 봐줘야 하나?’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돈을 받지 말고 현명하게 심판을 봤으면 어땠을까? 차라리 그게 더 나았을 거다.
지영은 자리로 가면서 곽상은이란 인간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가 궁금해졌다. 적어도 심판을 매수하려면, 한두 푼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리고 매수한다고 쳐도, 딱 지영의 경기에 배정된다는 보장도 없었고.
여러모로 아주 궁금해졌다.
힐끔.
시간을 확인했더니 이제 2분 20초 정도가 남아 있었다.
2분이란 시간은 진짜 금방이다. 특히 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빠르게 간다. 반대로 이기고 있는 입장에서는 본래 흐름보다 느리게 느껴질 거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지영은 이 상황을 제일 좋아했다.
상대를 천천히, 말려가며 요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곽상은이 어떻게, 얼마를 주고 심판을 매수했는지는 몰라도 애초에 가장 중요한 게 없었다.
‘적어도 실력이 이우진 정도는 되었어야지.’
그래, 곽상은은 실력이 없었다.
지영이 고등학생이라 심판 덕 좀 보면 잡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모양인데, 그게 실수였다. 그리고 더 멍청한 건, 지영을 잡는다고 해도 곽상은이 우승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안호진과 이우진만 해도, 잡아본 결과 곽상은보다 몇 수는 위였다.
‘그런데 나 하나 잡자고 한판에 돈을 태워?’
쯔쯔.
절로 혀가 차졌다.
그리고 실제로 혀를 차기도 했다.
곽상은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지영은 편안하게…… 정말 편안하게 곽상은을 상대했다.
애초에 특출난 실력자도 아니라서 지영은 여유 있게 시간을 보냈다.
곽상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기술을 걸었지만, 지영은 그걸 전부 받고, 역습으로 반칙을 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전부 지워버렸다.
반칙 관리.
어쩌면 카운터보다도 더 뛰어난 지영의 능력 중 하나다.
미친 척하고 지도를 주지 않는 이상은 지영을 반칙으로 압박하기는 힘들었다.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다.
남은 시간 1분.
별것도 아닌 실력으로 3분을 버텼으면 사실 선방한 거였다.
하지만 남은 밑천이 드러나면, 그때부터는 지영의 시간이었다.
“이익!”
억지로 차려던 허벅다리를 몸을 돌리기도 전에 막았다. 그러곤 다시 몸을 원상태로 돌리려는 상황에 쭉 들어가서 모두걸기를 쳤다. 두 발이 매트에 단단히 붙어 있지 않은 상태다. 그러니 정확한 타이밍에 친 모두걸기다.
이게 지영의 방식이다.
점수를 먼저 선점하고, 철저하게 상대를 말려가는 방식.
이는 신지처럼 상대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니었다. 사냥의 한 방법으로, 상대가 지치거나 조급해지기를 노리는 방법이었다.
1회전도 그렇지만, 보통 1분 정도가 남으면 지고 있는 선수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월드컵 때 시간이 거의 끝나가자 독일 골키퍼까지 적진으로 침투시키는 악수를 두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쿠웅!
붕 떴던 몸이, 대자로 바닥에 뚝 떨어졌다.
제대로 친 모두걸기에 심판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잇폰!
한판 선언.
지영은 곽상은의 도복을 놓고 자리로 돌아와 띠를 풀었다. 도복을 고쳐 입고, 심판은 승자 판정을 거친 뒤 경기장 밖으로 나왔다.
후.
고개를 푹 숙인 곽상은을 잠깐 보던 지영은 대기석으로 이동했다. 시합은 끝났으니 이제 곽상은은 머릿속에서 지울 시간이었다. 다만, 이 문제는 임대성을 통해 공식적으로 항의를 할 생각이었다.
짝.
“고생했어.”
강한결과 하이파이브를 한 지영은 스트레칭으로 관절을 풀어줬다. 그런 지영에게 고개를 바짝 댄 강한결이 슬그머니 물어왔다.
“심판 판정, 이상했지?”
“응. 돈 먹은 것처럼 굴던데?”
“……하아. 진짜 왜 너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냐.”
“괜찮아. 실력이 별로라서 크게 위협적이지도 않았어.”
“그래도. 일단 이 건은 시합 끝나고 항의하자.”
“응.”
강한결은 역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예전에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넘어갔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이런 문제가 생기면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할 수 있었다. 연희 스포츠, 그리고 비즈 인터내셔널에 동시 소속되어서 생긴 새로운 힘이었다.
아마 그 심판은 몰랐을 거다.
선수가 소속사를 등에 업고 항의를 진행할 줄은.
하지만 자업자득이다.
증거를 찾아야겠지만, 없어도 상관없었다.
‘정식으로 항의하고 나면, 알아서 몸들을 사릴 테니까.’
그저 만만하게만 안 보이면 된다.
그거면 된다, 당장은 그거면. 애초에 협회나 심판을 싹 뒤집어엎어서 바꿀 생각 자체도 없었다. 그런다고 되지도 않는 판이고. 미친 척하고 돈을 때려 박아 협회의 중요 요직을 차지하지 않는 이상은 체질 개선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애증이다.
유도를 정말 좋아하지만, 이런 것들이 결국 유도에 대한 정이 조금씩 떨어지게 했다. 그래서 강한결의 말대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되면, 지영은 깔끔하게 은퇴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시아 선수권에 나가야지.’
2년마다 한 번씩 열리긴 하지만, 그래도 아시아 선수권을 시작으로 제대로 된 물꼬를 터놔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 꼭 대회에 나갈 생각이었고, 그러려면 이번 선발전 우승은 필수였다.
꼭, 꼭 이기자란 다짐을 하는 중에도 시합은 계속됐다.
지영의 시합 다음으로 들어간 건 강한결이었다. 강한결은 역시 안정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상대는 용인대 4학년 선수였다.
최고라는 용인대에서도 알아주는 선수였고, 상무 입단이 결정된 선수기도 했다.
대학부 대회와 선발전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낸 선수였다. 그런데 그런 선수를 상대를 강한결은 압도하고 있었다.
시작과 동시에 말아업어치기로 절반을 따내고, 지영처럼 상대를 천천히 말려가고 있었다.
강한결은 언제나 이름처럼 한결같은 시합 스타일을 유지했다.
지영처럼 변칙적이지 않고, 정석의 유도를 구사했다. 확실한 타이밍, 타이밍이 안 나오면 상대를 흔들고, 흔들어서 안 되면 상대의 기술을 받아 되치기하는. 그런 스타일이다.
단점도 없고, 장점도 크게 없지만, 실력만 확실하면 가장 안정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는 스타일이다.
그런 스타일로 강한결은 2회전을 절반으로 승리했다.
이변은 없는, 그런 경기였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이변이 터졌다.
콰앙!
“어! 어어!”
“와 씨, 안호진 떨어진 거냐?”
“제대로 업혔네.”
“헐, 미친…….”
안호진이 졌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손을 뻗고 환호하는 걸 보니 자기도 놀란 모습이 역력했다.
“아…….”
그런 상황을 보면서 지영은 짧게 탄식했다.
안호진.
가능하면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지영은 안호진이 결승전에 올라왔으면 했다.
실제로 그렇게 빌고 빌었다. 이우진을 만나도, 안호진이 이겼으면 했다. 에이스를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린 다음, 그 왕좌를 직접 차지하고 싶었었다. 그래야 그에게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는, 지영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안호진이…… 대학부 선수한테 깨졌다.
절망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지영은 결국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승자는 퇴장하고, 추락한 에이스는 씁쓸한 뒷모습만 남긴 채 퇴장했다. 지영은 그런 에이스의 뒷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가, 이내 다시 경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해서 이어진 2회전.
안호진의 탈락이란 이변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이변은 없었다.
그리고 3회전이 지나고, 4회전이 끝났을 때도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