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44화
144화. 2022 전국체전(3)
방송 중계가 끝난 뒤 시작된 준결승.
모든 대회가 그렇듯이 4강. 즉, 준결승부터는 공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1, 2회전은 잘만하면 입상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섞여 있지만, 준결에 오른 선수들은 전부 실력자들이기 때문에 운에, 요행에 기대지 않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선수들이기 때문이었다.
악!
하아!
그래서 하지메! 소리에 맞춰 나오는 기합에는 각오가 단단히 스며 있었다.
55도, 81도 연희고가 출전하지 않았다.
55에 출전한 충북 대표는 이미 떨어졌고, 81은 임효중이 두 번째 경기에 나서기 때문이었다. 55도 그렇고, 81도 치열했다. 이미 준결승까지 온 네 명의 선수는 카메라 앞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자신의 기량을 정말 제대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투지. 혹은 투혼.
지영처럼 이마가 커팅 당했는데도 붕대를 감고, 시합에 임했다. 첫 게임부터 그렇게 파이팅이 넘치다 보니, 체육관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55, -81 준결승 첫 게임에 들어간 선수들이 둘 다 울산시 대표 선수들이라 응원의 열기는 더욱 컸다.
“한호연 파이팅! 이겨라!”
“이준 파이팅! 이준 파이팅!”
한호연과 이준.
울산 문현고 소속 두 선수를 향한 응원. 지역이 지역이다 보니 응원 버프가 상당했다. 이런 응원은 시합 중인 선수들의 귀에도 들어가고, 선수에 따라 다르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오히려 집중이 안 되지만, 보통은 이런 응원이 더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지.’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열띤 응원이 분명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게 실력을 극적으로 올려주지는 않는다.
쿠웅!
아…….
55가 먼저 승부가 났다. 3분이 지났을 무렵 전통의 강자, 서울 선수가 울산 선수를 한판 던지면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리고 두 선수가 막 인사하고 퇴장하기도 전에 81도 승부가 났다.
우와아!
이번에는 울산 선수의 승리였다.
같은 학교라 희비가 극명하게 교차하는 결과였지만, 그래도 둘 다 입상한 거라 볼 수 있으니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울산 문현고.
요즘 떠오르는 강팀이면서, 지영의 다음 판 상대의 소속이기도 했다.
정보가 하나도 없는 선수지만, 지영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까 상대가 하는 걸 봤는데, 엄청나게 실력자는 아니었다. 다만 작고 딴딴해 자신과는 상성이 그리 좋지 않을 뿐이었다.
준결승 첫 게임이 끝나고, 매트를 정비한 뒤에 두 번째 경기 차례가 됐다.
임효중.
임효중이 등장하자 꺄아아! 여중생, 여고생의 비명 같은 함성이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아직 공식적으로 데뷔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홈페이지도 있고, 연습 동영상을 포함해 제법 자료가 있어서,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임효중의 데뷔를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현장에서 뛰었던 지영이나, 뛰고 있는 이성진보단 적어도 팬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팬이 없더라도 임효중은 잘 생겼다.
특히 황금세대 중에서는 가장 ‘아이돌스럽게’ 생긴 친구였다. 특히 젊은 층이 좋아할 얼굴이라 팬이 아니더라도 이런 환호는 당연히 나올 만했다.
그런 임효중은, 시합을 오래 끌지 않았다.
1분.
서울 대표를 상대로 딱 1분 만에 주특기 기술인 허벅다리로 한판을 띄우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나왔다.
꺄아아!
오빠아!
아이돌에게 환호하는 것과 같은 환호성이 나왔지만, 시합에 집중한 상태인 임효중은 그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 부분이 황금세대의 강점이었다. 보통 누가 이렇게 떠받들어주면 우쭐할 법도 한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가장 멘탈이 잘 흔들리는 이성진도 시합 때는 제대로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시합이 쭉쭉 진행됐다.
임효중이 나오고, 두 판 뒤에 강한결이 들어갔다. 저번 대회에서는 탈이 나서 시합 내내 고생하더니, 생생한 오늘은 모든 경기를 1분도 넘기지 않았다.
쿵!
뒤로 물러나는 상대를 쫓아가 안다리로 그대로 한판.
강한결의 시합은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지영처럼, 이성진이나 임효중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확실하게 한판을 따냈다.
이어서 이성진과 황석도 한판을 따내며, 다들 편안하게 결승에 안착했다. 그리고 준결승 가장 마지막 체급인 –73과 +100 시합이 시작됐다.
이우진.
이우진은 역시나 준결승에 올라왔다.
지영처럼 압도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시원하게 한판 던지면서 준결까지 올라왔다. 그런 이우진의 상대는 부산 선수였다.
그리고 여기에, 지영이 이번 대회에서 가장 주목하는 선수가 있었다.
부산 해동고 장성훈.
이 친구는 지영과 같은 고2이지만, 작년에는 전국대회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선수였다.
1회전과 2회전을 워낙 압도적으로 잡아서 좀 알아봤는데, 교포였다. 재일교포 3세로, 케이스가 안호진과 비슷했다. 일본에서는 한국 국적이기 때문에 국가대표가 되기 어렵기도 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천재 미야모토 신지가 있었다. 실제로 신지에게 벌써 세 번이나 패배했고, 그래서 귀화를 신청했다.
이런 과거가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실력은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 귀화 이후 제한이 풀리면서, 저번 추계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리고 전국체전에 나온 장성훈은 경기력만 봤을 땐 확실히 상위 클래스였다.
지금도 그랬다.
쿵!
제대로 업혀서 떨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막판에 몸을 겨우 비틀어서 한판은 면한 이우진의 위로 올라탄 장성훈이 굳히기를 이어갔다. 일본 선수들의 강점 중 하나가 굳히기가 아주 수준급이란 점이었다. 위로 올라탄 장성훈은 물 흐르듯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이우진을 옆으로 젖혔다. 그리곤 상체를 빼 목을 확실하게 제압했다.
그에 지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위험하겠는데.”
이미 장성훈은 어깨를 빼서, 겨드랑이 쪽으로 이우진을 끌어당겨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 현재 발만 꼬아져 있는 상태였고, 저게 빠지면 무조건 누르기다. 그리고 저런 자세에서 눌리면 최소 두 체급 위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았다.
옛날에야 굳히기를 중요시하지 않아 빨리 그쳐를 했지만, 요즘은 국제유도 흐름에 따라 한국도 굳히기 시간을 넉넉히 줬다. 특히 저렇게 누르기 직전이면, 평소보다 5에서 10초는 더 줄 수도 있었다.
“아…….”
그러나 굳이 시간을 더 줄 필요도 없이 장성훈은 발로 자신의 다른 발을 꼬고 있는 이우진의 발을 밀어낸 다음 그대로 누르기 포지션을 잡았다. 이우진은 그 순간 브릿지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지만, 장성훈은 그런 이우진의 다음 동작을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곧장 자세를 높여 가슴으로 도로 찍어 눌렀다.
오사에코미!
이우진이 브릿지에 실패한 순간 심판은 곧장 누르기를 선언했다. 이우진은 기를 쓰고 누르기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장성훈의 굳히기 실력은 대단했다. 제대로 한 번 뒤집기는 했는데 곧장 반대로 타고 넘어가 누르기를 유지했다.
누르기는 금방 끝난다.
고작 20초니까.
순식간에 20초가 지났고, 삐! 소리와 함께 한판 버저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에 자세를 풀고 일어나는 장성훈. 장성훈은 딱 2분 만에 이우진을 누르기 한판으로 끝내버렸다. 후, 짧게 숨을 내뱉는 장성훈은 여유도 있었다.
‘조심해야겠는데……?’
누르기가, 아니, 굳히기가 정말 수준급이었다.
이우진이 자신처럼 굳히기가 약한 것도 있겠지만, 딱 한 번에 타이밍을 잡아 저렇게 굳히기 한판을 따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영도 저런 식으로 한판을 따내기는 힘들었다.
굳히기는 지영의 특기도 아닐뿐더러, 전에 야나기가 왔을 때 조금 올려놓은 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결승전에서 장성훈과 붙게 된다면, 최대한 굳히기를 조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심해야 하는 것도 결승전에 갔을 때의 얘기다. 이우진은 패자의 모습으로, 장성훈은 승자의 모습으로 인사 후 퇴장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지영은 입장했다. 입장하면서 마주친 장성훈이 지영을 빤히 바라봤다.
호승심, 도전적인 눈빛.
이런 건 없는데, 마치 지영을 별것 아닌 것처럼 보는 눈빛이라 지영은 그와 지나치고 난 뒤에 피식 웃고 말았다.
+100 준결승 하나가 마저 끝나고, 준결승 마지막 게임이 시작됐다.
지영의 상대는 울산 문현고 3학년 최준상.
신장은 160 중후반에, 탱크처럼 단단한 체형을 가진 선수였다. 그 모습에 시합 스타일이 익히 예상됐다. 이전 판 경기들을 보면서도 확인도 했다.
‘조심해야 할 건 되치기.’
이런 선수들은 무게중심이 극단적으로 낮아서, 잘못 기술을 걸면 되치기에 그대로 날아간다. 또한 신장의 한계로 허리기술 선수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1, 2회전에도 거의 업어치기와 같은 손기술, 안 뒤축 같은 발기술을 구사했었다.
지영은 상대를 심판이 들어오기 전, 자신을 다부진 눈빛으로 바라보는 최준상을 보며 전략을 결정했다.
‘잡기로 조진다.’
신장은 이쪽이 월등하다.
그러니 잡기로 일단 조진 다음, 반칙 두 개를 먼저 먹인다. 그럼 상대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칙을 하나만 더 받으면 반칙패니까.
‘승부는 그때다.’
장기전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결승전에 땀을 한번 쫙 빼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전략을 구상하고, 길게 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갑자기.
“연예인님 파이팅!”
하는 응원이 들렸다.
그 응원은 소란스러움을 뚫고 정확히 지영의 귓가에 박혔다.
그에 흠칫한 지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관중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드는 한 사람이 보였다.
양유진.
그녀를 확인한 지영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 온다고는 했는데 이제야 도착한 것 같았다.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주는 양유진의 옆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고 있는 양지원도 보였다. 자리가 없던 것 같은데 용케 두 자리를 차지해 앉은 두 사람이었다. 그런 둘을 확인한 지영은 다시 상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시합에 찾아와 준 게 감사하고 고마웠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지금 환한 미소로 답해주는 것보다는 시합이 먼저였다.
‘연애한다고 운동 대충 했다는 얘기는 절대 들을 수 없지.’
가뜩이나 이 시합장엔 하이에나 같은 기자님들이 우글우글했다.
좋은 의도나, 본연의 임무로 온 기자도 있겠지만 적어도 절반은 지영이나 지영의 친구들 경기를 보고 별로 다 싶으면 물어뜯을 기삿거리를 챙기기 위해 왔을 거다. 그런 인간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심판이 입장했다.
짝! 지영은 뺨을 한차례 때려 모든 잡생각을 날려버렸다. 시합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심판의 수신호에 맞춰 인사하고 입장한 지영은, 짧게 기합을 지른 후 경기를 시작했다. 최준상은 역시 신중하게 접근했다.
호기롭게 지영에게 덤벼들었다가, 1회전과 2회전 상대가 시원하게 하늘을 날았던 걸 봤으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지영이 평소보다 조금 더 공격적이었다.
슥, 긴 리치를 이용한 잡기 싸움이 그 시작이다. 어깨를 먼저 잡은 지영은 상대를 천천히 요리하기 시작했다. 워낙에 작은 신장이라 중심이 무지막지하게 좋다는 게 잡는 순간에도 느껴졌지만, 유도는 중심만 좋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유리하긴 하지만, 그걸 깨부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고, 지영은 그 방법을 이미 깨달아 전략으로 세운 뒤였다.
툭!
돌아 나오면서 발목받치기.
그 한 번에 최준상의 신형이 대번에 흔들렸다. 옛날에나 이런 기술을 걸면 곧장 다리를 잡아 되치기를 걸었지만, 이제는 허리 아래는 손만 닿아도 반칙패를 걱정할 정도로 룰이 변해서, 이런 발목받치기에 최준상은 바로 적응하지 못했다.
흔들린 중심. 그 사이 지영은 손을 뻗어 가슴 깃을 잡고는, 상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확실하게 막아섰다.
나는 잡았고, 상대는 잡지 못했다.
이게 얼마나 불리한 건지는 유도를 하는 이들이라면 100% 전원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최준상도 그 100% 안에 들어가니 얼른 자세를 숙여 기술을 피했다. 이렇게 잡히면 되치기고 뭐고, 잘못하면 그냥 한방에 하늘을 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무리하게 기술을 걸 생각이 없던 지영은 모션만 주고는 그대로 심판의 그쳐 사인에 도복을 놓고 물러났다.
‘이제 한 번.’
한 번 더 공세로 나가면 최준상은 90% 이상의 확률로 지도를 받게 될 것이다. 10%가 비는 이유는, 당연히 이곳이 울산이기 때문이고.
하지메!
심판의 시작 신호에 지영은 다시 움직였다.
아직 최준상은 지영의 전략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기회가 오면 차긴 할 거지만, 중심이 무너지지 않으면 지영은 기술을 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걸 모르는 최준상은 똑같이 나오다가 또 어깨 깃을 먼저 잡혔다. 워낙 지영의 팔이 길어 잡힌 순간 안으로 팔을 뻗어 가슴 깃을 노려보지만, 지영은 그걸 어깨와 겨드랑이 경계선을 밀어서 들어오는 손을 막았다.
리치가 길면, 이런 점이 정말 유리했다.
나는 잡지만, 상대는 못 잡게 하는.
보통은 이렇게 해도 잡긴 하지만 최준상이 팔도 워낙에 짧았다. 다만 그 대신 힘이 좋았지만,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 애초에 힘에 당할 것 같았으면 이미 작년과 올해 중에 몇 패는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다 그에 맞춰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툭, 툭!
치고, 빠지고. 상대의 접근 자체를 막는 지영의 전략에 결국 최준상은 그쳐 후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재차 시작된 시합.
지영은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철저하게 잡기 싸움 후, 발목받치기와 모션으로 하체만 공략했다. 그에 최준상은 안 되겠는지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기도 했지만, 지영이 그 힘을 옆으로 흘리며 다시 발목받치기로 절반을 따면서, 경기는 더욱 일방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3분 경과 했을 때 최준상은 지도 두 개를 받고 절반을 빼앗긴 상태였다.
철저한 공략.
상대를 얕보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춰 철저하게 공략한 결과가 바로 이런 점수 차이였다. 그리고 그대로 4분이 지나 삐! 시합이 끝났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해서, 최준상은 울분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고, 지영은 그런 최준상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경기장을 벗어났다.
‘이제 결승전 하나.’
전국체전 2연패가, 코앞에 와 있었다.