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64화
164화. 추락한 에이스(5)
와아아!
거대한 함성이 갑작스럽게 피어나 체육관을 울렸다.
함성의 주인공은 이성진이었다.
시원한 업어치기로 1회전 상대인 하이원 소속 선수를 한판으로 던지고 짧게 주먹을 움켜쥐며 포효하자 이성진의 누님 팬들이 잘했다고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이성진에게 한판으로 날아간 하이원 선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실업팀 선수다.
축구나 야구, 농구처럼 프로리그는 없는 게 유도라는 종목이고, 그래서 실업팀에 가는 선수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적어도 대학부 시절부터 어느 정도는 성적을 낸 선수들이 실업팀이나 상무, 무궁화 체육단으로 빠지고 나머지는 전부 다른 길로 빠진다. 그리고 그건 곧, 은퇴를 뜻했다. 대학부는 실질적으로, 은퇴와 유도를 끝까지 업으로 삼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결정하는 갈림길이었다.
일종의 거름망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실업팀 중에서도 1군이라 할 수 있는 하이원에 들어갔다는 건 대학부에서 적어도 최정상급 선수였단 뜻이었다.
나이 차이도 10살 이상이 났다.
이 정도면 솔직히 실업팀 선수가 훨씬 더 유리했다.
힘, 기술, 경험, 연륜 등, 아득히 고등부 선수보다도 뛰어나야 정상이다. 그 선수도 중등, 고등, 그리고 대학부에서는 이성진만큼이나 날고 기었을 테니까.
그런데 고작 2분 만에 업어치기로 한 바퀴 돌아갔다.
국가대표급 실력은 아니지만, 선발전을 치르면 적어도 5위에서 7위까지는 가는 선수인데도. 컨디션이 좋고 그날 실력이 폭발하면 3위도 하고, 결승까지 간 이력이 있는 선수였음에도, 그는 이성진을 이기지 못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 나오는 건 그래서였다.
설마,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자신이 고등부 선수한테 질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거다. 아무리 고등부에서 잘 나간다고 해도, 자신은 실업팀까지 온 실력자란 생각에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지영이 보기에 방심하지도 않았다.
자만심이 아니라, 자신감이 있는 운용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는 자신의 패배였다.
‘다만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든 거지.’
자신이 쌓아온 실력이 고작 고등부 선수한테 질 거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래서 나온 표정이었다.
인사를 하고 이성진이 들어왔다.
지영은 그런 이성진에게 말없이 손만 내밀었다.
짝.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곤, 다시금 침묵 모드에 들어서는 두 사람. 이는 지영뿐만이 아니라 전체가 그랬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얘기를 할 테지만, 오늘은 지극히 조용했다.
국가대표 선발전.
처음 나온 선발전이고, 주변에는 자신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수들로 가득했다. 미움받는 걸 넘어서서, 질투하는 단계도 넘어선 그런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에 긴장한 건 아니지만, 그 눈빛을 받으며 희희낙락할 정도도 아니었다.
네 개의 경기장에서 1회전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시합이 끝났다.
1회전이 끝나기 전, 지영은 일어나서 다시 몸을 풀었다. 이제 곧 다시 시합이다. 애초에 선발전은 길게 저녁까지 시간을 끌진 않아서 차례는 금방금방 돌아왔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빨리 돌아오니 몸이 굳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딱히 다시 예열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두 게임 정도 남아서 일어나서 관절만 풀고 있는데 갑자기 시합장에서 악! 소리가 들렸다.
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지영은 한 선수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악! 아아악!”
돌아갔다.
무릎이, 제대로 꺾여 안쪽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인체에서, 정상적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각도로 돌아간 무릎.
“아이고……. 무릎 아작났네.”
“성천이 어떡하냐. 쟤 저번에도 저 무릎 돌아갔었는데. 하아.”
주변 선수들의 안타까운 말들이 지영의 귓가로 들어왔다.
이미 한번 돌아갔던 이력이 있고, 이번에 또 저렇게 돌아간 거면…… 저건 선수 생활이 끝났다고 봐야 했다. 평생 장애, 후유증을 앓고 살아야 할 수도 있을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었다. 유도는 종종 이런 부상이 나왔다. 아니, 자주 나왔다. 투기 종목 중에서는 가장 부상 위험이 큰 게 유도였다.
부상 한 번 없이 은퇴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종목.
그게 유도였다.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바로 들어왔고, 무릎 상태를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보는 순간 파악한 거다. 그래서 바로 들것이 들어왔고, 선수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 선수는 지영의 옆쪽으로 지나갔는데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물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아마도 눈물일 거라 예상됐다. 아파서 운 거든, 아니면 자신의 선수 생활이 끝났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아서 나온 눈물이든, 어느 쪽이든 가슴 한편이 꾹! 저릴 정도로 안타까웠다.
선수가 나가고,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다시 시합이 시작되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기다리고 지영은 매트 위에 올랐다.
강지영 파이팅!
서건 파이팅!
지영아 잘해!
관중석에서 들리는 응원에도 지영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응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시합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지영의 시선에 비릿한 표정을 지은 상대 선수가 보였다.
여수시청 곽상은.
몸을 풀 때 지영을 험담하다 못해, 아예 모욕까지 한 인간. 실력? 글쎄. 실업팀까지 갔으니 실력이야 어느 정도는 있을 거다. 인맥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실력이 없으면 실업팀은 솔직히 엄두도 내지 못하니까.
하지만 지영의 기억에는 없는 선수였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철저하게 -73 선수들을 분석했다. 지영이 이 체급에서 조심해야 할 선수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이우진과 안호진.
2차 선발 때 2, 4위를 기록한 박병훈과 장석호.
이렇게 네 명이었다.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작년 체전 결승전 상대 또한, 지영은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곽상은?
아예 기억조차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저렇게 의기양양하지?’
이전 기록을 뜯어보지 않아도 크게 대단한 선수는 아닐 거다. 기록이 좋았으면 오다가다 지영이 이름을 반드시 들어봤을 테니까. 그러니 딱 고만고만한 선수다. 그럼 자신은? 이미 성적을 제대로 내고 있었다.
세계 청소년 선수권.
청소년이라는 타이틀이 붙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었다. 이때 나오는 선수들의 피지컬은 이미 완성 단계이고, 경험이 부족하지만 실제로 자국의 국가대표들과 붙어도 대등한 경기력을 보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당장 예를 들자면, 미야모토 신지가 그랬다.
그 외에 많은 유망주 선수들이 지금은 현직 국가대표들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대회에는 나가본 적도 없고, 실력도 변변찮은 놈이 대체 뭣 때문에?
‘혹시 심판을 매수했나?’
가능성은 있다.
스포츠에서 심판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
요즘에는 VAR 시스템이 들어서면서 좀 떨어진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 심판이 가지는 권력은 막강했다.
그런 심판을 매수했다면, 저렇게 기세등등한 것도 얼추 이해는 갔다.
하지만…….
‘이우진도 결국엔 넘지 못했어.’
심판이란 권력을,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업고 지영과 붙었던 이우진도 결국에는 지영을 넘지 못했다.
“뭐, 넘겨보면 알겠지.”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으니 굳이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윽고 심판이 들어섰다. 힐끔, 냉담한 눈빛으로 지영을 한차례 보고 자리에 선 심판. 지영은 심판의 눈빛을 받고 자신의 의심이 얼추 맞겠단 생각이 대번에 들었다. 아주 찰나지만 스쳐 가는 불쾌한 눈빛. 선수를 보는 게 아니라 무슨 원수를 보는 것과 닮은 눈빛이었다.
지영이 자신을 질투, 원망하던 선수들에게 받던, 딱 그런 눈빛이다. 이호석이 자신을 보던, 그런 눈빛 말이다.
심판 매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그렇게 당당한지, 이유를 알게 되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그런 지영의 웃음에 곽상은은 인상을 와락 썼다. 어려도 한참 어린 지영이 비웃은 것처럼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비웃은 게 맞았다.
심판의 사인에 맞춰 지영은 경기장에 입성했다.
그러자 와아아! 하는 환호성이 울렸다.
그런 환호성 속에서 심판이 시합을 시작시켰다.
하지메!
기세등등하게 곽상은이 다가왔다.
신장은 자신보다 작고, 왼쪽 허리 기술 선수. 이 정도 정보는 당연히 지영도 알고 있었다.
‘맞잡는 건 별로니까…….’
자세를 바꾸자.
지영이 오른쪽으로 서자 곽상은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이렇게 자세를 바꾸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했다. 하지만 주력 포지션이 아니라 실력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자세든 대응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실력 감소는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영은 이런 자세도…… 제법 잘했다.
잠깐의 잡기 싸움 끝에 서로 도복을 잡았다. 지영은 아래에서 손을 넣어 등판 깃을, 곽상은은 위에서 지영의 등판 깃을 잡았다.
이렇게 교차하듯 잡으면 누가 더 우세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위를 잡으면 허리후리기나 허벅다리 같은 기술 걸기에 더 낫고, 아래로 잡아도 허리껴치기, 허리채기 등의 기술을 거는 게 더 낫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잡고 잠시 대기.
서로 간 보는 시간이라 무리하게 기술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게 20초쯤 지나자 심판이 그쳐를 선언했다.
지영은 여기서 만약 자신에게만 반칙이 들어오면, 심증적으로 확신했던 심판매수를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도!
시도!
하지만 지도는 동시에 들어왔다.
‘아직은 티를 낼 생각이 없나?’
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무 티 나게 지도를 주면 반드시 반발이 따라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타이밍을 잡아서, 확실하게 상황을 끝낼 수 있을 때, 그때 줄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경기 시간은 10초 정도 남고, 서로 지도 두 개인 경우. 그런 순간이 오면 지영에게 지도를 줘서 반칙패를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때까지 곽상은이 버텨야 한다는 점이었다.
버티지 못하면, 아무리 심판을 매수해봐야 아무것도 못 하고 게임은 그냥 끝날 거다. 그리고 지영은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고. 유도의 심판이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판을 줄 걸 절반을 줄 수 있다고 해도, 아예 판정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축구에서 아무리 심판이 매수당했어도 들어간 골을 억지로 무효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툭, 홰액!
지영은 오른쪽 자세에서 빠르게 가슴 깃을 잡고, 그대로 당겨서 왼쪽으로 자세를 바꾸면서 틀어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타일의 변화.
곽상은은 거기에 곧장 대처하지 못했다. 그래서 급히 맞잡아 오려고 했지만, 지영은 올라오는 손을 팔로 막았다.
지영이 잡기 싸움을 안 좋아하긴 하지만, 작정하고 하면 또 굉장히 잘하는 편이었다.
연희고 중에서 가장 잘하는 이성진만큼은 아니어도, 유리한 포지션은 충분히 먼저 선점할 실력이 있었다.
가슴 깃을 잡은 손으로 계속 올라오려는 곽상은의 팔을 어깨를 밀어 막으면서 지영은 틈을 노렸다.
먼저 공격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심판매수가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에 카운터 유도를 고수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보통 이렇게 잡혔으면 그냥 반칙 받을 각오하고 엎어지는 게 상책이었다. 천하의 지영도 먼저 이렇게 잡히면 그냥 포기한다. 그런데 곽상은은 허리 기술 선수라 목, 어깨, 등 깃을 잡아야 기술을 걸 수 있는데 지영이 올라오는 손을 어깨를 밀어 커트하자 어쩔 수 없이 가슴 깃을 잡아왔다.
주특기 기술 포지션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잡기.
이게 기회였다.
툭!
지영의 안뒤축에 곽상은이 움찔했다. 지영은 그걸 보면서 밭다리를 찍으려고 스텝을 밟고, 막 찍으려는데…… 맛테! 심판의 그쳐 사인이 들어왔다. 그에 놀란 지영이 다리를 내리고 심판을 바라봤다.
그러자 권위적인 눈빛으로 뭐, 왜 보냐는 식으로 지영을 보는 심판.
저 눈빛과.
이 타이밍에.
‘그쳐를 한 거면…… 100%네.’
하여간 이놈의 유도판.
참 지긋지긋하게도 변하는 게, 하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