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46화
146화. 2022 전국체전(5)
후.
짧게 숨을 몰아쉰 지영은 장성훈을 직시했다.
뚝, 뚜둑. 목을 풀면서 장성훈도 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장은 170 초중반. 아마 2나, 3 정도일 거다.
체형은 딱, 전형적인 유도 선수였다.
지영처럼 신장이 체급에 비해서 확 크지도 않고, 최준상처럼 작고 땅땅한 편도 아니었다.
안호진.
그래, 안호진과 딱 비슷했다.
유도 선수로서는 딱 이상적인 체형.
크지도 작지도 않고, 전체적인 밸런스가 딱 잡힌, 그런 선수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무난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뭐, 잡아보면 알겠지.’
후.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신기하게 이성진이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소란스럽게 응원하더니 지영 차례가 되자 반대로 고요해졌다.
하지만 지영은 이런 고요함이 좋았다.
소란스러움보다는, 이런 고요함이 시합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심판이 들어오는 걸 보며 마지막으로 전략을 되새겼다.
‘조심해야 할 건 굳히기. 그리고 깜짝 기술.’
이전 시합에서 워낙 보여준 게 많이 없다 보니 정보가 많이 없었다. 그러니 깜짝 들어오는 기술과 이우진을 한 번에 누르기 한판으로 제압한 굳히기를 최우선으로 조심하기로 했다. 그리고 시합 스타일은 딱 봐도 지저분하진 않은 것 같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큼, 주심이 자리를 잡고 손을 올리는 순간, 지영은 인사를 하고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그와 비슷하게 인사하고 입장하는 장성훈.
후.
짧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인사.
그리고 한 발자국 다시 앞으로.
준비가 끝났다.
심판이 두 선수의 얼굴을 한 차례씩 바라보더니, 하지메! 시합을 시작시켰다.
악!
아!
짧게 기합을 내지른 지영은 특유의 자세로 천천히 다가갔다. 장성훈은 오른쪽 자세였다. 지영이 제일 선호하는 자세였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옛날에는 주특기 기술 자세만 막아도 반은 먹고 들어갔지만, 요즘은 거의 대 대수의 선수들이 좌우를 다 찰 줄 알고, 다 업을 줄 알았다. 그러니 지영은 자세에 집중하되, 반대쪽 기술도 염두에 두기로 했다.
슥, 손이 나왔다.
가볍게 뻗어보는 손.
지영은 그 손이 가슴 깃에 반쯤 왔을 때 손을 같이 뻗었다. 그리고 잡고 채는 순간 슬그머니 따라가서 어깨 깃을 잡았다.
잡았다.
지영 특유의 방어유도 포지션에서 가장 먼저 잡아야 하는 어깨 깃을.
다른 선수들에게는 아니겠지만, 지영은 이 어깨 깃을 잡으면 매우 많은 이점을 확보했다.
일단, 등판 깃을 잡는 것보다 상대를 끌거나, 미는 건 약하지만 거리를 확보하기 아주 좋다. 그리고 거리가 생기니 상대의 기술을 방어할 수 있는 공간 확보도 가능하다. 또한 상대가 밀고 들어오면 어깨를 안쪽으로 밀어 막거나, 돌아 나오면서 발기술을 거는 것도 용이했다. 그리고 가슴 깃이나 소매 깃을 잡게 되면 허리 기술을 차기 아주 좋은 자세가 된다.
이런 이유로 지영은 어깨 깃을 잡는 걸 매우 선호했다.
공격과 방어.
저울에 올리면 방어에 좀 더 치중되는 자세긴 하지만 어쨌든, 지영은 이렇게 잡은 다음 시합에서 딱 한 번, 신지에게 절반을 빼앗겼던 적을 빼면 넘어가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선수들은 어깨 깃을 잡는 게 애매해서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지영에겐 이게 베스트였다.
툭.
잡생각은 그만하라는 것처럼.
제대로 걸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기술이었던 만큼 장성훈의 발바닥은 지영의 발목 언저리를 툭 치고는 물러났다.
하지만 이는 신호였다.
제대로 몸을 쓰겠다는 신호. 그 신호를 알아차려 그런지, 몸이 대번에 반응했다. 툭, 툭. 가슴 깃을 한 번씩 채면서 감을 잡아보는 장성훈. 아마 머릿속에는 어떤 타이밍에 업어야 될까? 어떻게 업어야 굳히기로 끌고 갈 수 있을까? 이걸 위해 육체의 리듬을 조정하는 중일 거다. 틀에 박힌 기술은 먹히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장성훈도 알 테니, 지영을 곤란하게 하려면 남은 건 변칙 기술뿐이었다.
하지만 변칙 기술 자체가 많이 사장되어 지금은 잘 쓰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일본은 변칙 기술 자체를 선호하지 않았다.
정석을 가르치는 게 일본 유도이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악착같이 상대를 넘기는 방향에 치중된 한국은 변칙 기술에 강했지만, 몇 번의 룰 개정으로 인해 많은 기술이 사장됐다.
심지어 배대뒤치기도 금지됐다가, 얼마 전에 부활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변칙 기술은 패스.
그렇다면 어떤 기술을 걸어올까?
‘자세로 보면…….’
업어치기다.
이 자세에서, 가장 빠르고 위협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술은 업어치기와 발기술 한두 개 정도다. 하지만 다리가 짧고, 거리가 상당한 상태라 무리한 발기술은 지영에게는 아주 맛좋은 먹이였다.
그리고 아무리 일본에서 왔어도 신지와 자신의 시합을 봤을 터, 그럼 자신이 카운터를 잘 친다는 것쯤은 분명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럼 선택지가 줄어든다.
남은 건 업어치기.
업어치기로 중심을 무너트려 엎드리게 만들고, 그 상태에서 굳히기로 연결. 아마 장성훈의 머릿속에 있는 베스트는 이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안 업혀주면 된다. 업히더라도, 바닥에 깔리는 상황만 피하면 된다.
자신을 굳히기로 잡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영은 이걸 반드시 피해야 했다.
지영의 그런 생각이 끝나는 순간, 툭! 가슴 깃을 채면서 반 박자 빠르게 말아업어치기를 걸어오는 장성훈. 하지만 지영의 반응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기술이 들어오는 순간, 마치 짠 것처럼 상체를 슥 숙이며 매트를 남은 손으로 짚고 빙글 앞으로 돌아나갔다. 업어치기는 그래도 상대가 등에 업혀야 위협적인 기술이었다. 그런데 몸을 다 돌리기도 전에 앞으로 빠져나가니, 기술이 제대로 걸릴 리가 없었다.
앞으로 돌아 나온 지영은 바로 왼발을 상대의 가슴에 붙이며 오른손으로 가슴 깃을 잡고,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엎드린 자세에서 장성훈이 하체에 힘을 바짝 주더니 버티기 시작했다. 서 있는 자세에서 끄는 게 당연히 훨씬 더 유리한데도, 코어가 얼마나 단단한 건지 조금 들썩이는 정도에서 멈추는 장성훈.
이는 굳히기 자세에서 버티기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었다.
‘이러니 이우진이 한 방에 갔지.’
아마 몸이 돌아간 순간부터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단단한 힘으로 붙잡고 있으니, 빠져나가지 못한 게 너무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지영은 괜히 힘쓰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맛테!
그러자 심판이 그쳐를 선언했고, 지영은 도복을 고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걷는 도중 다시 떠오르는 생각.
‘넘기기도 쉽지 않겠어.’
생각보다 중심이 진짜 좋았다.
제대로 찍어 차도 버텨낼 정도로 말이다.
‘그럼 신지는 어떻게 공략했지?’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신지와 붙어서 전부 깨졌다고 들었다.
한 번 잡아봤지만, 확실히 신지 급은 아니라는 느낌은 있었다. 미야모토 신지는 일단 잡아보면 확실히,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주는 선수였다. 한 치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되는 상대. 어? 하는 순간 경기장 천장을 보게 만들어주는 존재.
그런 신지보다는 확실히 약하다는 느낌은 있는데, 그냥 궁금해졌다.
이런 장성훈을 어떻게 공략해서 이겼는지. 신지는 감각적인 유도를 하지만 그렇다고 본능에 전부 의지하지는 않는다.
본능만 살아 운동하는 선수는, 이성이 날카로운 선수의 먹잇감이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미친 피지컬이 아니라면, 동급의 실력이라도 본능보다 이성에 편을 들어주는 지영이었다.
신지는 이성 또한 날카로운 선수였다.
그러니 분명 제대로 된 공략법을 가지고 장성훈과 붙었고, 전부 승리를 했을 거다. 지영은 그게 궁금해졌다.
물론, 지금 당장 알려줄 사람도 없고 알려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새까만 어둠.
그곳에서 빛이 난다면 공략법. 즉, 정답이리라. 그걸 찾아가는 재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메!
자, 잡생각 그만하고 시합에 집중해라!
호되게 그리 질책하는 것처럼 심판이 하지메를 외쳤다.
두 선수는 이제 기합을 생략하고 다시 붙었다.
이번에도 장성훈은 가슴 깃을 빠르게 잡았고, 지영도 좀 전처럼 어깨 깃을 잡았다. 다만 처음과 다른 게 있다면 지영의 움직임이 조금 더 많아졌다는 것 정도?
지영이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는 당연히 반칙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방어유도의 핵심 중 하나인, 반칙 관리에 들어선 거다.
툭, 돌아 나오면서 발목받치기.
지영이 자주 쓰는 기술이다.
중심을 흔들기 아주 좋고, 다리 잡기가 사라진 지금은 되치기에 걸릴 염려도 매우 적은 기술이었다. 워낙에 신장이 크고 크게 원을 돌아 나오면서 당겼기 때문에 약간의 원심력마저 더해져 장성훈의 상체가 쭉 달려왔다.
상체가 끌려온 틈을 타 지영은 다시 중심을 잡고 바로 손을 뻗어 장성훈의 가슴 깃을 잡았다.
지영의 팔이 워낙에 길다 보니, 어깨와 가슴 깃을 잡고 단단하게 받쳐놓자 장성훈은 바로 수세에 몰렸다.
단순히 잡기 싸움에서 우위를 잡은 거지만, 이것만으로도 좀 전 장성훈의 업어치기를 상쇄시킬 수 있었다.
옛날에야 기술을 걸거나, 상대를 몰아붙이는 게 우세를 잡는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좀 더 복합적으로. 무작정 상대를 미는 것도 반칙의 하나로 볼 정도로 룰이 다양하게 변화했다.
하지만 지금 지영처럼 상대의 목과 상체를 제압해 놓고, 간을 보면 확실한 우세로 본다.
장성훈은 상체를 숙여 기술을 막기 위한 수비 자세고, 지영은 기술을 찰까 말까 고민하는 공격 자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좀 전 장성훈이 유효기술은 아니더라도 먼저 선공을 했던 이점은, 깨끗이 지워졌다.
맛테!
역시나 그쳐.
자리로 돌아가면서 시간을 확인하는 지영.
벌써 1분 30초가 지나 있었다.
남은 시간은 그럼 2분 30초.
금방 시간이 지난 것 같고, 이 상태라면 시간이 다 지나도록 승부가 안 날 것 같지만 유도 경기는 사실 연장전까지 가는 경우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보통은 다 4분 안에 승부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도는 누르기를 빼고는 한판이 나오는 데 길어야 2, 3초면 충분했다. 기술에 걸리고 빠르게 넘어가면 1초로도 충분했다.
그런 만큼, 2분 30초는 아주 넉넉한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메!
다시 시작된 시합.
지영은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장성훈과 다시 맞붙었다. 그런데 장성훈의 스타일이 조금 변했다. 먼저 가슴 깃을 잡지 않고, 지영이 손을 뻗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손을 뻗자, 바로 손을 툭 쳐냈다.
‘이제 와 잡기 싸움?’
뭔가, 지금처럼 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하지만 전략을 바꾼다고 그게 꼭 좋은 쪽으로 작용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영이야 상대에 따라 자세부터 전부 갈아치우고 다시 짤 수 있을 정도긴 하다. 상대에 맞춰서 시합하는 게 워낙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이건 평소에도 확실히 연습이 되어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지영은 그런 연습이 차고 넘쳤다.
심지어 자신보다 강한 임효중, 강한결, 황석과 연습을 했으니 차다 못해 넘친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럼 장성훈은 그런 연습이 되어 있을까?
‘보면 알겠지.’
어쭙잖은 실력으로 괜히 그러는 거라면, 아마 크게 후회할 거다.
쳐내고, 또 쳐내고.
지영이 뻗는 손을 쳐내고 어떻게든 먼저 잡고 털려는 노력이 보였다. 하지만 지영은 애초에 잡기 싸움을 선호하지 않아서, 장성훈이 두 번 정도 손을 쳐내자 아예 어깨를 쭉 빼줬다. 그러곤 손을 뻗지 않았다. 먼저 잡으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장성훈이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손을 뻗어 가슴 깃을 잡고 그대로 당겨 안뒤축을 쳤다. 그러나 지영은 중심이 앞에 있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 번 더 툭 쳐오는 장성훈. 같은 기술을 두 번이나, 이렇게 티 나게? 지영은 노리는 발을 슬쩍 들어 올려 빠르게 역으로 장성훈의 발을 확 때렸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읏기. 기울이기 단계는 건너뛰었지만, 워낙 창졸지간 빠르고 세게 때린 거라 장성훈이 몸이 아래로 마치 빨려가는 것처럼 내리꽂혔다.
쿠웅!
그 타이밍에도 용케 몸을 틀었는지 등이 아닌 어깨로 떨어졌고, 심판은 장성훈이 넘어간 걸 자세히 보다가 손을 가로로, 그리고 일자로 쭉 폈다.
와자리!
자신이 봤을 때도 절반 정도로 들어간 것처럼 보여서 지영도 딱히 불만이 없었다.
한순간.
실수였는지, 아니면 다른 노림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한 번에 승기는 단번에 기울었다.
맛테 신호에 일어난 장성훈이 표정은 처음과는 다르게 확실히 굳어있었다. 반면 지영은 차분했다. 장성훈. 다 좋은데 이 친구는…….
‘시합 운용이 별로네.’
지영은 신지가 장성훈을 어떻게 공략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친구는 시합이 자신의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면, 알아서 무너지는 스타일이었다.
힐끔.
남은 시간은 이제 2분.
하지메!
지영은 전략을 바꾸지 않은 채, 다시 빠르게 다가오는 장성훈을 차분하게 상대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장성훈을 상대하는 모습에 관중들은 침묵했고, 선수들이나 관계자들은…… 질린 표정이 됐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격.
격의 차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