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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162화 (162/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62화

162화. 추락한 에이스(3)

선수촌에 갔다 온 이후, 지영의 심기는 매일 좋지 않았다.

그래도 에이스라 믿었고. 아니, 실제로 에이스였던 안호진의 모습에 실망한 탓이었다. 안호진. 그에게 솔직히 악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그를 안쓰럽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 실력을 갖추고도, 신지라는 천재 선수와 맞붙어 처참하게 깨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안호진이 지영에게 한 사과는 그 안타까움에 마음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오히려 역으로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그게 며칠이나 갔다.

다시 찾아온 주말. 지영은 이성진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이성진은 더 런닝 측과 미팅, 그리고 지영은 이연, 정은정 작가와의 미팅이 있어서였다. 다행히 이때쯤엔 그래도 심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고속도로로 진입하자 이성진이 지영을 불렀다.

“지영아.”

“응? 왜?”

“너 드라마 할 거야?”

이성진의 물음에 지영은 잠시 고민했다.

드라마.

나의 무사님 대본은 재밌었다.

예인의 서건과는 다르게, 포커스가 지영에게 딱 맞춰져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건 확실히 부정하기 힘들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 지영이 서울로 올라가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일단은 만나보고. 만나서 얘기해보고, 일정 맞출 수 있으면 그때 더 고민해 보게.”

“선발전?”

“응. 우리, 이번에 아시아 선수권 노려야지.”

지영의 말에 이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2차 선발전은 끝났지만, 아직 3차 선발전은 남아 있었다.

예전에는 1, 2차 선발전에 성적이 나온 선수들만 참가했었는데 그 규정이 전체 선수 참가로 바뀌었다. 그리고 황금세대에게도 작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입상으로 포인트가 있기도 했다. 또한 협회는 어린 독지가 기사가 나간 뒤, 다급하게 규정 하나를 바꿨다.

이번 아시안 선수권은 3차 선발전에 1위를 한 선수로 내보내겠다고 발표를 한 것이다. 이는 다분히 황금세대를 노린 발언이었다. 애초에 이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괜히 1차, 2차 선발전이 있는 게 아니었고, 여기서 입상해 포인트를 얻고, 세계대회에 나가서 다시 쌓은 포인트로 보통 메이저 대회 출전권을 경쟁하게 된다.

그런데 그걸, 아예 비틀었다.

황금세대를 다분히 신경 써준 규정의 변화.

이 발표는 당연히 반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주축은 기존의 대표급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시합에서 성적을 내고, 세계대회 출전권을 확보하는데 앞서 나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3차 선발전에서 전부 뒤바꾸겠다고 하니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선수들에게는 그 자체로 기회가 됐다.

소수 대표 선수들의 반발, 나머지 선수들은 찬성. 하지만 그래도 황금세대 전체에게 고운 시선이 갈 수는 없었다.

이런 규정의 변화로 황금세대는 아시아 선수권을 노릴 수 있게 됐다.

급히 시선을 돌리려는 협회의 수작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지영에게나, 친구들에게나 나쁜 쪽은 아니었다. 그 선발전이 7월에 열린다. 아시아 선수권은 8월 말이고. 따라서 황금세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강한결은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면 미련 없이 은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건 지영도 동의했다.

그랜드 슬램.

모든 스포츠인이 바라는 업적.

지영도 마찬가지였고, 그걸 이룩하고 나면 유도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의 무사님이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는 해도, 당장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성의를 생각해 미팅은 해볼 생각이었다.

이 작품을 읽고 지영은 다른 작품도 읽어봤다.

임은진이 따로 분류해 준, 자신을 모델로 캐릭터를 짠 작품들은 전부 읽어봤다. 하지만 그 어떤 작품도 나의 무사님만큼의 흥미를 주진 못했다.

그렇기에 지영은 일단 미팅은 해보고 싶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이성진은 다른 매니저분과 만나 더 런닝 방송사로 향했다.

“지영아, 너 오늘 안 내려갈 거지?”

“응. 미팅하고 유진 누나 보려고. 넌?”

“하하, 나도 껴주면 안 되나? 바로 내려가기 좀 그런데.”

“안 되기는. 이따가 끝나고 연락해.”

“오케이! 대신 저녁은 내가 산다! 유진 누나한테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두라고 해!”

“알았다. 미팅 잘하고. 이따 보자.”

“엉! 너도!”

텐션이 올라간 이성진이 떠나고, 지영은 미팅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로 가면서, 지영은 상당히 너저분해진 대본을 다시 꺼냈다.

나의 무사님 1화, 2화.

사실 나의 무사님은 아직 기획 단계도 못 올라간 작품이었다. 하지만 정은정 작가도 상당한 네임드 작가라서 지영이 하겠다고 오케이만 하면 단박에 연출이 붙고, 기획으로 이어진 다음 빠르게 제작 단계로 향할 것이다.

이는 이연이 확실하게 말해줬다.

지영이 오케이만 해주면 연출이랑 제작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하겠다고 대답하기가 꺼려지는 건, 역시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였다.

“지영아.”

“네, 누나.”

“너 작품 고민하는 거, 그거 선발전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했지?”

“네. 아무래도 시기가 겹치니까요. 작품 특성을 보면 여름에 제작되어야 하는데, 전 여름 내내 시합 준비를 해야 하잖아요.”

“그럼 그것만 조율하면 되는 거야?”

“음…… 아무래도요?”

임은진은 지영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 비장한 표정이 됐다.

“그런데 작품 내의 계절은 솔직히 못 바꾸지 않아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 계절에 맞춰 여러 가지 이벤트를 준비했을 테니까.”

“이벤트요?”

“응. 예를 들면, 노출신?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신 같은 거 있잖아. 옛날 시대극이니까 그런 장면으로 충분히 이벤트를 만들 수 있지.”

“음, 그렇겠네요.”

“왜, 노출은 별로야?”

“노출이요? 해봤자 상반신 정도잖아요?”

지영의 물음에 임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이상 나가면 큰일 나지. 지금이 어느 시댄데.”

“그럼 뭐, 딱히 문제는 없어요. 유도 선수는 어차피 상의를 안 입고 시합하는데요 뭐.”

지영의 대답에 임은진은 이번에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노출.

남자 배우든, 여자 배우든 꺼리는 장면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야 젊은 남자 배우의 노출은 거의 기본으로 나왔었지만, 요즘은 시대가 변하고 있어서 남자 배우의 노출도 신에 맞지 않게 억지로 끼워 넣으면 네티즌들의 분노가 폭발한다.

하지만 지영에게 상반신 노출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도 시합 규정에 남자 선수는 상의를 도복 빼고는 아무것도 입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의는 팬츠나 타이츠까지 허용된다. 여성 선수는 상의에는 흰색 면티까지고. 어쨌든 그래서 노출은 지영에게 일상이었다.

훈련할 때는 래시가드를 입고하지만, 시합 때는 당연히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상반신은 당연하게 노출된다. 그래서 지영은 노출에 대한 내성이 아주 강했다. 신에 어울리는 노출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노출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지. 뭐 이건 나중에 조율할 문제고. 어쨌든 일정만 맞으면 하고 싶단 얘기지?”

“네, 대본 재밌게 읽었거든요.”

“그래? 그럼 그건 내가 조율해 볼게. 나한테 맡겨.”

“네.”

임은진이 그렇게 호언장담해 주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30분쯤 더 달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아늑함을 가진 한옥 카페.

거기서 먼저 도착한 이연과 정은정 작가, 그리고 이연의 소속사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가볍게 자기소개가 오갔다.

소개가 끝나자 지영은 정은정 작가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은정 작가는 큰 특색이 없는 복장이었다.

청바지에 블라우스.

차분한 느낌의 단발.

수수한 화장.

다만 눈동자는 정말 초롱초롱한 게, 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걸 빼면 전체적으로 이 사람이 천재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느낌을 줬다. 그래서 상당히 편안했다.

“참 신기하다. 연출 맡아줄 분도 없이 작가, 배우만 이렇게 모여서 작품을 할지 말지 논의하다니.”

이연의 말에 지영은 그래요?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하하, 웃은 이연의 소속사 배우팀 팀장 한종석이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본래는 작가가 작품을 쓰면, 연출이 정해집니다. 연출이 작품을 기획하고, 편성을 따내는 과정에서 보통 주연 배우들이 섭외되죠. 이 작품의 주연은 이연과 강지영을 쓸 생각입니다. 이렇게 깔아줘야 편성이 쉽게 잡히니까요.”

“아아…….”

지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긴 했다. 실제로 예인도 연출을 맡을 감독님과 대본을 쓴 작가님이 같이 왔었다. 그때 이미 주연 배우들은 거의 결정이 되어 있던 상태기도 했다. 보통은 그런 순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작가와 배우들만 모였다.

이는 정은정 작가가 자신이 공들여 만든 캐릭터를 책임질 주연 배우 둘이 출연을 결정해 주지 않으면 아예 작품을 터뜨려 버리는 성격이어서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만나지도 않았을 거다.

본격적으로 대화가 흐름을 타자, 임은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설명했다.

“일단 지영이가 왜 출연 결정을 할 수 없는지부터 말씀드릴게요. 이번에 유도협회에서 규정을 약간 바꿨어요. 1차, 2차 선발전에 나가지 않았던 선수들도 3차 선발전 결과에 따라 이번 아시아 선수권 티켓을 가질 수 있게 됐어요. 지영이를 포함한 연희고 아이돌은 3차 선발전에 나갈 생각이고, 나아가 아시아 선수권에 도전할 생각이에요.”

임은진의 말에 다들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아시다시피, 지영이는 배우로서도 활동하지만, 실제 직업은 운동선수예요. 이는 지영이와 지영이 친구들 전체의 의견이고, 의견에 따라서 지영이는 아시아 선수권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나의 무사님 작품이 정말 좋아도, 시간 문제로 하겠다고 선뜻 대답할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지영이 그 말이 끝나고 사과하자, 이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정은정은 아니었다.

“대회는 언제 끝나는데요?”

“네? 아, 선발전은 7월이고, 여기서 출전권을 따내 아시아 선수권에 나가게 되면 본 대회는 8월 말이에요.”

“아…….”

“그럼 여름이 거의 다 지나가잖아요. 작가님 작품의 계절을 보면 여름으로 잡으셨던데, 지영이가 그때는 시간을 뺄 수 없거든요.”

“바꿀 수 있어요.”

“네?”

“바꿀 수 있어요. 가을과 겨울로.”

“…….”

“하겠다는 확답만 해주면, 다 뜯어고칠 수 있어요. 그런 거, 저한텐 안 어려워요.”

여태껏 조용히 듣고 있던 정은정의, 천재성이 묻어나는 단호한 말에 임은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지영은 이게 그녀가 책임지겠다고 했던 말이 이런 뜻이라는 걸 깨달았다. 유리한 포지션, 칼자루는 애초에 이쪽이 잡고 있었다.

지금 최고조의 인기를 자랑하는 연희고 아이돌.

그중 배우로서 이미 대중에게 눈도장을 쾅 찍은 지영은 지금 드라마 판 관계자들이 가장 잡고 싶은 배우 0순위였다.

이미 인지도가 충분한, 화제성 때문에 일단 한다고만 하면 네티즌들의 관심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끌 수 있는 검증된 카드가 바로 강지영이란, 이제 19살 된 운동선수이자 배우였다.

거기에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은 노력파 여배우 이연이 있고, 대본은 이쪽 바닥에는 천재로 이름난 정은정 작가였다.

과장 조금 보태서,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 없는 판이었다.

정은정은 지영과는 반대로 이야기에 목을 매는 성격이었다.

상상하는 걸 워낙에 좋아해서 시작부터 이연이란 뮤즈와 함께 네임드 작가로 성장한 케이스로, 투자자를 모으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게 바로 정은정 작가가 쓰는 대본이었다.

고집, 집착.

천재가 으레 가지고 있는 그 두 가지를 정은정 작가는 아주 심하게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풀어가지 못할 바에는 작품 자체를 폐기하기까지 하는 독종이었다.

‘알고 있었네.’

지영은 임은진이 그 부분을 알고, 이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품의 배경 계절을 여름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수정하길 원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지영이 여름에는 시합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로 슬쩍 돌려서.

정은정은 그런 임은진의 의도를 대번에 받았다.

극 중 배경을 가을에서 겨울로 바꾼다는 말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지영이 거절할 명분 자체가 사라진다. 그런데 이 자체가 지영에게도 좋았다.

‘아시아 선수권이 끝나면, 뭐 어차피 당분간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년에도 크게 뭐 없었고, 진짜 일정은 그 후년부터 시작된다. 줄줄이 세계선수권, 올림픽, 아시안 게임까지. 년마다 하나씩 전부 들어간다. 그때는 모든 활동을 접고, 그랜드 슬램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당장은, 말이다.

“어때요? 그렇게 하면, 제 작품에 나와줄 수 있어요?”

정은정 작가는 임은진이 아닌 지영을 향해 물었고, 지영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무사님.

지영은 아시아 선수권이 끝나면 그 이후엔 잠시, ‘재’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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