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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157화 (157/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57화

157화. 어린 독지가들(4)

지영은 대본을 잠시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누나,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응?”

“아니, 배우가 작품을 욕심내는 거야 당연하다고 들어서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배우는 저 말고도 많잖아요. 저랑 분위기, 느낌 비슷한 배우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거고요.”

지영의 말에 이연은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로 사정이 있는 것 같은 얼굴. 일단 그 사정이라는 걸 들어보고 싶었다.

“너는 정은정 작가. 아니, 은정 언니에 대해 잘 모르지?”

“네, 저는 잘 모르죠.”

“음, 그 언니는 딱 너랑 비슷해.”

“네? 저랑요?”

“응, 자기만의 세계가 아주 확실하게 있거든. 전형적인 천재. 정확히는 서건 캐릭터랑 비슷하겠네.”

“아…….”

뭔 말인지 이해가 갔다.

지영이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이연은 말을 이어갔다.

“그 언니는 작품을 쓸 때, 모든 캐릭터를 배역에 맞춰서 써.”

“…….”

“남자 주인공, 그리고 최소 두세 번은 등장하는 조연까지 전부. 자신이 보았던 배우들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써서, 그게 엇나가면 아예 작품 자체를 시작하지도 않아. 지영아. 원래 배우 캐스팅은 내 몫이 아니야. 감독이나 작가가 하는 거지.”

“어… 그렇죠?”

“그런데 내가 왜 뛰어다니고 있을까?”

“……설마 아직 연출이 정해지지 않았어요?”

“응. 이 대본, 나랑 너한테만 간 거야.”

“…….”

헐…….

이건 좀 충격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 중에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정말 그런 가보다.

“너랑 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지 않으면 애초에 연출을 맡을 사람한테 가지도 못해.”

“……그래서 계속하자고 했던 거였어요?”

“응. 나는 이 작품이 매우 마음에 드니까. 단순한 로맨스 사극은 아니니까. 그래서 꼭 해보고 싶어. 그리고 내 작품에 사극 자체가 없거든. 언젠가 해보고 싶었는데 은정 언니가 사극을 썼네? 그럼 어떻게 해. 꼭 해야지. 그런데 남자 주인공으로 놓고 쓴 네가 작품을 안 한다고 하니까 내가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거지.”

“…….”

이해했다.

지영은 나의 무사님 대본에 시선을 내리면서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끝끝내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파기. 은정 언니는 주연, 조연이 자신이 생각한 배우로 캐스팅되지 않으면 작품 안 해. 자기가 그렸던 세계가 깨지는 거거든. 그 언니는 그걸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고집 있네요?”

“끝내주게 많지. 그런데, 글은 너무 잘 써. 어쩌다가 내가 그 언니의 뮤즈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긴 한데. 가끔은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

부담?

“왜요?”

“천재의 비범함은 범재가 쫓아가지 못하니까.”

“…….”

이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언니는, 진짜 잘 써. 내가 그 언니 작품으로 배우로 자리 잡게 된 건 정말 고마운데, 그 언니 작품을 내 연기력이 부족해 잘된 작품 정도밖에 만들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하지. 은정 언니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긴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되니? 나 때문에 명작이 될 애가 좀 잘된 작품 정도로 끝난 건데.”

“다 잘되지 않았어요?”

“아니, 이전 작품 같은 경우는 최소 나의 아저씨 같은 명작으로 만들어야 했어. 그런데 그게 내 연기력 부족으로 결국 시청률이 잘 나온 작품 정도로 끝난 거야. 그래서 언니에게 항상 미안해, 난.”

“…….”

하아.

천재와 범재.

그 단어의 차이에서 나오는 괴리.

지영은 그걸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천재를 부러워하는 마음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 시기와 질투를 안 겪어본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제대로 하고 싶어. 그 언니는 글도 쓰고 싶을 때만 쓰거든.”

“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꽂혀야지만 쓴다는 소리야. 아마 이번에는 지영이 너 보고 꽂혀서 쓴 걸 거야. 대본을 봤는데, 1, 2화라지만 나보단 네가 더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아마 예인 서건을 보다가 꽂혀서 쓴 걸 거야.”

“…….”

천재가 묘사한 자신이라.

대본은 펼쳐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대본을 펼치면 느낌이 어째……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시나리오만으로도 이미 지영은 충분히 흥미를 느꼈었다. 그런데 대본을 보고 나면, 천재가 쓴 세상으로 그대로 납치당할 것 같단 생각에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한번 봐보긴 할게요. 대신 너무 기대는 마세요. 전 지금 연기보단 운동이 더 하고 싶으니까요.”

“아 진짜? 고마워!”

꾸벅 인사하는 이연.

고개까지 숙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지영은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정말 곤란스러웠다. 지영은 대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응? 벌써?”

“네, 잠깐 나온 거라서요. 가서 몸 풀어야 해요.”

“아, 그래! 고마워, 시간 내줘서. 그리고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고.”

“…….”

꾸벅.

괜찮다는 듯이 잠깐 웃어준 지영은 대본을 챙겨 그대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지영은 대본을 책상에 올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몸을 푼다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도복을 바로 입을 수는 없다고 했지, 운동 자체를 바로 할 수 없다고 한 건 아니었다.

땀복을 챙겨입은 지영은 오랜만에 트랙을 좀 달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친구들도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지영은 일단 한 바퀴를 걷기로 했다.

천천히 걸음을 떼보는 지영.

좋다.

역시 좋았다.

우레탄 소재의 바닥이 주는 쿠션감도 쿠션감이지만, 서늘한 봄 공기와 예열을 시작했다는 걸 아는지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하며 주는 고양감이 더욱 좋았다.

한 바퀴를 걷는 동안 친구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성진이 가장 앞이고, 그 뒤로 강한결과 임효중, 황석이 서 있었다. 지영은 가장 뒤로 따라붙었다.

지영이 붙자 이성진은 속도를 조금 늦췄다.

아직 러닝을 시작하지 않은 지영이 오버페이스가 되지 않게 충분히 예열될 때를 기다려 주기 위한 페이스 조절이었다.

이런 센스.

말하지 않아도 착착 맞춰주는 저 센스는 정말이지 발군이었다.

그렇게 1바퀴, 2바퀴, 3바퀴를 뛰고 나서 다시 페이스가 올라갔다.

예열이 끝났고, 열기가 피어나기 시작한 육체.

혈관을 타고 피가 돌자 그간 제대로 운동하지 못해 몸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화르르, 불타버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식단 조절을 하고, 몰래 숙소에서 웨이트를 하긴 했다지만 솔직히 지영은 그런 근력 운동보단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았다.

5바퀴, 10바퀴.

순식간에 10바퀴를 뛰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아주 익숙했던 러닝인데, 그간 하지 못해서 그런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는데도 지영을 포함한 모두의 눈빛에는 미소가 그득했다.

좋았다.

정말 그저 좋았다.

흐르는 땀이, 스쳐 가는 바람이, 뛰는 심장이 그래! 이거지!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총 20바퀴를 뛰고 나서야 페이스를 늦추기 시작하는 이성진.

헉헉! 거리며 달리던 지영도 그 페이스에 맞춰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20바퀴. 솔직히 이 정도면 무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몇 달이나 쉬었는데 갑자기 20바퀴를 뛰면, 몸이 퍼지다 못해 오버페이스로 터질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이렇게 달릴 수 있었던 건 페이스메이커의 능숙한 속도 조절 때문이었다.

무리가 온다 싶을 때는 늦추고, 심장이 진정되면 다시금 속도를 올리고. 이렇게 조절했기에 뛸 수 있던 거지, 아니었으면 20바퀴는커녕 10바퀴 조금 넘어서 바로 퍼졌을 거다.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는 지영과 친구들. 그리고 뒤늦게 합류해서 같이 뛴 후배들.

그런 지영과 친구들을 저 멀리서 기자들이 찍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천천히 하나씩, 어차피 이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제 눈치는 그만. 예전처럼 당당하게 사는 거다.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자, 밀어 올리기 준비!”

제대로 뛰기 시작할 때쯤 교무실에 갔다가 코치를 하러 나온 임대성 코치의 외침에, 지영은 바로 친구들과 원을 만든 다음 엎드렸다.

“첫날이니까 가볍게 200개. 시작!”

“네! 하나! 둘!”

셋! 넷!

삼십! 사십!

백! 백오십!

밀어 올리기는 그래도 할 만했다.

숙소에서 몰래 하는 운동 중, 가장 주력이 되었던 게 밀어 올리기와 윗몸일으키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밀어 올리기, 버피테스트, 3단 뛰기, 쪼그려 앉아 뛰기 등으로 체력운동을 한 지영은 스트레칭을 하고 들어와 씻고,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많이 먹었다. 닭가슴살이나 샐러드는 이제 안녕이었다.

시합도 넉넉하게 남았고 운동도 시작했으니 식단 자체를 할 필요가 없었다.

“크으……! 이거지! 이거!”

제육볶음을 입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이성진이 환희에 차 한 말에, 다들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 가끔, 간이 센 요리를 먹긴 했었다. 지영도 사람인데 어떻게 몇 달간 이런 식단을 계속하겠나.

하지만 몰래 먹는 거라서, 양껏 먹을 생각은 거의 못 했다.

쉬는 기간 제일 조심했던 건 바로 체중이었다. 지영의 평체는 80 전후. 여기서 더 주는 건 괜찮아도 찌는 건 절대로 안 돼서, 매일 자기 전에 체중계에 올라가 체중이 80 이상 훌쩍 넘어가지 않게 철저하게 관리했다.

워낙에 기초대사량이 높아서, 매일 같이 금방 허기가 졌지만 그래도 이 악물고 식단 조절로 버텨왔는데, 이제는 그것도 안녕이었다.

오후처럼 운동하고 제대로 먹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더 망가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허겁지겁, 정말 조금이라도 늦으면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녁을 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포만감이 가득 느껴졌다.

수다를 떨다가, 숙소로 돌아온 지영은 잠이 솔솔 왔지만, 세수와 양치로 졸음을 쫓아냈다.

지금 시간에 자면 새벽에 잠이 안 올 거고, 그럼 흐름이 대번에 깨질 수도 있으니 졸려도 참아야 했다.

다행히 지영은 이런 쪽으로는 익숙해서 금방 졸음을 이겨 내고, 책상 앞에 앉았다.

복습 시간.

항상 저녁 먹고 하는 루틴이었다.

복습을 끝내고, 잠시 휴식 시간이었다.

친구들과 거실에서 드라마도 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 지영은 그제야 나의 무사님 대본을 손에 들었다. 이연에게 본다고 했다. 그러니 지영은 보긴 볼 생각이었다.

이연이 인정한 천재, 정은정 작가가 쓴 대본.

지영은 읽기 전에 정은정 작가의 작품을 찾아봤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이연이 주인공을 맡았다. 시청률도 항상 나쁘지 않았다. 그런 정은정 작가에 대한 평은, 어렵지만 재밌는 글을 쓰는 작가. 정도였다.

지영은 그런 평을 뒤로하고, 대본을 넘겼다.

1화.

사락, 사락. 사락.

종이는 계속해서 넘어갔다.

종이가 넘어갈수록 지영의 머릿속엔 하나의 세계가 서서히 형체를 갖춰갔다.

둥그런 원에, 배경이 깔렸다.

극 중 멸망한 왕국은 선.

선 왕조를 멸망시킨 나라는 후.

선과 후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왕족 연.

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활로를 뚫은 재.

겨우 살아남은 연과 재는 자신들처럼 가까스로 탈출한 망국의 병사들을 규합해, 척박한 땅에서 나라를 다시금 세웠다.

진.

진을 이끌기 시작한 연을 죽이려는 후.

그런 연을 지키기 위해 다시금 목숨을 거는 재.

지영의 머릿속에서, 연과 재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은 이연의 얼굴과 같았고, 재는 자신, 강지영의 얼굴을 닮았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 트레이닝은 지영의 특기였다.

상대를 설정해 시합 전체를 심상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는 정도인지라, 대본이 보여주는 세계를 너무나 빠르게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대본은 예인의 대본과는 달랐다.

연기 초심자인 지영을 배려한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스타일인지 모르겠지만 흐름이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1부터 10의 순서로, 고스란히 이어져서 머릿속에 그리는 게 너무나 편했다.

1화를 금방 다 읽고, 2화를 저도 모르게 펼쳐 들었다.

사락, 사락, 사락.

방 안에는 종잇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하지만 지영의 머릿속은 치열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세계에서 연을 지켜야 하고, 목숨을 걸고 지킨 연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재의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그런 재를 사모하는 또 다른 여인의 등장에 한숨을 내쉬고.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지영은 치를 떨다가, 2화가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그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하…….”

미열이 깃든 탄식이 지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영은 깨달았다.

왜 이연이 정은정이라는 작가를 천재라고 지칭했는지.

또한 지영은 정은정 작가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도 깨달았다.

하나의 세계를 머릿속에 구현해, 그대로 플레이시킨다. 그 안에 자신이 넣은 설정과 인물을 배치해 둔 채로.

사랑, 연민, 우정, 배신, 전쟁.

창조주처럼 하나씩, 정은정에 그 세계에 ‘말’ 하나를 툭툭 던진다. 그리고 그걸 그저, 글로 풀어냈을 뿐.

천재의 영역에서 피어난 글.

지영은 그걸 깨닫는 순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가 되고 싶어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

밤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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