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56화
156화. 어린 독지가들(3)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역시 도복을 입는 거였다.
체력, 도복, 근력 운동으로 보통 나누는데 연희고는 정규수업을 전부 듣기 때문에 언제나 오후 도복 운동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도복 운동 시간은 다른 선수들보다 좀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마저도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야 하는 상황 때문에 몇 달이나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론이 완전히 뒤집혀 이제는 어린 독지가들을 칭송하는 단계인 지금도, 아직은 도복을 입을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대감 때문에 기분은 정말 좋았다.
기분 좋은 설렘.
그런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흘러 다니고 있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부유감이 들었다.
그런 기분 좋은 느낌이 주말 내내, 지영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월요일이 되고, 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성진아. 그럼 더 런닝 다시 출연하는 거야?”
쉬는 시간.
친구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 친구들은 참 신기한 게, 연희 스포츠의 실질적인 주인이 강한결과 강지영이라는 게 밝혀졌고, 그렇게 빡세게 하루를 보내면서도 후원까지 했다는 사실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이 친구들은 거기에 대해선 굳이 묻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방송 쪽 활동을 더 궁금해하고 있었다.
“더 런닝? 아직 잘 몰라. 일단 연락은 와서 다시 복귀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주긴 했는데. 회사랑 조율해 봐야 할 것 같아.”
“진짜? 그럼 나갈 수도 있는 거네?”
“응. 어쩌면?”
이성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실제로 친구들은 황금세대 말고, 연희고 아이돌로 활동하는 걸 더 좋아했다. 유도 시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보다, 드라마나 영화에 들어가는 걸 훨씬 더 선호했다.
나 연예인이랑 친구다!
하면서 으스댈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게 얼추 맞을 것 같았다.
한 친구가 이번엔 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영아. 넌 드라마 또 안 해?”
“드라마?”
“응! 서건 진짜 멋있었는데! 너랑 진짜 잘 어울렸거든!”
“아, 고마워. 그런데 난 아직 모르겠어. 뭘 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아마 가장 뒤 순번이 아닐까 싶어.”
“어, 왜?”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들.
어차피 다시 움직일 수도 있다고는 이미 방송가에 소문이 났다. 토요일 늦은 저녁, 더 런닝 제작진 측에서 낸 기사가 떴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좀 더 차분하게 기다리는 게 먼저였다. 곧장 움직이면 이 상황을 노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런닝이 그냥 기사를 올려버렸다.
그 의도는 빤했다.
상황이 반전됐으니, 다시 이성진을 정식으로 캐스팅하기 위한 절차를 먼저, 혼자 풀 악셀을 밟아버린 것이다. 아예 공식적으로 만들기 위해. 더 런닝은 정말 많은 사랑을 받는 장수 프로그램이고, 공중파 예능 중에서도 탑 순위권에 들 만큼 시청률과 인지도가 높았다. 국민 MC가 진행하기도 하고, 출연자들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더 런닝에서 아예 접촉을 시작했다고 하니, 연희고 아이돌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는 게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더 런닝 측엔 따로 연락해 양해를 구한 다음, 비즈 인터내셔널에 공식적인 입장을 올렸지만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이제 기레기들이 공격 못 하니까 다시금 활동하자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 결과 일요일 저녁, 다시금 더 런닝 측과 조율 중이라는 공식 기사를 내보냈고 연희고의 행보가 공식적으로 재차 시작됐음을 선포했다.
그렇기에 이성진도 조율 중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영도, 친구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말해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성진이 일정 정해지면 한결이랑 효중이도 준비해야 하거든. 걔들은 원래 하던 거 스톱됐던 거니까. 나는 아예 일정이 없었고.”
“아 진짜? 그런데 그럼 하긴 할 거라는 소리지?”
“좋은 작품 있으면.”
“오예! 난 석이 영화도 재밌게 봤긴 했는데 그래도 지영이 네 연기가 정말 재밌었거든.”
“하하, 고맙다. 그래도 석이, 500만이나 나온 영화 조연인데, 서운해하겠다.”
“앗, 비밀로 해줘.”
혀를 내밀고 귀엽게 웃는 반 친구 한소진.
어디서 애교 질이야! 하면서 옆에 있던 친구가 등짝에다가 스매싱을 짝! 소리가 나게 던졌고, 또 악! 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둘이 티격태격했다.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보통 이 나이면 시샘도 하고 그럴 텐데.’
얘들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친구니까, 지켜주려고 사력을 다해 감싸줬다. 조금의 시기 질투도 없이 이러는 게 참 쉽지 않은데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지 지영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런 친구들과 함께 수업받고 숙소로 가는데, 전화가 왔다.
번호를 보는 순간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연 누나.
이 누나,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끈질김에 이제는 조금씩 포기하는 마음이 생기려 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연기보단, 운동이 하고 싶었다.
“네, 누나.”
-기사 봤어. 너 진짜 대단한 애였구나?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그보다 어쩐 일이세요?”
-내가 너한테 연락한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겠어?
“저 아직 생각 없어요.”
-아직?
“…….”
아차…….
말실수했다.
-너 좀 전에 아직이라고 했지?
“아니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나 폰에 자동 녹음 기능 있는데, 이거 틀어볼까?
“……했습니다.”
-후후, 그리고 자동 녹음은 뻥. 그런 걸 어떻게 깔아? 폰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아 진짜. 이 양반이…….
이연에게 낚였다는 사실에 지영은 한숨을 내쉬고는, 또박또박, 확실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 당분간 생각 없어요.”
-시나리오 봤어? 아, 맞다. 대본도 2화까지 나왔거든. 온 김에 주고 갈게.
진짜 마이페이스다.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영 나이 또래에, 혹은 그 이상 중에 자신만큼 연기하는 사람은, 아니, 자신보다 연기 잘하는 사람은 쌓이고 쌓였다고 생각하는 지영이었다. 실제로 지영은 한동안 연기는 아예 연습조차 한 적이 없었고, 이전의 감각은 전부 녹슬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집착하니, 그걸 이해 못하겠는 지영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중요한 뭔가를 들은 것 같았다.
“네? 온 김에요?”
-응, 나 교문 밖. 대전에 일 있어서 내려왔다가 지금 연희고 앞이야.
“……여길 왜 왔어요?”
-너 꼬시러.
“와, 누나 진짜…….”
-왜, 정성이 갸륵해?
“그러겠습니까? 좀 기다려요. 옷만 갈아입고 갈게요.”
-응, 얼른 와.
전화를 끊은 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도복을 입을 수는 없어서, 오후는 어차피 개인 시간이다.
그리고 그건 이번 주가 끝. 다음 주부터는 아마도 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그전에 이 문제도 정리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무사님.
시나리오는 분명 재밌었다.
지영이 받은 많은 시나리오 중에서도 정말 순위권에 들 정도로.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지영은 유도가 하고 싶었다.
연기 말고, 당장은 운동만 죽어라 하고 싶었다.
몇 달간 몸을 안 써서 답답함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래서 당장은 연기 말고, 운동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맞아.’
마음 편히, 이제는 정말 그 어떤 스트레스도 없이 땀만 흘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연을 반드시 체념시켜야 했다. 갑작스럽게 생긴 미션. 지영은 숙소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는 전의를 다졌다.
“어디 가?”
먼저 와 있던 강한결의 말에, 지영은 이연을 잠깐 만나러 간다고 대답하고는 다시 숙소를 나섰다.
정문 앞에 나가는데 애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저 누나가 진짜.”
웅성웅성.
꺄아아아!
누나 예뻐요!
저런 소리를 들으면 왜 애들이 저러고 있는지 이유는 명백했다.
그래서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교문으로 향했다.
역시나 예상이 벗어나지 않았다.
새빨간 포르쉐를 타고 온 이연이 아이들에게 사인해 주고 있었다.
매니저도 없이 혼자서.
하여간 여러 가지 면에서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는 지영.
“언니 너무 예뻐요! 여배우 같아요!”
“너 사인 도로 내놔. 언니 여배우 맞거든?”
“에헤헤! 농담이에요!”
“이 쪼그만한 게?”
“근데 언니, 여긴 왜 왔어요?”
“나? 강지영 잡으러.”
“지영이요? 지영이는 왜요?”
“아니, 얘가 내가 작품같이 하자고 몇 달째 조르고 있는데, 계속 거절하잖아. 그래서 아예 결판을 지으러 왔지.”
“어 진짜요?”
우와…….
지영이 대박이다.
“지영이 왜 안 한다는데요?”
“몰라, 그냥 운동하고 싶다나 뭐라나. 그런데 이 작품, 진짜 재밌거든. 지영이가 맡을 캐릭터도 정은정 작가님이 걔 생각하면서 조형해서, 다른 사람 주지도 못해.”
“헐. 그럼 지영이가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엎어지는 거지 뭐.”
“히잉, 아깝다……. 지영이 연기 더 보고 싶은데.”
“나도 그래. 호흡도 잘 맞았고. 타고난 센스가 있어서 지켜보는 맛도 있고. 후후.”
“그래요?”
“응. 운동만 천재인 줄 알았는데, 연기도 천재더라.”
이연의 말에 우와…… 하는 탄성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지영은 가만히 있으면 아주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금칠할 것 같아서 슬그머니 개입했다.
“누나.”
“어! 지영이 왔네? 안녕?”
“하아…… 네, 안녕하세요.”
꾸벅.
지영이 한숨을 내쉬며 인사를 하자, 이연이 애들을 돌아보며 지영을 성토했다.
“봤지? 봤지 봤지? 쟤 나 엄청 귀찮아하는 거. 내가 이연인데, 쟤한텐 이런 대접 받고 산다. 진짜. 언니 불쌍하지 않니?”
“네! 불쌍해요! 그런데 지영이 원래 그래요. 호호!”
“그래? 못된 애네?”
후우, 참자.
이연의 장난기야 이미 촬영장, 회식 때 충분히 겪었다.
이연보다 정신연령이 높은 어른으로서, 여기서 넘어가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툭툭.
“야, 탈래?”
“어느 시대 오렌지족이에요?”
“21세기 오렌지족. 일단 타. 애들도 있고. 근처에 카페 있던데 거기 가서 얘기하자.”
“……네.”
후우.
찰칵, 찰칵.
저 멀리서 매의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기자가 사진을 찍는 게 보였다. 솔직히 예전이었다면 스캔들을 걱정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기사를 냈다간 무지막지한 역풍을 각오해야 한다. 이연이 어떠한 이유로 왔는지는, 여기 있는 친구들이 다 증명해 줄 테고 말이다. 그래서 스캔들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차에 올라타자, 꺄아아! 우와와! 감탄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이연은 곧 차를 출발시켜 카페로 향했다.
“누나는 지금 행동으로 마이너스예요, 이제.”
“헐, 청춘엔 이런 이벤트가 직격 아니야?”
“적어도 저는 아니에요. 이런 거 정말 싫어요.”
“이런, 미안해.”
지영의 조용한 말에 담긴 기색을 느꼈는지 이연이 얼른 사과했다. 그 사과에 진심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돌렸다.
‘주도권은 잡고 가야지.’
원래 이런 캐릭터라는 걸 알고 있어서, 솔직히 그냥 넘어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지영은 주도권을 잡고 싶었다. 끈질기게 자신을 설득하는 이연. 지영이 아무리 말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주도권을 잡아서 대화를 유리하게 풀어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잘 먹혔는지 이연은 힐끔힐끔, 눈치를 봤다.
그런 상태로 조금 더 달려 카페에 도착했다.
시간이 시간이고, 장소가 장소라 그런지 손님은 거의 없었다.
“뭐 마실래?”
“저는 그냥 물 마실게요. 요즘 살이 좀 쪄서.”
“그래? 알았어, 그럼.”
이연은 하나만 시키기 뭐하나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고, 지영은 그냥 잔에다가 물만 따라와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이연은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 지영에게 밀었다.
나의 무사님 1화, 2화.
겉표지에는 면사포를 쓴 옛 시대극 복장의 여인과 챙이 넓은 갓을 쓴 무사가 그려져 있었다.
아직 제작이 결정되지도, 캐스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상당히 신경을 쓴 대본이었다.
지영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